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을 만나뵐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처음은 인천에서 ‘더불어 숲’ 모임에서 당신이 강연하실 때, 다음 두 번은 학교에서 뵈었다. 이재정 당시 성공회대 총장을 인터뷰하는 자리에 신영복 선생이 동석해주셨고, 다음 번엔 당신 자신이 인터뷰의 대상이 되어서 당신의 연구실에서 뵈었다. 이 때 인터뷰 끝내고 함께 학교 식당에서 국수를 먹었고, 식사 후엔 직접 구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셔서 성공회대 새천년관의 명물인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뵌 것이 부천 ‘더불어 숲’ 모임에서 강연하시는 자리에서였다. 그러니까 이 책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를 출간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강연 끝나고 간단하게 저자 사인회가 있었는데, 난 그날 선생의 강연을 듣고자 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우연히 갔다가 저자 사인이 든 책까지 하나 얻어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 스스로 앞장서 저자의 사인이 든 책을 얻고자 해본 적이 거의 없음에도 기회가 닿아 저자의 사인이 든 책을 얻게 되는 경험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이번엔 줄을 서서 기다리는 묘한 경험을 해보았다.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와 펑크그룹 삐삐밴드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던 경험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세 번째다. 신영복 선생은 처음 뵈올 때나 이후 서너 차례를 뵐 때나 늘 여일(如一)하시다. 다들 잘 알겠지만 한자든 영어든 계집 혹은 계집녀가 들어가서 좋은 뜻을 가진 단어가 거의 없는데, 유독 ‘같을여, 말이을여(如)’ 만큼은 ‘한결같다, 꾸준하다’ 라 해서 비교적 좋은 뜻이 된다. 이 말이 ‘계집녀+입구’인데 한결같다란 뜻을 얻은 건 그만큼 여자들이 지조가 있다는 뜻인가? 지금껏 살아온 나만의 경험에 의하면 최소한 한결같다는 점에선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나은 편이었다. 다시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뵙는 동안 변함없고, 일관된 면모를 관철하는 어른 뵙기가 참 어려운데 당신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인 걸 보며 새삼 연륜이란 켜켜이 쌓인 경험이란 걸 후학에게 느끼게 한다.
결론을 미리 당겨 이야기한다면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는 우리 시대의 필독서라는 표현으론 말할 수 없다. ‘필독서’란 말에는 어쩐지 필요에 의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징검다리 정도의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애독서’, 여행가는 배낭 속에 넣어두고 어딜 가나 펼쳐볼만한 책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30년간 남의 고기를 먹어왔지만 나는 고기 맛을 잘 모른다. 무엇을 먹든 급하게 먹는 버릇 탓에 음식 맛을 잘 아는, 음미하며 맛을 보는 미식가들의 미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책을 펼쳐든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한 번 읽어봐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겠다. 마치 오래 씹을 수록 여러 맛이 나고, 깊은 맛이 배어나는 그런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 자신은 서문에서 “남이 써놓은 책을 말만 바꾸어 내어놓는 데에도 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쪼록 그분들의 연학(硏學)에 진경(進境)이 월등하시길 빌면서 남은 잉크를 말린다.”라며 38년 전에 출간했던 번역서의 역자 후기를 대신 옮겨 놓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때나 지금이나 참 겸손한 분이다.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는 그동안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되어 왔던 강의를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성공회대학교는 한신대학교와 더불어 최근 우리 사학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풍을 지닌 대학으로 알려져 왔다. 지난 권위주의 독재 시절 이에 저항하다 감옥살이한 지식인들이 주로 교수가 된 대학, 교수들의 수형 기간을 전부 합치면 200년 가량 된다는 풍설의 성공회대학교, 일반 대학에서라면 교수에 임용되기 어려울 법한 문제적 지식인들이 모여 교수로 재직하는 대학이 성공회대학교이다. 이 대학의 진보적 학풍의 중심엔 멘토(mentor)로서 신영복 선생이 계신다. 멘토(mentor)란 상대에게 동기(motivate)를 부여하여 그 삶에 좋은 영향을 주는 존재를 말한다. 단순히 동기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훌륭한 정신적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멘토(mentor)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오딧세우스보다 연장자였던 친구 멘토르에서 유래된 말이다. 오딧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되자 친구 멘토르에게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부탁한다. 오딧세우스가 20여년 동안 지중해를 떠돌자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데 아테나 여신은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에게 조언을 해준다. 이후 멘토르는 충실하고 현명한 조언자이자 정신적 스승, 지향할 바를 제시해주는 역할 모델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좋은 책은 제목에서 책 안의 내용이 어떤 것일지 이미 많은 걸을 예시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많은 걸 미리 예시해주고 있다. “나의 동양고전 독법”은 남도 아니고, 권위있는 전문가의 그것도 아닌 나의 동양고전이고, 나의 독법을 의미하며, 그것을 강의하였으며 신영복 선생 자신도 밝히고 있듯 당연히 반론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은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론과 강의를 마치며를 제외하곤 각각 하나의 장에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를 배치해두고 있다. 예전에 신영복 선생은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觀察보다는 愛情이, 애정보다는 實踐이, 실천보다는 立場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형태이다. 사상은 선택이며 역사는 현대사이며 역사이해는 역사가에 대한 이해이다. …<중략>… 사람의 눈은 발에 달려 있다. 그 처지가 그 認識을 결정하는 법이다.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은 관객의 역어” 라고 말한 바 있다.
얼핏 보더라도 ‘입장(立場)’ 이란 말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주목해보아야 할 글귀는 “사람의 눈은 발에 달려 있다”란 말인데, 이 말은 입장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즉,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땅, 자리가 입장이며 객관적이란 말은 내가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지칭한다는 뜻이 된다. 예전에 대선이 한창이던 무렵 홍세화 선생은 민주노동당 당원이란 신분이 기자로서 문제가 되자 “한겨레에도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 란 글을 통해 ‘당파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기자가 지켜야할 객관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팩트 뿐이며 이에 대한 시각과 분석에 차이가 있다. 기자의 정치-사회적 의식과 가치관, 세계관은 그가 당원이든 아니든 기사 작성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자의 당파성에 합리성이나 균형 감각이 담겨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그리고 기자의 당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객관적 검증의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홍세화 선생은 지난 대선 당시 TV토론 자리에서 정치적 입장(당파성)이란 삶의 조건과 계급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영복의 ‘입장’은 홍세화의 ‘당파성’이란 말과 통한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를 비전공자가 비전공자를 위해 고전 강독 강의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사실 지나치게 겸손한 부분이다. 많은 전문가들, 전공자들이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그 자신이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고 고전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강의”는 전체적으로 신영복 선생의 입장과 그에 따른 문제의식이 고전을 선정하고, 그 안에서 예시하고 있는 문안을 통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유석재 기자는 기사를 통해 신영복 선생의 이 책에 대해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랑을 깊이 깔고 있는 그의 글은 준엄한 동시에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다. 그 체온은 자신의 이론과 사상이 세상을 걸어가는 ‘실천’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천’을 밝히려는 부분이 때론 약간의 고집스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논어’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배우고 때때로 익힌다)’에서 ‘습(習)’을 실천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의 ‘사(思)’까지도 실천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당혹스럽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사이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무시하고 새로이 등장한 지식인 계층인 사(士)를 피지배계급으로 설정, 유가(儒家)를 ‘제3의 계급 사상’으로 본 부분은 지나친 도식화라는 이론의 여지를 남긴다”고 쓰고 있다. 당혹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강의”는 단순한 고전 강독이 아니라 이것을 현재의 관점, 신영복 선생의 문제 의식이 녹아든 그만의 독법이자 해석이란 사실 때문에 말이다. 문제는 그런 해석을 독자가 어떻게 납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럴 때 “거두절미, 침소봉대” 식의 문법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신영복 선생은 모 신문처럼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의 주장이란 것이지 절대적인 해석이 아니란 것을 늘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신영복 선생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면 여기에 적절한 자신의 독해를 가미하며 읽을 수 있고, 위에서 지적한 부분들이 당혹스러울 지경에 이르는 대목은 최소한 내가 읽기엔 없었다.
신영복 선생의 글은 애써 꾸민 미문(美文)은 아니나 많은 이들이 즐겨하는 문장으로 소문이 나있다. 반면에 특별히 어려운 문장이 아님에도 어렵다는 소문도 있다. 이 책 전체에서 그런 지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서론 부분과 주역을 다룬 3장이다. 서론은 “강의” 전체를 아우르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인데, 동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신영복 선생의 입장이 훌륭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읽는 족족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만큼 뛰어난 해석에, 머리를 조아리며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주역”편에 들어가면 분명히 쉬운 말로 풀이하고 있는 데도 워낙 “주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어선지 주눅이 들어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앞서 입장을 강조했는데, 다시 한 번 입장을 강조할 만한 부분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모든 고전에 일정한 무게 중심을 싣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책 전체의 분량에서도 그렇고, 당신이 힘주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살피면 특히 “논어”와 “묵자”편인 것을 알 수 있다. “논어”야 워낙 고전의 지위란 측면에서도 그렇고, 당신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두 권의 책(자본론과 논어)이라고 밝히고 있는 탓이지만, “묵자”는 다소 뜻밖이자 신영복 선생다운 선택으로 당연해 보인다. 중국의 제자백가 가운데 유가의 카운터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은 누가 뭐래도 노자의 도가 사상이다. 흔히 서양문명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융합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때 헤브라이즘이 종교(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을 의미한다면, 헬레니즘은 과학을 의미한다. 서양 문명은 이 양자의 조화와 균형, 견제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에 비해 동양 사상은 인본주의적인 사상인 유가와 자연주의적 사상인 도가의 대립과 견제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가의 인본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반면에 도가는 이런 인본주의의 독선과 허구성을 비판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강의”는 유가와 도가란 주류 사상을 중심으로 고전을 다루고 있지만, 소위 비주류 사상인 “묵자, 순자, 한비자”도 함께 다룬다. 순자는 맹자와 더불어 유가의 학설이란 점에서 주류에 속하고, 한비자 역시 법가 사상을 대표해 천하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을 수 있으나 묵가는 제자백가 2000년의 중국 사상사 속에서도 비주류 가운데 비주류였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를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에 비해 배 가까운 분량으로 다룬다. 여기에 신영복 선생의 입장이 녹아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단 24자로 기록된 묵자이지만 오늘날 묵자, 묵가의 사상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묵가의 사상적 복권은 실로 2000년만의 일인 것이다. 묵가의 사상이 이제야 빛을 볼 수 있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묵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유가에 의해 “사문의 난적”으로 지탄받아 왔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묵자의 사상이 오늘날의 좌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묵자는 묻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에 의해 “묵가의 하느님 사상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되어 부정적 평가를 받았고,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이 묵자와 묵가 사상에 대해 호의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맹자”와 “장자”를 빌어 와 “실천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며 묵가를 비판하는데, 이는 과거를 빌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 내지 과거 좌파적 실천의 각박함을 함께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영복 선생은 고전을 역사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이를 과거의 고리타분한 텍스트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함께 모색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강구해야 할 오늘의 살아 숨쉬는 텍스트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몇몇 부분에서 신영복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중략>…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중략>… 제가 감옥에서 만난 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본문 82쪽>
“진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의 과정이며 한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수성의 시기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155쪽>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41쪽>
이상과 같은 부분들은 역사 해석이란 측면에서 시제의 관점, 현실적 조건에 따른 대응, 시대의 상황에 따른 평가 등이란 측면에서 유연한 해석을 가능케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객관은 관객의 역어란 애초의 신영복 선생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주관주의로 흐를 여지를 남겨둔다.
“내가 향원(鄕愿)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향원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감옥을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92 - 193쪽>
이 말은 “논어” 자로 편에 나오는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다.”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본문 190쪽>
이 때 문제가 되는 두 가지는 좋고 나쁨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세울 것이며, 이것이 주관적이지 않음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것이란 점이다. 과연 다수의 민중은 항상 선량한가? 이는 신영복 선생이 자신이 “강의”를 통해 힘주어 주장하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란 말이 지닌 힘이자 동시에 한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수가 결코 선량하지 않았던 시대를 알고, 그런 한 시대를 살았다. 다수란 한정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두식(한동대 법대)교수는 “헌법의 풍경”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국가의 범죄는 절대 권력을 지닌 소수의 독재자들이 야욕과 그들에게 복종하는 다수 봉사자들의 협력에 의해 현실화됩니다. 몇 명의 정신 나간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런 거대한 범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독재권력의 전횡에 참여하거나 방관할 때에만 비로소 국가라고 하는 괴물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헌법의 풍경, 본문 99쪽>
물론 신영복 선생이 주려고 하는 교훈마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의 저 선량한 낙관에 나는 쉽사리 동의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극우든, 극좌든 소수의 독재자들의 야욕에 복종하는 다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독재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재 권력의 고문실에 끌려간 양심수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고문실 바깥에서 들려오던 라디오의 한가로운 시정잡담이었다고 하질 않던가. 내가 신영복 선생의 저 선량한 낙관에 동의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해 인(人)을 기반으로 하던, 민(民)을 기반으로 하든, 과거의 고전으로부터 시작하든, 현재로부터 시작하든 모든 것을 회의하고,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