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나X조문영 작가 크로스리뷰 –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연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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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글항아리 출판사와 진행한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x『연루됨』 크로스 리뷰로 작성되었습니다.

 

강지나X조문영 작가 크로스리뷰

 

한국 사회의 빈곤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두 저자분들이 서로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세상을 읽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밝혀주는 두 작가님의 연대에 많은 지지와 공감 부탁드립니다.

1. 조문영 작가가 읽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이 땅에서 고군분투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과 그 시기를 거쳐 청년이 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제 눈은 작가님의 감사 인사에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한테 되물었지요. 나는 왜 오랫동안 빈곤이란 화두를 붙들었음에도 십 대의 가난을 별반 주목하지 않았을까? 고등학교가 직장인 작가님은 청소년을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가 저보다 더 많았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아 보입니다. 한국과 중국의 여러 현장에서 저도 그들을 계속 마주쳤으니까요. 여덟 명 아이들의 성장을 좇는 작가님을 뒤따르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성인’, 그리고 성인 ‘가족’을 연구의 대화자로 쉽게 가정했다는 사실을. 서울 난곡 달동네에서, 하얼빈의 공장 단지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하면서 동네 아이들의 학습을 도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는 주로 그들의 부모와 진행했습니다. 가난한 부모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의 형상은 가족이라는 포대기에 둘둘 말린 채 안쓰러운 딸, 무심한 아들 정도로 빈약해졌지요.

하지만 작가님의 책에서 소희, 영성, 지현, 연우, 수정, 현석, 우빈, 혜주는 당당히 제 이름(가명)으로, 자기自己라는 세계를 전면에 등장시킵니다. 더욱이 이 세계는 연구자의 노고 덕택에 1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사당동 더하기 25』 같은 드문 선례가 있긴 하지만, 가난한 삶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은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사이의 단단한 신뢰가 없다면 난망합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읽으며 여덟 아이들을 따라가는 한편, 이들과 진중한 대화를 주고받는 작가님의 그림자를 좇았습니다. 아이들이 믿고 의지할 선생님이었을 당신을. “안쓰럽다”는 탄식, “경이롭다”는 찬사를 당신과 함께 내뱉으면서 말이죠. ‘빈곤 대물림’ ‘계급 재생산’ 같은 우리 사회의 불온한 암묵지를 걷어내기라도 할 듯,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는 정말 놀랍더군요. “나는 10여 년 전 현석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지금의 건실한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절도, 갈취, 뺑소니 등 숱한 비행을 반복하다 소년원과 교도소를 드나들던 현석이 “과거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성실하고 건실한 청년이” 되었단 걸 쉽게 믿을 수 있을까요? 타인의 시선을 피해 숨거나 거리를 헤매던 혜주가 제집을 꾸미고 손님을 환대하는 데서 기쁨을 얻으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요? 작가님이 10대의 가난에 사회적 관심을 호소하는 것도, 이들이 삶에서 스스로 길어낸 통찰과 지혜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변화의 가능성을 목격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변화의 여정이 동화로 남은 것은 아닙니다. 비난의 화살을 개인에게 돌리는 ‘빈곤문화론’을 비판하면서도, 작가님은 체념, 포기, 무력감 등 가난을 영속시키는 행동들이 일종의 습속으로 대물림되는 현상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독립적인 연구참여자로 제 세계를 서사화하는 순간에도 가족이라는 끈적이에 붙들려 있습니다. 소희는 돌봄 부재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폭음을 일삼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평생 가난과 학대에 시달려 자신만큼 불안하고 우울한 어머니를 외려 안쓰러워하죠. 영성은 죽도록 알바해 번 돈을 아버지한테 뜯기고도, 연우는 다투기만 하는 부모에 질려 종일 집 밖을 서성거렸으면서도 결국엔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데 강박적으로 매달립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청년이 된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살고 일하더군요. 누군가는 그 노력에 탄복하며 이들의 이야기를 빈곤 극복의 서사로 갈음했겠으나, 작가님은 오히려 빈곤의 무게를 절감합니다. “과연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몸을 다칠 정도로 일하는 20대에게 우리는 잘하고 있으니 계속하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영성은 인터뷰 내내 여행도, 다른 해보고 싶은 일도, 친구들과의 놀이문화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까지 생각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빈곤을 역량의 박탈로 정의하는 아마티아 센에 작가님이 공감하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결핍과 폭력, 편견과 무관심이 겹치고 쌓이면서 아이들의 역량이 소진되고, 세계가 좁아지고, 꿈이 앙상해지는 과정을 교육자로서 대면하기 힘드셨을 테죠. 그런데 이 책에서 특히 놀라운 부분은 작가님이 역량의 박탈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자로서 아이들의 역량을 새롭게 발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매사에 주눅이 들어 있던 연우는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제 적성을 우연히 발견하고 상당히 구체적인 진로를 설계합니다. 남들이 볼 때 무기력하기만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당신은 ‘사색하는 시간’으로 재해석했죠.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봤기에, 그 이후에도 자신만의 길을 걸으리라 믿으면서.

무엇보다 도움을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지현의 태도를 ‘성찰하는 힘’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지현과 그의 어머니는 주민센터, 학교,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각종 사회단체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생계를 도모합니다. 삶의 당연한 형태인 의존이 자립의 대립물로, 수치로 평가절하되는 사회에서 모녀의 당당함은 불온해 보일 테죠. 하지만 지현이 장학금을 타러 구구절절 글을 쓰다 보니 글쓰기도 늘고 A 학점도 받더라며 웃을 때, 작가님은 ‘나’라는 개인의 존재와 가난한 상황을 분리하는 지현의 역량을 간파하더군요. 나아가 우리 대부분이 지현과 달리 외면에 집착하면서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적 성숙도”에 소홀하다는 점을 통렬히 지적하셨죠. 지현에게도 당신의 생각을 들려주셨나요? 인류학 현장연구에서는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사이의 위계적 관계가 곧잘 쟁론의 대상이 되는데, 작가님과 지현의 만남은 서로의 세계를 배우는 과정이지 않았을까요? 인터뷰가 글이 되고 책인 된 덕분에 우리도 함께 배울 수 있었지요.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돈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친척, 친구 등 의존의 네트워크가 부실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정부의 기초생활보장에서 지역아동센터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제도와 기관이 이들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는 여전히 궁금함이 남습니다. 부실한 네트워크를 보완하기도, 외려 축소하기도, 반대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 여러 사례를 봅니다. 정부의 청년 정책은 가난한 아이들이 졸업 후 괜찮은 직업을 갖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추가로 들여야 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된 수정은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잃을까 봐 그 흔한 휴학 한 번 못하고, 현장실습생이 된 우진은 기술 교육 대신 허드렛일만 강요당하는 와중에도 학교 요청으로 ‘일하는’ 인증숏을 찍습니다. 복지관은 “죽을 용기도 없던” 소희가 일어날 수 있게 돕고, 지역아동센터는 형식의 유일한 안식처로 남았지만, 이들이 생애 마디마다 경험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떠올리자면 한국 사회의 복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는 질문거리로 남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구구절절 담다 보니 편지가 장황해졌습니다. 청(소)년 빈곤에 관해 작가님과 앞으로 더 많은 얘기를 나누길 기대합니다. 『빈곤 과정』과 『연루됨』에서 논한 대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청년 빈곤’이란 갈수록 벌어지는 이 세대 내부의 격차뿐 아니라, 극심한 경쟁을 뚫고도 전망 부재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청년 세대 일반의 물질적·실존적 빈곤을 전면화합니다. 물질적 결핍이란 조건과 가난함에 대한 인식·감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아서 제 주변에서는 (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교육·문화 자본을 갖춘 대학생-청년이 저 자신을 ‘빈자’에 감정 이입하는 경우를 곧잘 목격합니다. 오히려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왕따, 배고픔, 돌봄 부재의 환경을 가까스로 견디며 성장한 우빈은 ‘금수저’ ‘흙수저’란 사회적 용어에 대해 “현실일 뿐”이라며 담담하게 반응했지요.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 ‘청년 빈곤’의 두 층위를 어떻게 함께 고려할 수 있을까요? 청년 세대 전반에 똬리를 튼 불안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일하는 청소년’이 ‘공부하는 청소년’만큼 공론화되는 장을 어떻게 열어젖혀야 할까요? 우빈이 돈을 좇아 맹렬히 달릴 뿐 “그 너머는 꿈꾸거나 상상해볼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상황을 모두가 심각한 ‘문제’로 감지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신발이 찢어졌는데 새 신을 살 돈이 없어서 대학 수업을 듣다 울어버린, 그러나 주변에 내색할 수조차 없었던 소희 곁에 우리는 어떻게 남을 수 있을까요? 빈곤의 대물림을 화제로 올리기도 무색한 사회는 분명 아이들의 미래를 절멸하는 사회입니다. 아이들과의 진솔한 만남으로 위기를 일깨워준 작가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2. 강지나 작가가 읽은 『연루됨』

 

조문영 선생님의 <연루됨>은 약자들의 목소리가 있는 현장 곳곳에 시선을 둔다. 중국 청년들의 투쟁 현장에서부터 동자동 쪽방촌, 반(反)빈곤 활동을 거쳐 일본의 난민 공동체까지 희망이 자라는 곳에서 인류학자의 묘사는 두터워진다.우리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팬더믹 이후 분열과 불평등이 심해진 사회를, 생태 위기의 지구를 겪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약자들은 투명 인간이 되어 주목조차 받지 못하거나, 대상이자 타자로 물화(物化)되기 쉽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읽기 전엔, 국가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다양한 중국 청년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중국국가와 동일시된 납작한 이름만 불러왔다. 하지만 조문영 선생님의 시선이 닿자 약자들은 나와 같은 희망과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목소리를 내고 세상과 부딪치고 이웃들과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풍부하게 그려진다. 이들의 삶은 결국 어떻게든 내 일상과 연결되고 마주치며 여러 관계들 속에서 함께 연루되어 있다. 이런 연루됨이 다채롭게 드러나면, 이제 우리는 이들을 빈곤, 장애인, 외국인 등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없다. 서로 얽혀있는, 스스로 빛을 내는 수많은 ‘나’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들은 “숙의와 쟁론을 거듭하고 직접행동을 불사하며 공생의 길을 가는 세계를 지향한다.(p.184)”

나는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세계의 수많은 약자들도 조문영 선생님의 <연루됨>에서 보듯이 다른 모습으로 약동한다. 기존의 이론이나 신념을 앞세우기보다, 이제 이들의 모습을, 실제 사람들이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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