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신영복 선생의 책을 언급하려니 갑작스런 긴장이 위벽을 친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존경심 때문만은 아니다. 책 때문이다.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제목을 단 이 책은 ‘책’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차 오르는 감동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책에 담긴 저자의 지고한 사상,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정갈하고 정확한 문장과 문체, 그에 맞춤한 옷을 입힌 듯 중량감이 느껴지는 표지의 색감, 서체의 ‘크기’와 ‘농담’까지 신경 쓴 세련된 편집까지.
특히 동양고전의 드넓은 숲을 헤쳐나가고 있는 저자의 혜안과 통찰이 외경스럽다. 덕분에 책은 어려운 고전임에도 비교적 쉽게 읽힌다. 그러나 한번 읽은 것으로 이 책을 읽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두고두고 곱씹고 되새기고 음미하고 명심하고 만끽하고, 마침내 성찰적 관점을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동양고전을 모두다 독파하는 건 한평생을 받쳐도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여 눈밝은 저자가 선취·선택해 풀어놓은 문장들을 접하는 건 누구에게나 커다란 행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동양고전의 단순한 요약인 건 아니다. 고전의 바다에 가장 안전하고 빠른 항로를 개척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그 항로를 안다고 해서 무작정 목적도 없이 배를 띄워서는 안 된다. 우선은 서론에 나와있는 저자의 독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의 서론은 비단 서론으로서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별도의 항해일지이며 동양사상의 시대적 의미를 재해석하는 수준 높은 논문이다.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이다. 서구의 근대사상인 존재론存在論과 대비되는 동양고전의 관계론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준거準據를 찾는 일이며, 미래의 대안代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근대’로 표현되는 서구의 사상은 개인의 성취동기가 역사발전의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경쟁과 탐욕과 착취와 소외의 고리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데 반해 동양고전에 담긴 관계론적 사상은 사회통합과 개인간, 집단간, 그리고 개인과 집단간 조화와 균형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그래서 ‘탈근대’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적인 표현 속에 담긴, 그러니까 ‘오래된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지표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고 그것은 곧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서양의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도道는 ‘길’이다. 길은 혼자가 아닌 여러사람이 밟고 지나야만 만들어지며 그 길은 자연 속에 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가치이며 질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이며,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다.
자연은 ‘질서’다. 질서는 시스템이라기보다 ‘장場’이다. 장은 구성하는 모든 것이 조화·통일되어 있다. 모든 것이 조화·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s)’다.
인간은 ‘인간관계’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이며,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양의 인간주의는 유가의 인본주의적 인문세계와 도가의 자연주의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의 논리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양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양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근거는 분명하다. 첫째,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원리로 바꾸어 내고자하는 담론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나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은 철학적 주제로서의 화和(공존과 평화의 논리)와 동同(지배와 억압, 흡수와 합병, 존재론, 강철의 논리)에 관한 논의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것은 20세기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족문제를 세계사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서론에 대한 얘기다. 본문에 나오는, ‘시경·서경·초사·주역·논어·맹자·노자·장자·묵자·순자·한비자·불교·신유학·대학·중용·양명학’의 주옥같은 문장들과 탁월한 해석은 정말이지 감히 언급할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리뷰 아닌 리뷰’를 쓰고 있는 뜻은,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다. ‘오래된 미래’를 통해 현재를 알차게 채우려는 다짐. 이제부터 그 뜻을 음미하며 책을 읽고 또 읽을 일이다.
[인상깊은 구절]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