호저집
1 찬집 / 2 편집
발행일 | 2022년 11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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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1438925 94810 |
면수 | 836쪽 |
판형 | 신국판 152x225mm, 하드커버 |
가격 | 90,000원 |
수상∙선정 | 2023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학술) |
1권 찬집 401쪽 979-11-91438-93-2(94810)
2권 편집 435쪽 979-11-91438-94-9(94810)
세트 2권 836쪽 979-11-91438-92-5(94810)
18세기 한중 지식인 교류의 현장, 『호저집』
『호저집』(縞紵集) 6권 2책은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셋째 아들 박장암(朴長馣, 1790~1851 이후)이 부친과 중국 문인들과의 교유 기록을 시기별, 인명별로 정리한 필사본 책자이다. 편찬 시기는 부친 사후 4년 뒤인 1809년 5월이다. 제목의 ‘호저’(縞紵)는 벗 사이에 마음을 담아 주고받는 선물, 시문, 편지 등을 가리키는 관습적인 표현이다.
박제가는 1778년, 1790년, 1791년, 1801년, 모두 네 차례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는 네 번의 사행길에서 수많은 청나라 문인들을 만났고, 귀국 후에도 이들과 계속 연락을 이어갔다. 그의 중국 인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1776년 유금(柳琴)이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가져가 청나라 문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의 서문과 평비(評批)를 받아온 일로, 1778년 첫 연행부터 박제가의 이름은 이미 북경 문원(文苑)에 알려져 있었다. 이후 네 번의 연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많은 중국 문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연행의 역사에서 개인으로서 중국 문인과 나눈 교유의 폭이 앞뒤를 통틀어 박제가를 능가하는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 문인과 폭넓게 교유했지만 단 한 차례 연행에 그쳐 박제가와 견주기 어렵다. 그리고 김정희의 중국 인맥부터가 박제가의 소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네 번의 연행과 이후 인편에 전해진 시문(詩文)과 서신, 제평(題評) 및 필담 자료까지 박제가의 집에는 중국 문인들의 묵적(墨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박제가는 생전에 이 자료들을 책자로 엮을 생각으로 정리해 두었지만, 만년의 갑작스러운 귀양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귀양에서 돌아온 뒤에는 병사하고 말았다. 부친 사후 셋째 아들 박장암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자료들을 편집해 『호저집』으로 종합했다.
『호저집』의 소장자 후지쓰카 치카시
『호저집』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본이 유일본이다. 원 소장자는 추사 김정희 연구로 유명한 전 경성제국대학교 교수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 그의 손때가 묻은 수택본(手澤本)이다 보니, 책 곳곳에 붉은색 잉크로 쓴 후지쓰카의 친필 메모가 보이고, 중간 중간 본문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카드에 적어 꽂아둔 것도 여러 장이다.
후지쓰카가 박제가를 접한 시기는 그가 북경 주재 해외 연구자로 있던 1923년이다. 당시 후지쓰카는 유리창 서점가에서 청대의 학자이자 장서가인 진전(陳鱣)의 『간장문초』(簡莊文鈔)를 발견했는데, 그 책 첫 장에 실린 「정유고략서」(貞蕤藁略敍)를 보고, 박제가라는 인물을 접했다. 하지만 당시 진전이 이름 대신 자(字)를 써서 ‘박수기’(朴修其)로 표기하는 바람에 후지쓰카는 박제가의 바른 이름조차 알 수가 없었다.
후지쓰카는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어느 날 서울 한남서림(翰南書林)에 들른 그는 우연히 보게 된 『사가시』(四家詩)에서 박제가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 후 본격적으로 박제가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각시집』(貞蕤閣詩集)과 『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을 손에 넣었고, 곧이어 『북학의』(北學議)와 『호저집』도 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나빙(羅聘)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화까지 구하자 그는 마치 박제가의 전모를 눈앞에 펼쳐 놓은 것처럼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되었다고 감격에 들떠 술회한 바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습으로 후지쓰카의 서적은 대부분 불탔지만, 방공호에 따로 보관한 박제가와 김정희 관련 귀중본과 필적만은 요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후지쓰카가 세상을 뜬 뒤 1950년대 초, 『호저집』은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 책의 대표 역자인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과)는 2012년 옌칭연구소에 1년간 방문학자로 체류하면서,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후지쓰카 소장본 자료 56종 200여 권을 찾아내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한 바 있는데, 이때 『호저집』을 접했다.
『호저집』 곳곳에 남긴 수많은 친필 메모와 교정 및 참고 사항의 추가는 후지쓰카가 이 책을 얼마나 아꼈는지 잘 보여 준다. 그는 『호저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의 연구 주제였던 청조 문화의 동전(東傳)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호저집』의 구성과 정리 방식
이 책의 편찬자인 박장암이 직접 ‘범례’(凡例)를 작성해 『호저집』의 구성과 정리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호저집』은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책은 다시 3권으로 나뉜다. 제1책은 찬집(纂輯), 제2책은 편집(編輯)이다. 각 책은 박제가의 연행 시기별로 1778년의 1차 연행을 권1, 1790년과 1791년의 연속한 연행을 권2, 1801년의 4차 연행을 권3으로 삼았다. 특별히 권1 앞에 권수(卷首)를 두었는데, 이는 박제가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던 선배 문인 몇 사람을 따로 떼어 구분한 것이다.
찬집(纂輯)은 박장암이 부친의 메모와 관련 기록을 조사해 인적 사항과 판단 정보를 인명별로 정리한 것이고, 편집은 집에 있던 자료를 찬집의 인명 순서대로 배열하여 당사자와 박제가 사이에 오간 수창 시문과 편지를 옮겨 적은 것이다. 찬집으로 인물을 파악한 뒤, 편집에서 교유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구성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제1책 찬집(纂輯)에는 박제가가 만난 총 172명의 인명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각 권별 인명 수록 순서는 1778년과 1801년의 경우, 부친 박제가의 메모에 바탕을 두었던 듯 나름의 근거를 갖추었으나, 1790년과 1791년의 경우는 선후가 모호하여 어림짐작으로 차례를 매겼다고 썼다. 각 인물별 사적은 전기(傳記)의 예에 따라 사제 관계와 교우 관계를 밝히고, 출처의 자취를 자세히 풀이하여, 지파와 연원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상세한 내용을 담으려 노력했다. 여기에 박제가가 이들에게 준 증별시와 회인시, 제첩시 등의 자료를 추가했다. 필담의 담초가 남아 있을 경우 모두 포함시켜 기초 자료로 제공했다.
박장암은 남은 친필 시문 끝의 서명이나 인장을 통해 얻은 정보까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직접 찾아 정리했다. 때로는 낡은 종잇조각에 적힌 알아보기 힘든 난필 메모에서 취해 오기도 했다. 그것마저 없을 때는 훗날을 기약하며 이름만 남겨 두었다.
제2책 편집(編輯)의 경우에는 시와 문을 구분한 구성을 생각했으나, 체재가 혼란스러워지자 시문과 서찰, 제평의 차례로 수록했다. 구작(舊作)을 주고받은 경우는 본문보다 한 글자 내려썼다. 편지와 답장, 원운시와 차운시는 주고받은 모든 내용을 수록해 전후 맥락을 가늠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최초 완역본 『호저집』, 책의 가치와 간행 의의
『호저집』에는 18세기 조선과 청나라 문인의 교유 양상과 그 세부 정황을 입체적으로 조망 가능한 다양한 유형의 자료가 있다. 최초 완역본 『호저집』은 박제가를 중심으로 한 한중 문화 교류의 전반적인 흐름과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첫째, 『호저집』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한중 문화 교류의 생생한 증언집이다. 무려 172명에 달하는 중국 사인의 인적 사항과 관련 시문을 수록해, 내용이 방대하고 교유의 실상을 세밀하게 보여 주는 자료의 보고이다. 이조원, 반정균, 기윤, 옹방강 등 쟁쟁한 문인 외에도 중국 쪽 사료에도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많은 인물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어 건륭·가경 연간 청대 지식계의 전반적인 동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요긴하다. 이를 통해 한중 문화 교류사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
둘째, 『호저집』에는 박제가의 문집에도 누락된 자료가 많아, 북학파 연구의 빠진 퍼즐을 채울 수 있다. 책에 여러 번 등장하는 『열상주선집』은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데, 『호저집』에 이조원, 반정균, 축덕린 등의 서문과 평이 실려 있다. 특히 편지와 필담 자료에는 생생한 분위기와 함께 당시 지식인들의 학적 관심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호저집』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한중 지식인의 교유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재현하고 있는 점은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셋째, 당대 한중 지식인의 교유 계보와 맥락을 추적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료집이다. 『호저집』은 홍대용에서 비롯된 전대의 만남을 잇고 김정희, 신위로 이어지는 성대한 접속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한중 문화 교류상 그 가치가 대단하다. 기록 속의 만남은 당시 이들의 교유가 의례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 지식인이 중국의 문인들에게 높은 인정을 받았고, 진실한 교유를 나누었음을 증언한다.
넷째, 특별히 옹방강과 완원, 조강이나 황비열 같은 학자들을 매개로 다음 세대 김정희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한 경과를 알 수 있다. 19세기 초, 김정희와 신위 등에 의해 주도된 옹방강 계열 지식인들과의 교유와 인맥은 실제로는 박제가의 인맥에서 출발한 것이 많다. 하지만 이들 중 많은 인물들의 문집이 중국에도 남아 있지 않아, 오로지 『호저집』에 남은 정보가 전부인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중국 건륭·가경 연간 지식계의 정황을 보정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섯째, 이들 사이에 오간 시문과 예물, 서간 등을 통해 당시 한중 지식인의 문화 취향과 공통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서적이나 시문, 또는 자신이 거처하는 공간의 제액(題額)을 요청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시문집에 서문 또는 발문을 써 줄 것을 요청한 내용도 많다. 도서 요청이나 금석문 탁본 등도 주요 관심 대상이었고, 그밖에 문방사우나 지역 특산품도 활발히 오갔다. 박제가는 그들에게 조선의 갓과 일본도를 선물하기도 했다. 서로 간에 초상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일을 기억해서 행사를 갖기도 했다.
1 찬집(纂輯)
권수(卷首)
권1 무술년(1778)
권2 경술년(1790), 신해년(1791)
권3 신유년(1801)
2 편집(編輯)
권수(卷首)
권1 무술년(1778)
권2 경술년(1790), 신해년(1791)
권3 신유년(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