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 김호경외/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2.13 | 목록
발행일 2010년 11월 22일 | 면수 576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25,000원

부제 :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서

저자 김호경,권기석,우성규 기자는 국민일보 기자 신분으로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한 2010년에 [잊혀진 만행, 일본 전범기업을 추적한다] 기획 시리즈 보도를 3월 1일부터 매주 1회씩 18회에 걸쳐서 보도했던 사람들이다. 부제 그대로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가서 조사를 한 내용을 기사로 먼저 만들어 내고 2010년 11월 22일 초판 1쇄를 발행한 그런 책이다.

일제시대 강제동원 분야 중 징병과 군 위안부 부분은 이 책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징용 부분에 집중했다. 일제 치하에서 징용과 군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인지가 뚜렷하고 기록도 상대적으로 다수인 반면 피해자 규모 면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징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반적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이 부분을 조명하고자 했다.

현존하는 일본 대기업들이 노무동원의 주범이며 역사적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이 명백한 범죄를 끝없이 은폐하고 묵살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책의 소명은 다 충족된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피해 의식 차원이 아니라,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한 작은 안전장치로서의 이 책이 독자들의 역사의식에 보탬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피해자가 기억하고 가해자도 기억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고 미래도 열린다. 어설픈 초월이나 망각은 역사의 교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프리모 레비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에서 던진 명제를 상기 시킨다.

"과거에 이런 일이 벌여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당시의 기업들은 군과 국가 못지않게 민간 부분에서 어떤 형태를 보였고 취했는지, 전후에 취한 태도에 대해서 바라본다는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었고 한국사회에서 공론화되지 않은 점들을 더 늦기 전에 일본 전범기업들이 주도한 강제동원의 실상과 이후 전개 과정을 분명한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판단. 기사 발굴을 위한 호기심으로 뛰어들었다가 이 호기심이 일종의 사명감으로 변하여 온몸으로 뛰어들어 곳곳의 여러 사람들과 자료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남기게 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생존자들에 대한 다양한 인터뷰와 현장 취재 등을 매주 종합면 두 개면 이상씩을 할애해서 총 18회 시리즈물을 이어간 대 장정의 기사에 내용을 두 배 이상 보태어 보완하여 책으로 펴냈다고 한다.

글을 쓴 기자들은 국제앰네스티언론상, 노근리 평화상, 삼성언론상, 한국신문상 등등을 수상했다.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런 상들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고 넓게 취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책이 만들어졌다.

책은 4개로 부를 나눈다… 첫 번째는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2부는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3부는 강제동원 더 깊이 들여다보기, 4부는 투쟁과 좌절, 그리고 희망의 역사이다.

책의 주요 내용을 보자면

1939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여 동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600 ~ 70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000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전 민족적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 명이니 숫자상으로 강제 동원된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무 징용자들이다. 조선 전체 인구의 32.3%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며 조선민족을 노예화시켜 말살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기업은 조선인 노무동원의 주범이었다. 정부와 군부만이 노동력 수탈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조선 노동력 활용의 필요성을 적극 제기하고 강제동원 일선에 집요하게 나선 게 일본 기업들이었다.

2006년 8월 일제 피해자 및 시민사회단체 연대모임인 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가 ‘일본의 강제동원 전범기업 및 한국의 청구권자금 수혜기업 등 한일협정 책임 1차 10개 기업’ 기자회견을 열면서 전범기업 10개 명단을 발표한 바 있다. 그 명단은 미쓰비스중공업,신일본제철,후지코시,쇼와전공,일본강관주식회사,동경마사,미쓰이,다이헤이 머티어리얼,스미토모금속공업,오카모토 등이다. 이중 미쓰비시(3,355명), 미쓰이(1,479명),스미토모(1,074명)가 일제 시기 조선인을 개별 사업장에 가장 많이 동원해 강제노역에 투입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대기업으로 도약한 이들 기업은 살인적인 노역과 폭행을 행사했으며 그 강제 노역의 대가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돌아왔다. 전후 기업들은 이들의 임금을 정산 하키는커녕 은폐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군수산업과 강제징용의 대명사인 미쓰비시는 가혹한 착취에 원폭 재앙까지 조선소 징용자들에게 안겨준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사 왜곡으로 유명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에 막대한 후원금을 주는 등 과거사 문제에 아무런 반성이 없는 대표적 우파기업으로 꼽히는 이런 악질기업에… 조선인 강제 동원과 관련하여 1998년 강제노역 확인요청을 한 때로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2009년 9월에야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사회보험청이 이들의 미쓰비시중공업 근무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후생노동성은 후생연금 중도 탈퇴에 따른 수당을 1940년대 당시의 화폐 액수 그대로 계산해 피해자들에 99엔을 지급했지만, 미쓰비시는 단돈 1엔도 내놓은 적이 없다.

한국에 대한 이 같은 심각한 원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3호’의 발사 사업자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선정하여 논란을 빚은 바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008년 10월 아리랑 3호 발사 용역의 우선협상 대상업체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최종 선정했다. 2009년 1월 이명박 대통령과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아리랑 3호 발사체 용역업체로 미쓰비시중공업이 선정된 것을 환영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위성을 탑재한 로켓 발사는 일본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요시노부 발사장을 이용할 예정이다. 우리 정부가 아리랑 3호 발사에 일본 로켓을 쓰기로 함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은 해외 상용 로켓시장에 최초로 진입하게 됐으며, 추가 해외시장 개척에도 발판을 놓게 됐다.

근로정신대 주된 전범기업인 후지코시는 우리나라 삼성전자와 이 기업의 관계가 재미있다. 두 회사는 2003년 공동으로 산업용 로봇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은 11월 이 사실을 발표했으나 곧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김경석 씨가 주도한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가 이듬해 1월 삼성전자를 항의 방문해 후지코시와 협력 체제를 중단하지 않으면 삼성전자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김경석 씨는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소송의 선구자 격 인물) 취재팀은 도야마에 다녀온 뒤 삼성전자 홍보실에 전화를 걸어 협력이 중단됐는지 질문했다. "그 뒤 기술 제휴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라는 답변을 들었다.

다른 많은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들도 위안부라는 오인을 받으며 살았다.

일왕은 사이판을 방문하였을 때 자국의 사망자들이 발생한 현장을 향해 묵념했다. 그곳에 동원되었다 사망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만세절벽에서 돌아가는 길에 위치한 한국인 추념탑 앞 도로에 잠깐 멈춰 서서 머리를 숙인 게 전부였다. 일본 기업의 살인적 강제 노역에 일본군의 자살 돌격 강요에, 미군의 포격에, 항문이 찢어지는 굶주림에 스러져간 조선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2010년 즈음해 일왕의 방한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 스스로 과거사에 대한 매듭을 지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남양군도의 각지와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 흩뿌려진 조선인 유골 앞에 일본의 진솔한 사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징용 2년이 지나 가족과 부인들을 작업장으로 데려와 기혼자 숙소에서 생활하도록 배려(?)한 것은 숙련 노동자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한 회유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북해도에서 겨우 가족과 함께 지낸 상황에서 전황이 불리해져 본토 작업장에서 노동력이 필요하자 이들은 또 갑자기 본토로 끌려가는 바람에 사할린에는 그 가족 3,500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은 부인과 어린 자식은 말도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가정해체, 생활고, 민족적 차별,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의 가족은 가족대로 남편, 아버지가 해방이 됐는데 소련 땅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황에서 숨죽이며 버텨야 했다. 강제동원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중첩적인 비극 속에서 신음한 세월이 어언 65년이다. 소련 또한 전후 재건을 목적으로 노동력이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유독 강제로 징용됐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왜 그랬을까. 첫 번째 이유는 이들이 징용 이전에도 극빈했었기 때문, 해외로 끌려간 징용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마을에서 힘 있는 집안이나 경제력이 괜찮은 집에서는 아무래도 끌려가는 사람이 적었다.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현지에서도 고생을 덜했다. 둘째는 장애이다. 노무 작업장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노동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돌아왔으므로 당장 일이 힘들었다. 또한 생존자들은 대부분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에 연행되어 생산과 학업의 기틀을 잡고 인생계획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시점을 놓쳐서 개인적 손실이 막대하여 가난이 대물림됐다.

역사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잊을 것인가도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 그 뒤에 백제와 가야를 잊었듯이… 하지만 그 잊음과 망각은 진실과 화해를 통했을 때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통일이 요원한데 향후에도 마찬가지겠지… 한국전쟁을 가지고 남북으로 다툰 것이 벌써 50년이 지나가고 있다. 일본과 한국, 남한과 북한, 중국과 한국 등등 풀어야 할 숙제는 산적하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그 첫걸음은 이 책에서는 [진상규명과 진솔한 사죄]로 귀결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강제 동원에 대한 진실들이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래고 사장되는 것을 막아 진상 규명하고자 그 현장을 찾아 전범기업의 행태를 찾아내고 아직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을 만나 취재하고 조사한 자료의 집합체이다.

밉기만 한 일본… 하지만 지척의 일본… 진실로 화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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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 김호경외/돌베개] 국민일보 기자 신분으로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역사 현장을 조사하여 강제동원 분야 중 징용 부분에 대하여 연구하여 독자들의 역사인식에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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