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시대 1 – 최완수 외 지음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10.31 | 목록
최완수 지음
발행일 1998년 3월 30일 | 면수 376쪽

진경시대 1 – 최완수 외 지음 / 돌베개
부제 : 우리문화의 황금기, 사상과 문화

간송미술관은 故 전형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민족문화의 수호와 계승 발전을 위해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운영하며 저자 중 한 명인 최완수를 중심으로 각 분야에 걸쳐서 전공별로 조선 왕조 문화의 황금기인 진경시대眞景時代의 문화를 조명하는 연구를 수십 년 동안 제각기 진행해오고 있다.

그 연구 업적들을 한 곳에 모아서 두 권의 책으로 엮었다.

진경시대의 사상, 정치, 경제, 문학, 회화, 서예, 도자기 등 제반 분야에 걸친 논문 등이 망라되어 있어 조선왕조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길잡이 노릇을 하기에 충분하다.

조선 후기 문화사 쪽에 관심이 많던 나로서는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구해서 집 서고에 쌓아 두었으나, 내용이 논문 형식이라 도입부의 단단함을 깨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차일 피일 미루다 잡게 된 책.

이제는 몇 년간의 단련을 통해서 보는 힘을 길러서인지 내용을 소화할 힘이 생겼는지 책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초심자들이 읽기에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논문형 연구서적임은 알고 가야 하겠다.

참으로 군더더기 한 줄도 없이 깔끔하게 딱해야 할 이야기만 담겨 있다, 아니 한 단어도 없이 숨 가쁘게 핵심만 요약해서 쓴 정말 드라이하게 연구에 대한 논문으로만 답하는 압축 요약서.

1권은 『진경시대. TXT』로 2권은 『진경시대. JPG』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참으로 내공 있는 저자 9명이 모여 만든 1998년에 만든 책이지만 20년에 가까운 지금 열어봐도 주옥같은 핵심만 꿰어서 엮었다.

덕분에 내공이 부족한 사람이 읽으면 영 딱딱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핵심만 정확하게 짚어준 덕분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힘이 살아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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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루었던 문화절정기를 일칻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

그 기간은 숙종(1675~1720)대에서 정조(1777~1800)대에 걸치는 125년간이라 할 수 있는데 숙종 46년과 경종 4년의 50년 동안은 진경문화의 초창기라 할 수 있고, 영조 51년 재위 기간이 그 절정기이며 정조 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진경문화가 이 시대에 이르러 이처럼 난만한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의 뿌리가 되는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이 이 시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_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차지했다 해도 중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야만 풍속인 변발호복을 한민족에게 강요하여 중화문화 전체를 야만적으로 변질시켜 놓았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문화 전통이 단절되었던 판단이었다. 그러니 중화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적통嫡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는 조선이 중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_삼연 김창흡의 문하에서는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과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배출되어 이들이 진경문화를 절정에 올려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낸다.

_ 조선 고유색 발현에 앞장서서 진경문화를 선도하던 겸재 세대가 숙종 초년(1675)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한 세대인 데 반해 명 문화의 계승을 주장하며 중국풍으로 환원을 시도한 세대는 숙종 35년(1709)경에 출생한 세대들이었다. 30여 년이라는 한 세대 차이의 세대 간의 갈등과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문화적 대립 현상은 오히려 진경문화를 다양하고 폭넓게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_ 단원 김홍도, 고송 유수관 이인문, 긍재 김득신, 초원 김석신 등이 출현하여 겸재 세대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화원화가들이었다.

_ 인문학의 핵심인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간단하게 지칭하는 문(文), 사(史), 철(哲)이 전공필수라면 시와 글씨와 그림의 시(詩), 서(書), 화(畵)는 교양필수였다. 전자가 이성 훈련을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감성훈련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문학 사상은 사상사의 흐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 철학이나 사상이 나무의 뿌리에 비유된다면 문학작품이나 그림, 글씨는 꽃이나 열매에 해당될 터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는 제반 문화 양상이 성리학을 사상적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에 시대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의 흐름과 변화 양상에 주목하면서 문학사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_ 북학사상은 19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다. ‘무징불신 실사구시(無徵不信 實事求是 : 징험하지 않고는 믿지 않으며, 실제의 일에서 진리를 구한다)의 학문 정신으로 고증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금석학이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발달하였다.

_ 조선 왕조는 문치 국가답게 글로써 벼슬을 사는 문한관(文翰官)을 중시하여 이에 관련되는 관직을 청직(淸職)이라 하였고 청직을 거친 사람만이 고위직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 이 문한관의 대표적인 존재가 문형이었다.

_ 18세기 전반기는 호란 후의 대청 명분론에 의한 북벌론이 점차 시대적 당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후유증 극복과 자신감의 회복과정을 통해 축적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중화주의가 팽배하고 내 문화가 최고라는 국수주의가 풍미하여 조선의 제반 문화현상에 고유색이 나타난 시기.

이러한 사상계와 정계를 주도한 정파가 다름 아닌 서인 계열의 노론세력. 노론가문 출신으로 노론의 집중 거주지인 북악 아래 같은 동네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은 그 양향을 곧바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시대사조에 힘입은 새로운 예술 양식을 창출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북촌에 살며 사상적으로 낙론의 중심인물이던 안동 김문의 삼연 김창흡의 제자였다. 김창흡은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진경시 문학운동의 선두주자였다.

_ 옛 것을 본받는 법고(法古)는 때묻을 염려가 있고 새로이 창조하는 창신(創新)은 경전에 의거하지 않음으로써 상도(常道)에서 어그러질 걱정이 있다. 법고 하되 변화를 알고 창신 하되 전거에 능하다면 지금의 글이 오히려 옛날의 글이다./ 박지원 문장론

_ 위항(委巷)이란 여항(閭巷)의 동의어로 대저택들이 있는 부촌에 대칭되는 오늘날의 달동네, 즉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이어진 가난한 동네를 일컫는다 따라서 위항이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

양반 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 계층이니 상민이나 천민도 포함된다. 중인계층이 주축이 되어 전개한 위항문학운동은 기존의 문학계에 있어서 사대부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했던 한시단(漢詩壇)에 중인 출신의 시인군이 대거 참여하여 대세를 이룬 조선 후기 문학운동사의 한 흐름을 말한다.

전기에는 다양한 통로로 신분상승이 가능하였던 중인계층이 이즈음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고착되었던 것이다.

서얼층은 통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양반 사대부와 똑같이 청직에 통하게 해달라는 운동으로 18세기 영조, 정조 시대의 탕평책에 편승한 운동이었다. 이른바 벼슬길에 나아가는 환로 평등운동이었다.

_ 서울과 서울 교외에는 서울과 관계를 맺으며 생활하는 사인(士人)계층, 곧 경화사족층이 형성되었다. 벼슬을 했거나 하기 위하여, 또는 그와 관련하여 서울과 교외에 거주하거나 아직 향촌에 기반을 둔 채 서울의 경저나 셋집을 근거로 서울 생활을 하든지 서울 나들이를 하는 부류, 또는 몰락하였지만 돌아갈 향촌 기반이 없으므로 서울을 떠날 수 없게 된 사족들이 경화사족층이 됨. 이들은 나름의 학문과 사상적 지향을 가진 채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 운영에 참여, 일부는 안동 김씨, 반남 박씨처럼 순조대 이후 세도정권에 참여하여 세도가와 경화거족이 되기도 함.

이런 가운데 경화사족들에게는 명분론이나 혈연과 학연으로 연결된 사회관계보다는 경제적 조건이 사회적 행세의 실질적 기준이 되는 추세가 나타났음. 정조대의 사상적, 문화적 혁신 움직임은 바로 이들 경화사족층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_ 진경시대의 문화는 경화사족과 위항인이 사상적 공감대를 가지며 함께 참여하여, 조선의 산천을 묘사하고 노래하는 가운데 개성적인 시문서화풍이 어우러지며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_ 문예부흥기라고 하면 성리학으로 첨체되었던 문화가 실학으로 새롭게 부흥하는 시기라는 의미이고, 진경시대라고 하면 조선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의 고유문화가 꽃을 피우는 시기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상반된 입장 모두가 영조대를 우리 전통문화가 꽃 피는 시기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 기반이 되는 사상이 조선성리학인가 실학사상인가 하는 데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_ 경연은 요순사회 같은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연구한 산림학자들과 이를 공부하여 문과 급제한 홍문관 관료들이 임금에게 이상사회를 이루는 구체적인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경연은 조강, 주강, 석강 소대, 야대로 이루어지는데 조강, 주강, 석강은 법연이라 하고, 소대, 야대는 수시로 편하게 소규모로 행하는 경연이다. 그리고 경연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이상사회를 이룬 사람인 성인(聖人)의 학문 즉 성학(聖學)이라 한다.

_ 임란을 겪게 된 사원은 막대한 외형적 피해를 입는 가운데서도 승려들이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룸으로써 이제까지 저급한 사회신분으로 처우되던 승려들의 지위가 일약 국가로부터 공직 승인을 받는 지위로 격상하게 된다.

선조 26년(1593) 3월에 사명대사 유정에게 선교 판사의 지위를 부여, 팔도에 2인씩의 총섭(摠攝)을 두고 총지휘자로 도총섭을 두어 불교계를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승직이 제도적으로 운영되게 하였다.

_ 의승군 활동을 통해 드러난 승려들의 조직적이고 우수한 역량은 국가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활용한 것이 서울을 방어하는 성곽 축조사업이었다. 인조대의 남한산성 수축사업, 숙종대의 북한산성 수축 및 11개 승영을 설치하여 의승군들이 방어를 담당.

인조 2년 평양산성 축조, 인조 18년, 숙종 44년에 거듭 수축된 적상산성을 비롯 동래부성 등이 그것. 이러한 제한적인 국가활동과는 달리 여전히 불교예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 기본 시책.

_ 왜와 청의 침입을 받아 인구는 급격하게 줄었고 많은 농경지가 황폐화, 그러나 1650년부터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680년 무렵에는 임란 직전의 수준으로 회복하여 1,400만여 명에 이름. 18세기 말에는 가장 번성하여 조선 시기에서 가장 높은 수치에 다달아 1,850만여 명이 되었다.

15세기 이래 수도로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던 한양은 18세기에 이르러 가장 큰 상공업도시로 성장 조선 전기의 한양인구(세종때 약 10만 3천여 명)는 대부분 성안에 집중. 상 바깥은 개발이 제한된 채 얼마간의 농민이 생활하고 있었다.

_17세기 후반 무렵, 양반이 많이 산다는 한양 북부 지역의 호적 분석에 의하면 양반호가 20%, 상민호가 25%, 노비호는 50% 이상이었고, 인구의 구성비는 양반이 10%, 상민 15%, 노비 75%였다. 호수나 인구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노비들은 관노비나 양반가의 사노비였을 것이다.

진경시대에 들어서면서 신분간의 이동이 일어남, 도시나 빈촌보다 농촌촌락에서 신분 이동은 더 심해서 양반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 이후가 되면 양반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평민, 노비 순이었다.

18세기 전반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울산부 호적 분석에 의하면 양반은 1/5에서 2/3으로 크게 늘고, 평민은 1/2에서 1/5로, 노비는 1/3에서 1/6으로 줄어들었다. 진경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봉건적인 신분구조가 이미 무너져서 가장 많은 양반을 상층으로 한 역삼각형의 신분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_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토지에 대한 소유욕을 부채질하고, 경영방식을 바꾸도록 하였다.

_ 향촌의 장시는 16세기까지는 주로 중부 이남 지역에서만 발전했지만 임란 이후에는 중부 이북 지역까지 확대 발전하였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1,000개 이상의 장시가 나타나 전국을 조밀하게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장시가 확대되면서 장이 서는 날도 열흘 장에서 점차 오일장 체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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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시대 1 – 최완수 외 지음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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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간송 전형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 왕조 문화의 절정 시점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진경시대의 문화를 조명하는 연구를 수십 년 동안 제각기 진행해오던 연구 자료를 한 곳에 모아 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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