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승효상 지음 / 돌베개
부제 : 도시와 건축을 성찰하다
부제에서 보듯, 도시와 건축을 성찰한다.
도시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겉 모습만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부분은 물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는 시각까지도 챙겨야 한다는 뜻인 성찰의 필요성을 말한다.
건축에 담긴 크고 작은 삶의 흔적과 사상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책에 담았다.
삶에 대해 성찰한 책이 철학 에세이라고 하면 건축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한 뒤 분석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 말한다.
2016년 10월 25일 출판기념회 겸 강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잽싸게 달려가서 승효상 저자의 강연을 두 시간 가량 듣고 싸인도 받은 책.
그는 건축을 이야기하다가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의 표상』의 글을 인용하여 지식인에 대해서 말했다.
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삶의 철학으로 넘어오고, 지배 체재의 합리성을 건축으로 구현하고자 한 지배자의 논리도 나오며, 외부로 노출된 건물은 건물주가 주인이 아니라 그 주변과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까지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의 소유자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의식, 성적인 특권에 의문을 제기하라고 그는 말하며 건축과 양심과 행동에 책임질 자세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주문한다.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며 나아가라고, 반응하라고 한다.
건축 책인지, 철학 책인지, 삶에 대한 에세인지…
경계를 넘나들며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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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 추방해야 하는 자다. … 그는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의식, 성적 특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되 모험적인 용기의 대담성과 변화의 표현을 지향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나아가는 것에 반응하는 자다.” –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의 표상』
_ 이스라엘에는 석회암이 온 땅에 널려 있어서 집은 돌을 쌓아 짓는 게 보편적이었으니 이스라엘에서 목공이었던 예수는 석공일 가능성이 높고, 그리스어 성경 원전에 따르면 요셉의 직업은 ‘텍톤’이라 한다. 텍톤. 어떤 형상을 짜고 구축한다는 뜻의 이 단어는 바로 건축가의 영어인 ‘architect’에 쓰였다. ‘arch’라는 접두사는 으뜸이라는 뜻이니, 예수는 생뚱맞은 목수가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가였다는 게 옳다.
_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개 두 종류, 하나는 공학이나 기술, 다른 하나는 예술. 대학에서도 건축과는 공과대학이나 미술대학에 속하는 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 학문적으로도 상위 분류는 기술과 예술, 하지만 우리 삶을 영위하는 공간의 형성 측면에서 보면 인문학이라 주장.
_ 도시는 무엇일까? 도시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농촌은 기본적으로 혈연으로 구성되어 인륜이나 천륜만으로도 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여 만들어진 도시 공동체는 합의된 규약에 의해 유지된다.
_ 미국에선 7만여 평의 땅 위에 11층 33개 동의 아파트를 균일하게 배치시키며 흑인과 백인 가구 지역을 나누고 모든 공간을 기능과 효율로 재단하여 분류한 이 아파트는 계급적으로 분류된 세대는 계층별 갈등을 불러 결국 해체 결정, 지어진 지 17년 만인 1972년 폭파 해체한다…. 그러나 이 폐기된 마스터플랜이 우리 땅에 전가의 보도가 되어 종합개발 형태로 50만 명이 사는 분당이라는 도시를 5년 만에 만드는 것으로 접목된다.
_ 도시는 오랫동안 성벽 속에 형성된 계급적 공동체, 한 지역을 성벽으로 한정하고 그 속에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 이는 성벽이 없어진 18세기 무렵까지 무려 반만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곧 지속된 도시의 개념. 덕분에 성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부르주아가 착취 계급의 대명사가 됨.
_ 오래된 서양도시들, 예컨대 런던이나 파리, 빈이나 프랑크푸르트의 원도심은 2,000년 전인 팍스로마나 시절 로마군단의 주둔지였다.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오늘날 유럽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_ ‘이상향’으로 번역하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 출간한 소설책의 제목이다. 그는 그리스어 두 단어를 합성해서 이를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갖지만 ‘U’는 뜻이 모호하다. 그리스어 ‘뎌’, ‘ou’는 둘 다 ‘유’로 발음되는데 ‘eu’는 ‘좋다’라는 뜻이며 ‘ou’는 ‘아니다’라는 뜻이라서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말이 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_ 묘역에는 죽은 자가 있는 게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거주할 뿐이다. 그러니 묘역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남은 우리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장소며 풍경이다. 그래서 묘역을 찾는 일, 묘지를 가까이 두는 일은 우리 삶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일이 된다.
_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 윈스턴 처칠
_ 사실 스펙터클한 시설이나 구호나 선전이 자주 나타나는 사회는 전제주의 사회이거나 저급한 의식의 미개발된 사회다. 내 어릴 적 ‘멸공’, ‘‘조국 근대화’,’,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모순 덩이의 구호가 시내 곳곳에 얼마나 많이 붙어 있었던가.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그런 환상을 심어 표를 구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기만이고 허위여서 결국은 우리를 절망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런 보이지 않는 폭력을 방조해서는 안 된다.
_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서 침묵을 찾는다.
_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 침묵의 세계
_ 건축에 시간이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을 덧대어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거주인의 시간과 더불어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_ 1966년 중앙박물관(현재는 민속박물관) 설계 공모시 지침은 “건물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표방함으로써 콤포지션 및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 그리고 “여러 동이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음”이라는 지침 덕분에 모두 불참했고, 열 개의 작품이 응모했으나 일곱은 자격 미달이어서 세 개의 안을 놓고 상을 나누게 된다. 당선작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화엄사의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불국사 기단 등을 파편적으로 이리저리 조합한 치졸의 극치였다. 이 건축은 5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며 여전히 한국 건축의 수치로 남아 있다.
_ 예카테리나 2세의 많은 정부 중 크림반도 총톡 그레고리 포촘킨은 여제가 방문한다고 하자 대형 가리개를 강변에 급히 줄지어 세워 주민을 도열시켜 환호하게 했다. 이후 총독의 이름과 건물의 정면을 뜻하는 ‘파사드façade’를 합친 ‘포촘킨파사드’라는 단어는 전시적 도시 풍경을 설명할 때 쓰는 건축 용어로 남는다.
_ 내가 믿기로는, 건축가는 건축주를 위해 일하지만 동시에 사회와 시민을 위해서도 일해야 바른 직능을 지닌이다.. 왜냐하면, 건축주가 자기 재산으로 개인의 집을 짓는다 해도 길 가는 행인이나 옆집 사람도 그 집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건축은 집주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이익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건축주는 그 건축의 사용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사회가 갖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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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옮겨오면 책 될듯하여 여기까지….
가볍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덕분에 일상에서 놓치고 살았던 건축, 건물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서 안 보이던 건축들의 살아 있는 스토리에 눈뜨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승효상 지음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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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성찰이 철학과 종교이듯, 건물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건축물은 건축주의 것이 아니고 공공재로 만들고 관리해야 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 주인의 삶이 덧대어 그의 손때를 묻고 인문학의 향이 더해질 때 비로소 숨을 쉬며 완성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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