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천지제사 – 김문식 외 5명 지음 / 돌베개 / 왕실문화총서 02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11.30 | 목록
발행일 2011년 10월 31일 | 면수 358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28,000원

왕실의 천지제사

– 김문식, 김지영, 박례경, 송지원, 심승구, 이은주 지음 / 돌베개 / 왕실문화총서 02

2011년 6월 돌베개 출판사에서 왕실문화와 관련된 총서 시리즈 총 9권을 만들겠다고 기획 하면서 나온 첫 번째 책이 바로 『왕과 국가의 회화 –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음 / 돌베개』 였었다. 이후로 마지막 책을 오늘 다 읽었으니 시리즈 독파하는데 4년 5개월 걸린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읽은 책 되겠다.

물론 출판 순서에 맞춰서 읽은 것은 아니고 왕실문화 총서 중 나름대로는 순서를 내가 생각하는 순서대로 읽어서 하늘과 왕이 하나되는 천지 제사 편을 마지막으로 선택해서 읽었다.

5년에 가까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 사이에 도서 출판계에 큰 변화도 있었고…(책통법 덕분에 도서관련 행사가 모두 사라졌다… 부디 소형 서점의 눈부신 생존을 넘어 성장을 바란다 – 책값을 조금 더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지역사회의 서점의 상생을 바라는 바이다. 참으로 진심이다.)

그때는 책값이 제법 비싸서 한 번에 다 구입하지 못하고 여유가 있을 때 한 권, 두 권씩 사 모았다. 물론 당시에는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이라 조금 손상된 새책이나 다름없는 리퍼브 도서를 운 좋게 만나면 50% 할인 가격에 살 수 있는 경우도 많아서 9권 중 4~5권은 아마도 파주출판단지 책 잔치하는 날 아마도 50% 전후에 구입한 책들이다.

어떤 해에는 행사장에서 미친 듯이 쓸어 담다가 2~30권을 들고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는….ㅠ.ㅠ

아무튼 그러한 기타 등등의 할인이 없었으면… 책값만 247,000원(81+91+75천원)이나 들었을 그런 방대한 분량의 시리즈를 완성했다는 것이 포인트 ㅎㅎ

요즘은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어 10% 할인이 가능하니 22만 2천 원이나 현찰을 쏟아부어야 하고 무려 3,262페이지(1,100p+1,222p+940P)의 대장정이기도 하다. 덕분에 전권 9권의 책을 찬찬히 두루 읽어 보는데 4년 5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책은 시리즈가 완간 되는 시점을 전후로 모두 구입해둔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금 늦어진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책을 보는 순서가 있기에….

책을 보는 순서는 회사에서 숙제로 반드시 봐야 하는 책 / 선물 받은 책 / 신간 / 할인율순(50% ~ 10% 순) / 구간 순이다.

먹고살아야 하니 회사에서 주는 책은 반드시 기일 내에 읽어야 하니 먼저 보고 그다음은 어떤 책을 들고 있더라도 선물 받은 책을 먼저 본다.

서평단 뭐 이런 거 난 전혀 안 한다. 내가 볼 책은 내 돈 주고 사본다. 그래야 출판계에 발전이 있지, 물론 인터넷 서점으로 최대한 할인받고, 포인트는 칼같이 챙겼다. 이점은 중소형 출판사에 많이 미안하기도 한 부분이다… 반성한다.

진짜 친분이 있고 책을 보는 성향을 잘 알고 친한 지인들 사이에서는 종종 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선물 받은 책은 선물 한 사람의 정성도 책 속에 따뜻하게 녹아있기 때문에 그 온기가 식기 전에 읽는 것이 예의이기에….

그다음은 신간이다. 과거 신간은 할인율이 낮어서 미뤘다가 구간이 되는 순간 할인율의 차이만큼 내가 책값을 더 지불한 것이 되기에 자칫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현찰이 바로 사라지기 때문… ㅠ.ㅠ

그래서 때론 늦게 인연이 되는 책도 있고, 때론 바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 불변의 진리는 무겁고 단단한 책은 언제 읽어도 가치는 변함이 없다는 것. 일부 가벼운 책들은 읽고 나서 다시 볼 일이 있어 6개월에서 1년만 지나고 다시 보면(물론 개정증보판은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영 아닌 책들도 많다….

아무튼 그렇게 이 시리즈는 4년 6개월간을 함께했다.(앞에 맨 처음 읽은 책은 다 까먹은 듯…ㅠ.ㅠ)

왕실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에 대해서 기본적인 세트로 만들어진 커리큘럼을 한 바퀴 제대로 돌아본 기분이라 몸도 마음도 개운하다~

사설이 너무 길었나…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볼까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시절에는 천재지변을 비롯한 많은 현상들을 종교로 설명하고, 신에게 의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으로 해석이 안되니 사람의 영역을 뛰어넘는 그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쪽으로 돌려버려야 모든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열쇠였으니…… 덕분에 천둥과 벼락, 태풍과 해일 그리고 지진과 화산 폭발 등의 자연재해는 신이 노하여 인간들을 벌하는 행위로 치부해야 통치권자는 면책특권을 부여받아 신이 노해서 그러니 신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대리행위를 하는 위치에 서니….

덕분에 당시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과학의 수준으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많던 시절은 자연스럽게 정교일치(政敎一致) 즉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신권과 왕권은 하나였다.

왕이 된다는 것은 하늘이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하늘이 권력의 행사를 허락하는 것 즉, 윤허함을 세상에 천명하는 것으로서, 제주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명령을 수행하는 집행자의 위치에 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러 의궤를 비롯한 다양한 사료에 자주 나타나는 왕권을 상징하는 교룡기(交龍旗)의 주인은 용 두 마리가 한 마리는 하늘로, 한 마리는 땅을 향하고 있다. 이는 땅의 의지를 하늘로 올려 보내고 하늘에서 천제의 뜻을 받아 땅으로 내려보내는 일종의 하늘과 땅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행하는 행위자의 위치에 있다는 증표다.

이렇게 하늘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면 왕은 선대에 대한 제사를 비롯한 다양한 제례 행사를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늘에 올리는 천지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책으로서 1부에서는 천신을 위한 제례인 환구제를, 2부에서는 국토와 오곡의 신을 위한 제례인 사직제, 3부에서는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인 선농제와 선잠제에 대해서 알아본다.

깨알같이 꼼꼼하게 사료와 자료를 많이 가져다 박아서 일반인을 위한 책인지 전문가를 위한 논문인지 구별이 잘 안될 정도로 많이 가져왔다… 아마도 큰 세 가지 카테고리에서 책을 완성하려다 보니 상대적으로 내용이 많이 깊어지면서 넓이도 넓어진듯하다.

환구제, 사직제, 선농제와 선잠제에 대한 완성본이라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많은 자료들을 헤치고 나가려다 보니 좀 딱딱해진 면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왕실의 천지제사와 관련한 필적할만한 상대가 없어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과 함께하는 시리즈인 덕분에 분야별로 책임연구자와 4~7명의 연구자들이 함께 자기 분야를 연구해서 합본으로 만들어낸 책이기에…

물론 권위 있는 기관에서 공동으로 연구하고 책으로 펴냈다고 다 좋은 책은 아니겠지만, 국내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곳이 이곳이니…. 그만큼 내용들도 단단하다. 달리 한국학중앙연구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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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제사는 오례 가운데 길례에 해당. 행사를 치르는 예법은 오례五禮라 정해진 규범과 제도에 따라 국가적인 규모로 치러졌다. 전통사회의 규범체계였던 의례儀禮 대사大祀·중사·소사로 구분되는 국가 규모의 제사로서 나라의 여러 신을 섬기는 길례吉禮, 국장國葬을 포함하는 상례로서 나라의 근심을 애도하는 흉례凶禮, 군사 의식에 관한 모든 예절을 통하여 나라를 균평하게 하는 군례軍禮, 국빈을 맞이하고 보내며 나라를 친목하게 하는 예절을 뜻하는 빈례賓禮, 만민을 친목하게 하는 왕의 혼례나 즉위, 왕세자ㆍ왕세손의 혼례나 책봉 의식과 관련된 예법인 가례嘉禮 등 다섯 가지를 말한다.

– 다섯 가지 국가의 중요한 예제 중 길례에 해당하는 의례 中,, 하늘신을 위한 제례인 환구제, 국토와 오곡의 신을 위한 제례인 사직제,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인 선농제·선잠 제의 네 가지 의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하늘과 땅에 지냈던 제사의례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제사는 그 가운데 길례에 속하며 오례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의례로 중시되어왔다.

–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에서는 “천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하고, 대부는 오사五祀에 제사한다"라고”고 하여,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가 제왕의 고유한 권리이자 의무임을 강조.

– 환구단에서 지내는 제천례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1385년(우왕 11)에 폐지. 고려를 방문한 명나라 사신 주탁이 제후국인 고려에서 제쳔례를 거행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했기 때문. 이후 세조 대까지 거행하다 중단. 세조 대 이후 환구제가 중단된 이유는 천자만 지낼 수 있는 환구제를 국왕은 지낼 수 없다는 명분에 의해서. 광해군 대에는 여러 명분으로 환구단 제쳔례를 거해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함. 이후 고종이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건설하면서 부활함. 동시에 중국 황제와 명나라 장수들의 사당에서 올리는 제례를 모두 폐지 함.

– 1897년 10월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건설하고 황제라는 칭함. 새로 건설된 황제국의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했는데, 이는 삼한三韓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대한이란 국호가 처음 사용된 문서는 환구단 고유제의 제문과 황제국의 탄생을 선언하는 조서였다.

– 일제가 환구제를 폐지한 까닭은 일왕만이 하늘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논리 아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독립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근원을 사전에 제거해 버린다는 의도 때문. 1911년에 환구단 건물과 부지는 조선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갔으며, 그 후 환구단과 환구단 부지는 파괴와 해체의 수난을 겪게 된다. 1911년에는 일본 거류민단이 환구단을 개방하여 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청원했고, 1913년 환구단이 있던 자리에는 철도호텔이 세워졌다. 1913년 이후 황궁우만이 현재의 자리에 남아 있게 되고, 석고와 광선문 등이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부지 내의 환구단 터에는,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은 사라지고, 신주를 모시던 황궁우·돌로 만든 석고·환구단에서 황궁우로 가는 삼문만이 남아 있다.

– 2008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주관으로 폐지된 지 100여 년 만에 환구제가 재현되었다. 환구단이 사라져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 환구단에서 지내던 제례는 남아 있는 황궁우 내부와, 그 앞의 잔디밭에서 거행

– 환구제는 제사 7일 이전부터 시작, 왕은 7일 동안 재계한다. 그 중 4일은 별전에서 산재하고 이때 조상이나 문병을 하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다. 나머지 3일 동안은 치재하는데, 이때에는 제사에 관한 일만 전념. 제사 지낼 때 전상에 오를 사람도 4일간 산재하고 3일간 치재한다.

– 공식 보장이라 할 상의에 그린 무늬와 치마에 수놓은 무늬의 종류에 따라 황제의 십이장복과 국왕의 구장복, 왕세자의 칠장복으로 구별

– 사직제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주례』周禮에서는 ‘좌조우사’左祖右社라 하여 나라를 세우면 도성의 궁궐 밖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세워 건국의 신위를 모신다고 했다.

– 고대 사회에서 사직의 존재는 국가의 운명과 동일시. 천자와 제후는 망한 나라의 사직을 보존하여 나라가 존속하고 망하는 도리가 있음을 보임으로써 스스로 경계를 삼았다고 한다. 즉 주는 자신이 멸망시킨 은의 사직을 보존하였는데 천자의 태사는 서리와 이슬과 비바람을 맞도록 하여 하늘과 땅의 기에 통하게 한 반면, 망한 나라의 사에는 지붕을 씌워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하고 북쪽에 창을 두어 음기만 통하게 했다. 이는 위정자의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토지 신고 곡식 신에 대한 공경심은 보존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오행 사상에 맞추어 동, 서, 남, 북, 중앙에 오방에 오색을 배당한 오색토에 관한 설이 등장, 그 제단의 방향에 맞는 흙을 깔아둠, 이후에 제후로 분봉되는 자가 자신이 분봉 받는 지역에 따라 천자로부터 해당 색깔의 흙을 하사받아서 사직단을 조영한다는 설로 발전하게 된다.

– 전통사회에서는 선공후사라 하여 공을 사보다 중시, 사직을 더 높게 생각한 것, 왕실에 장례식이 있으면 국가의 모든 제례를 중지하지만 사직제는 중지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

– 『세종실록』, 「오례」의 대사 부분을 보면 사직이 종묘보다 앞에 나오며, 국조오례의의 대사에서도 사직, 종묘, 영녕전의 순으로 나타나다. 이는 종묘보다 사직이 더 중요시되었음을 의미.

– 왕이 적전을 세 번 경작하듯이 세 번 실을 뽑고 나머지를 부인과 세부들에게 나누어준다. 뽑은 실은 여러 색깔로 염색을 하여 문양을 넣은 옷감을 짜서 왕이 제사를 지낼 때 입을 제복을 지어 바친다.

– 천자는 남쪽 교외에서 몸소 적전을 경작하여 제사에 쓸 곡식을 바치고, 왕후는 북쪽 교외에서 양잠을 하여 천자의 제복인 치복을 만들어 바친다. 제후는 동쪽 교외에서 적전을 경작하여 역시 제사에 쓸 곡식을 바치고, 부인은 북쪽 교외에서 양잠을 하여 제후의 제복인 면복을 만들어 바친다. – 『예기』

– 황제는 세 번 밭을 갈고, 삼공이 다섯 번, 구경이 아홉 번 밭을 갈고 나머지 관리들이 서인들을 거닐고 마무리. 친경에 가장 많이 참여한 왕은 영조, 친경 시 다섯 번 쟁기를 밀고, 종실과 재상은 칠퇴 七 堆,, 판서와 대간은 구퇴로 정함. 친경 행사에 참여한 사람과 도구는 모두 푸른색. 이유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처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의식이므로 오행의 원리에 따라 봄을 상징하는 청색을 사용. 소는 청색 옷을 입혀 사용하다 이후에 흑우로 변경함. 친경에 동원된 소는 방목하고 외양간에서 편히 지내다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

– 친잠의식의 주인공은 중궁전 이하 왕실의 여인들이었지만 왕과 세손 역시 이를 지켜보고 친잠 행사 후의 부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경복궁으로 행차하였기에 대단히 성대한 행사. 역시 왕비가 갈고리로 다섯 개의 가지의 뽕잎을 따 광주리에 담고, 혜빈과 왕세손빈은 각각 일곱 가지를, 내외명부는 각각 아홉 가지의 뽕잎을 딴다. 이후 양잠을 계속하여 비단을 짜서 바침.

– 조선시대에 친경을 처음 행한 왕은 성종, 이후 몇 차례 더 행하다가 폐지, 1739년(영조 15)에 다시 의례가 복원. 친잠 또한 성종 대에 처음 거행되었고, 1743년(영조 19)에는 영조가 경복궁 강녕전의 옛 터에 제단과 채상단을 축조하여 의례를 거행.

– 조선시대에는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사’祀라 하고 땅에 지내는 제사를 ‘제’祭라 하여 제사의 대상에 따른 명칭을 달리함.

– 친경의에 동원된 악사는 3인, 악공은 전체 100인이 동원 등가악공이 32인, 헌가 악공이 68인. 모두 관복을 입고 참여

– 1909년(순종 2) 4월 5일 융희황제는 선농제를 생략한 채, 동직전에서 친경만을 시행하였다. 선농을 제향하고 친경하던 의식에서 이제 친경만이 남게 된 것이다. 더구나 행사가 끝난 후에는 황제가 뽕나무, 솔나무, 전나무 등의 나무를 심고, 각 대신과 황족들도 따라 심었다. 친경례가 이제 농업과 함께 임업을 권장하는 행사로 변화하였고, 이는 해방 후 식목일을 제정하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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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또 어쩌나… 중요한 내용 몇 줄만 옮겨 온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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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천지제사–김문식외 5명 지음/돌베개] 오례 중 길례로서 핵심 의례인 왕실에서 하늘을 향해 올리던 윤리적, 정치적 행사를 겸했던 환구제, 사직제, 선농제 등의 유래와 이행 과정 그리고 어떻게 변하여 지금에 이르는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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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9권의 책을 5년 가까이 걸려 독파했다… 오늘 저녁 책 쌓아놓고 막걸리 한 통 비우면서 책거리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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