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영화사
1892년에서 1945년까지
발행일 | 2019년 1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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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1999226 93680 |
면수 | 368쪽 |
판형 | 변형판 168x235, 소프트커버 |
가격 | 32,000원 |
짧지만 뜨거웠던 시대의 영상, 최초의 한국근대영화 연대기
조선인이 만들어낸 근대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을 담다!
∎ 탄생부터 존립까지,
근대 한국영화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근대사회로 빠르게 이행해갔다. 이 시기 유입되어 조선 문화의 획기적 변화를 주도한 문물 가운데 하나가 활동사진이다.『한국근대영화사』는 활동사진이 유입되고 1892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인부좌(仁富座)가 설립된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장면과 사건, 인물, 영화운동, 영화이론, 작품, 관련 기록을 포괄적 ․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영화가 유입되면서 극장이 설립되고, 영화 제작 산업과 흥행업이 발달하였으며, 영화라는 근대적 대중문화가 조선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신생(新生) 조선의 ‘영화인’과 조선의 ‘관객’은 일본의 자본과 일본 영화산업의 지배하에 자기 땅에서 타자로 위치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조선영화’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으로 생존 그 자체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다양한 영화적 시도와 개인적 역량이 꽃을 피웠으며 영화판은 변화와 각축, 새로움과 열정의 문화 장(場)으로 뜨거운 한 시대를 앓는다. 불과 5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겪은 왕조의 몰락과 식민기의 암울, 전쟁의 시련과 이념의 혼돈이 고스란히 이 시기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이렇듯 혼돈 속에서 급속도로 전개된 폭풍우 속 급류 같았던 당대 영화계의 역동적인 흐름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굳건한 토대가 된 것이다.
∎ 2019년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근대영화’를 새롭게 명명하다
조선영화는 서구 근대와 일본 근대 사이, 그리고 서구영화와 일본영화 사이에서 만들어진 식민지 근대의 산물이자 기록이다. 일제와 일본 영화산업과 타협하고 경합하며 만들어낸 조선영화의 미장센 속에 조선 근대의 풍경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근대영화’라는 용어와 그 개념을 최초로 공식화했다. 기술적으로는 유럽에서 발명되었고,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재탄생한 영화는 전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와 경제 시스템 속에서 조선에 유입되었다. 비록 조선영화의 근대는 식민지 상황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속에서 일궈낸 조선인, 조선영화라는 독보적인 자의식은 그 시대가 남긴 영화와 그들의 영화적 행보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저자들이 일제 강점 시기의 조선영화를 ‘한국근대영화’라고 명명한 이유는 바로, 조선영화가 조선인이 만들어낸 근대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가 상영되었다. 1963년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이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아 이날을 ‘영화의 날’로 지정하였고,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 책 『한국근대영화사』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한국영화의 다양한 근대성 논의를 세 명의 저자가 하나로 엮어낸 15년 연구의 결실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는 9편의 조선영화 필름이 차례로 발굴되었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2014년까지 일본 잡지와 매체 속에 남은 조선영화 기록을 집대성했다. 해당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에 대한 총체적 고찰이 근대영화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고 영화사의 누락된 부분을 채우며 책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간 출간된 통사 형식의 한국영화사에서 다루었던 근대기 영화에 관한 주요 쟁점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롭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쟁점과 논의를 재분석했다. 한국근대영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주요 주제들을 엄밀한 비교 분석, 확장된 한일 관계사 연구 등을 통해 보다 치밀하게 기술한, ‘한국근대영화사’의 첫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 영화 상영장의 진풍경, 영화에 열광했던 조선인 관객들
얼마 전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드라마의 배경은 20세기 초 경성. 이 시기 조선 지도를 보면 서대문에서 종로통을 중심으로 원각사, 우미관, 단성사, 광무대 등 조선인을 위한 극장이 있었고, 남대문과 충무로, 남산을 잇는 본정길에는 일본인 전용 극장이 늘어서 있어 극장은 두 민족의 정신적 거리만큼이나 지역적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1903년 『황성신문』에는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동화 10전을 받고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실렸는데, 새롭고 진기한 볼거리였을 ‘움직이는 사진’을 보러 전기회사 기계창고 공간에 모여든 조선인들의 호기심에 찬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극장이 세워지던 전후 시기의 영화 상영 모습을 전해주는 진풍경이다.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이 제작되기 전, 조선에서는 이미 서구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영어가 일상화되지 않았던 시절 관객들은 동작에 맞춰 나오는 소리가 더없이 진기했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지껄임’에 이내 피로감을 느꼈고, 〈춘향전〉의 상영으로 조선 사람의 말이 스크린에서 들리자 이에 열광했다. 토키 〈춘향전〉을 보기 위해 극장은 매일 매야 초만원을 이뤘고 이 영화의 성공은 토키 제작 열기에 불을 붙였다. 1940년대 전시체제하에서도 계발과 선전을 목적으로 한 지방 순회상영회는 계속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조선총독부 직원의 다음 기록에서 영화 속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든 조선 관객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영사반이 멀리 떨어진 벽지의 촌락을 방문하면 2리 3리나 떨어진 부락에서부터 조선의 많은 아녀자들이 아기를 업고 도시락을 지참하여 도보로 오는데, 추운 겨울에도 화기가 적은 (상영)회장에서 마지막까지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열심히 보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또 도보로 수 리 길을 돌아가는데, 이런 장면을 보면 ‘역시 영화밖에 없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된다.”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조선영화’의 풍경을 엿보다
영화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자본주의적 성격과 오락성이 핵심인 예술이지만 당시에는 계몽과 교화를 위한 다양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조선에서 제작된 최초의 위생 계몽영화 〈생의 과〉(生の誇, 1922)는 위생관념이 부족하여 전염병에 걸린 여주인공이 미모가 망가져 괴로워하다 연인과 함께 자살한다는 내용으로, 극적 줄거리를 통해 대중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의 검열과 제약으로 상영이 취소된 영화도 있다. 최초의 극영화인 〈국경〉(1923)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 영화로, 일본 국경수비대가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이었다. 이 마적단이 만주에서 활약하던 우리 무장독립군이었던 까닭에 개봉 첫날 조선인 학생들의 엄청난 비난과 야유를 받았고, 조선인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일본 어린이들은 의무교육을 받던 시대, 수업료를 내지 못해 거리의 부랑아로 전락한 조선인 학생을 조선의 목사가 구제한다는 내용의 〈수업료〉(1940) 역시, 제국의 심기를 건드려 상영 금지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에 의해 최초로 영화가 제작된 것이 1919년이라고 하고 그 이전에도 영화는 제작되었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안타깝게도 필름으로 남겨진 가장 오래된 영화 자료는 1934에 제작된 〈청춘의 십자로〉다. 이 영화를 통하여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일과 당시의 영화 문법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근대의 풍경을 그 시대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영화 속에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 유한층이 누리는 각종 생활용품들, 그리고 기차와 자동차의 질주, 골프 치는 모습 등이 그려졌는데, 이런 장면들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일종의 희열감을 주었을 것이다. 말로만 들었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근대적 삶, 그것이 비록 신기루 같은 것일지라도 스크린은 관객들에게 충분할 정도로 시각적 쾌락과 영화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었을 것이다.
∎ 대중과 함께 울고 웃었던, 한국근대영화를 빛낸 별들
조선영화 초창기의 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활동사진시대의 꽃’이라 불리는 변사들이었다. 초창기 변사들 대부분은 하급관리 출신으로, 활동사진이 인기를 끌면서 변사라는 새로운 직종을 개척했다. 극장에서의 역할이 커지자, 그들은 요즘의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조선인을 위한 상설관 우미관의 주임변사였던 서상호는 자전거 클랙슨을 이용한 ‘뿡뿡이 춤’이라는 개인기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토키시대가 도래하면서 변사들은 지방으로 밀려나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극장 운영과 영화 제작에 참여하거나 극작가로 변신하는 등, 새로운 길을 개척한 변사들은 이후 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리랑〉을 촬영할 때에 나 자신은 전신이 열에 끓어오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 오직 내 정신과 역량을 다하여서 … 자랑할 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 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 근대영화의 상징, 조선영화의 톱스타 나운규가 〈아리랑〉 제작 시기를 회고하며 쓴 글이다. 다양한 시각에서의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자신의 영화에 민족 정서를 은유하고 조선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는 점,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극영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나운규의 영화 세계는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근대영화를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면 그 속에는 오늘의 우리 영화를 있게 한 선구자들 즉 제작자와 감독, 촬영기사와 녹음기사, 극작가, 이론가와 사상가, 배우와 스텝 등 별처럼 수많은 스타들의 이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가운데 특히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것은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았던 여배우들이다.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이규환 감독)로 데뷔한 문예봉은 최초의 토키영화이자 흥행 대작 〈춘향전〉 외에 여러 극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았고, 그의 인기와 국민적 영향력으로 1940년대 국책영화 시기 수많은 선전영화에 출연했다. 첫 영화〈심청〉(1937, 안석영 감독)으로 대스타가 된 김신재는 1980년대까지 2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1948년 북으로 간 문예봉은 인민배우로 생을 마감했고, 한국전쟁 이후 남편 최인규 감독이 납북되어 홀로 남한에 남겨진 김신재는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단아한 모습으로, 또는 귀엽게 미소 짓는 얼굴로 영화의 스틸 사진 속에 남겨진 그들의 모습과 근대영화 속 활약상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다.
∎ 1892∼1925 영화 유입에서 극영화의 시대까지
- 조선인 극장의 설립과 조선영화의 탄생
1892년 인천에는 조선 최초의 극장이 설립된다. 1부에서는 이 시기부터, 무성영화가 제작되어 영화 제작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던 1925년까지를 다룬다. 최초의 조선영화는 어떤 조건 속에서 탄생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일제에 의한 조선 영화산업의 구조화와 지배에 있다. 책에 담긴 초유의 발굴 자료와 서술 내용은 제작과 상영을 포함한 영화 전반이 정치 경제적 맥락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19세기 말 개항장에 들어선 ‘극장’은 전근대 유교문화 아래 돈을 지불하고 흥행물을 거래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흥행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장소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뒤 조선은 손쉽게 일본 영화산업의 소비지로 구조화되었으며, 자연적으로 조선인은 열린 공간에서 전통 연희를 즐기던 구경꾼에서 흥행물을 소비하는 근대적 관객으로 재탄생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본인 자본의 극장을 중심으로 일본인에 의한 영화가 조선에서 제작되기 시작한다. 단성사, 광무대 등에 이어 1912년에는 조선인을 위한 활동사진관 우미관이 설립된다. 우미관 역시 일본인 업자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그곳의 영사기사, 변사, 악사, 사무원 등 실무 담당자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조선 영화인이 탄생한다. 그리고 1919년, 일본 영화사와 특약을 맺은 조선인 전용 극장 단성사에서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다. 극영화 제작이 시작된 1919년에 이르러 일본인 흥행업자들은 소수 일본인 대상에서 관객 수가 많은 조선인으로 시선을 돌렸고, 1923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극영화 〈국경〉과 조선의 고전을 소재로 한 〈춘향전〉(하야카와 고슈 감독)이 제작됨으로써 조선에서도 극영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1920년대 초반 윤백남, 조일재 등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인 주도의 영화회사는 〈아리랑〉과 같은 보다 근대적 가치의 영화 탄생에 인적 ․ 물적 토양을 제공하였다.
∎ 1925∼1935 나운규의 〈아리랑〉부터 〈청춘의 십자로〉까지
- 조선영화의 각축, 사상과 예술의 신물결
조선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이후 전래 이야기나 일본 원작에 기대어 영화를 만들었던 조선 영화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게 된 것은 나운규의 〈아리랑〉(1926)에서였다. 이로부터 약 10년 후 조선 최초의 토키(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이 제작됐다.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던 이 10년은 향후 조선영화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2부는 이 시기를 이끈 조선 영화인들과, 영향력 있는 대중문화 매체로 새롭게 등장한 라디오 방송, 1920년대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카프영화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더불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영화 필름이자 조선 무성영화의 이정표라 불리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1934)를 통해, 한계 속에서나마 조선 무선영화의 양식을 가늠해본다.
조선영화 제작 초창기 중심인물이었던 이경손, 변사 출신으로 영화계와 대중음악계에서 활약한 김영환, 조선영화의 전설이 된 나운규, 문예계의 신흥 인텔리를 상징하는 심훈 등 이 시기를 이끈 주요 인물들의 미학적 정체성과 영화적 환경, 이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조선 영화인들의 활동은 조선인의 영화적 활동이 비교적 주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새로운 모색을 꿈꾸었던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영화활동은 사회주의운동의 맥락에서 영화적 신념을 사회 변혁으로 이끌고자 했던 카프영화운동과 적색노조운동이다. 비록 1931년 전후의 대대적인 검거사건에 의해 좌절 ․ 해체되고 말지만, 이들의 활동은 현재까지도 ‘영화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카프영화운동이 막을 내릴 무렵부터 〈춘향전〉(1935)이 만들어지던 시기, 조선의 식민지 상황은 더욱 엄중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은 제국주의적 행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경제상황은 참혹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대중문화계는 생존을 위한 변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극심한 검열로 인해 비판적인 표현 자체가 봉쇄되자 대중문화 서사는 점차 통속적 취향으로 변해갔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진 최독견의『승방비곡』과 현재 무성영화 필름의 형태로 남아 있는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1934)는 이러한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 1935∼1945 토키의 시작 〈춘향전〉부터 국책영화시대까지
- 엄혹한 시대, 조선영화의 꺼지지 않는 불꽃
〈춘향전〉이후 조선 영화계는 질적 변화와 세대교체를 이룬다. 발성영화시대에 진입한 이 시기부터 해방을 맞이한 1945년까지, 조선영화는 끊임없이 ‘생존’을 모색하였고 ‘조선영화’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겪게 된다. 1930년대 중반 발성영화 국면을 변화시킨 것은 일본의 영화 촬영소에서 수련하고 돌아온 조선의 영화 청년들이었다. 무성영화시기부터 잔뼈가 굵어온 선배 영화인들과 그들로부터의 도제로 성장한 영화인 그룹에, 이규환 ․ 방한준 ․ 박기채 ․ 신경균 ․ 양세웅 ․ 김학성 등 이른바 2세대로 불리는 일본 유학파 영화인들까지 합류한 것이다. 발성영화라는 새로운 기술 방식을 놓고 조선 영화계는 다시 한 번 집중과 도약을 도모하게 되었다.
조선 영화계 인력과 자본이 자극을 받고 움직이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1934년의 ‘방화’ 상영 강제 규정이다. 서구영화 상영을 제한하고 방화 상영을 늘리는 규정에 따라 일본영화와 함께 ‘방화’에 속했던 조선 영화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소생의 기회’로 여겼다. 이러한 흐름 속에 최남주와 이창용에 의해 조선인 자본의 제작사 ‘조선영화주식회사’와 ‘고려영화사’라는 영화기업이 탄생해 안정적인 제작 시스템을 향해 나아갔고, 그들은 조선영화 시장을 식민지 조선으로 한정하지 않고 일본 영화사와 합작을 시도함으로써 일본 본토, 만주 등 일본 제국주의 영역으로 확장할 길까지 모색한다. 그러나 이들의 의욕과 희망은 1939~1942년간 각각 3, 5편의 영화를 남기고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국책영화 제작사로 통합됨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1940년 ‘조선영화령’으로 출발한 식민지 조선의 영화 통제는 1944년 제작과 배급까지 단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되면서 마무리된다. 조선 영화인들은 대부분 통합된 회사의 직원으로 수용되었고, 일본과의 합작영화, 내선영화, 문화영화로 불렸던 국책 선전영화 등의 제작에 동원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제 당국과 조선총독부를 앞세워 조선 영화인과 재조선 일본인이 함께한 조선 영화계의 협상에 의해, 조선영화라는 이름과 조선영화라는 특수성은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일 혹은 반일, 협력 혹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문화적 역동성이 조선영화에 새겨진 것이다. 전시체제와 국책영화시대를 통과하면서 살아남은 조선영화는 그 이름 그대로 해방공간으로 이어졌다.
책을 내면서
1부 1892-1925
영화 유입과 영화산업의 형성 (한상언)
1 영화 유입과 극장 설립
– 극장과 흥행업의 탄생
– 활동사진 유입
– 언어와 문화 차로 이원화된 서울의 극장
2 영화산업의 형성
– 활동사진 상설관 등장
– 닛다 연예부와 하야카와 연예부
– 우미관과 단성사
– 활동사진시대의 꽃, 변사
3 연쇄극과 영화 제작의 시작
– 연쇄극 유입과 제작
– 일본인 상설관의 극영화 제작
– 조선총독부의 영화 활동
– 경성일보사의 영화 제작
4 극영화의 시대
– 극동영화구락부의 〈국경〉
– 동아문화협회와 단성사 촬영부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백남프로덕션과 계림영화협회
– 영화 검열
2부 1925-1935
영화, 영화인, 영화운동 (이효인)
1 1920년대 중반, 조선영화 장場의 각축
– 근대영화의 출발, 유랑하는 이경손 ․ 변사 감독 김영환
– 근대영화사의 절반, 나운규
-〈아리랑〉, 통속성과 외래성 그리고 민족성
– 심훈과 ‘먼동이 틀 때’
– 대중문화 시장의 각축, 라디오 매체의 등장과 경성방송국
– 영화를 찬양하는 모임, 찬영회
2 조선영화의 새로운 시도
– 조선영화예술협회
–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결성과 해체
– 근대영화의 시도, 카프KAPF영화
– 주인규 그룹과 적색노조영화
– 카프 검거사건
3 1930년대 초반, 조선영화 장場의 변화
– 근대영화의 대중성, 최독견 ․ 윤봉춘 ․ 이규환 ․ 안종화
– 경향영화에서 대중영화로
3부 1935-1945
발성영화시기에서 전시체제까지 (정종화)
1 발성영화라는 모색
– 토키의 시도(들)
– 경성촬영소의 협업協業 시스템
– 조선 영화인의 분투, 한양영화사
– 일본영화 촬영소 유학파
– 무성에서 발성까지, 조선영화의 스타일
2 조선영화 제작 지형의 변화
– ‘영화 통제’라는 역설적 기회
– 조선 영화계의 활기, ‘조영’과 ‘고영’
-〈나그네/다비지〉 그리고 일본영화와의 합작 경향
– 조선영화의 이출移出과 ‘내지’ 일본의 수용
3 조선영화의 전시체제
– 조선영화령과 영화신체제
– 1940년대 초반 경성 흥행계
– 조선영화와 내선일체內鮮一體
– 문화영화 : ‘조선문화영화협회’와 ‘조선영화계발협회’
– 최인규의 〈수업료〉와 〈집 없는 천사〉가 말해주는 것들
4 국책영화라는 장場
– 조선영화의 마지막 모색
– ‘조선영화’라는 특수성
– 식민지 영화 국책의 산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 임화의 ‘조선영화론’
* 미주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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