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의 초판 1, 2쇄본 오류를 사과드립니다

졸저 <나의 한국현대사>를 예약구매하거나 시판 직후 구입하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첫 반응이 예상보다 빠르고 강해서, 독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초판 1, 2쇄가 나가자마자 여러 독자들께서 전자우편을 보내 책의 오류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뭐라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오자(誤字)도 있었지만 서술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가 인쇄를 하면서 긴급하게 바로잡은 내용을 말씀드리고 너그러운 용서를 청하고자 합니다.

① 73쪽에 ‘1936년’으로 연도를 표기한 보천보 사건은 ‘1937년’으로 바로잡았습니다.

② 79쪽 ‘서울시경 남영동 대공분실’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바로잡았습니다.

③ 81쪽 아래에서 다섯 번째 줄의 ‘일본군’을 ‘만주군’으로 고쳤습니다.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소속이었습니다.

④ 88쪽 14~17행에 4.19혁명 이후 국회의 개헌안 처리와 국회의원 총선의 선후를 바꾸어 서술한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먼저 국회가 개헌을 하고 나서 곧바로 총선을 치러 양원제의 새 국회와 정부를 구성한 것이 맞습니다.

⑤ 130쪽 재독의사 ‘이수길’ 박사를 ‘김수길’로 쓴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수길 박사님께 사과드립니다. 박사님이 계셨던 독일 마인츠에서 공부한 제가 그런 오타를 내서 더욱 죄송합니다.

⑥ 157쪽 5행의 2011년을 2001년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대출금을 상환 완료한 연도입니다.

⑦ 159쪽 아래서 두 번째 줄 ‘2010년’은 ‘2000년’의 오타이기에 바로잡았습니다.

⑧ 193쪽 각주에 있는 북한 ‘외무성’을 ‘무역성’으로 바로잡았습니다.

⑨ 198쪽의 제1차 인혁당 사건 수사검사 이름 ‘김병금’을 ‘김병리’로 바로잡았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판단해 기소를 거부한 소신 있는 검사였습니다.

⑩ 215쪽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기업인 ‘우홍선’ 님이 ‘이홍선’으로 기재된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고인과 유족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⑪ 317쪽 6행의 ‘1982년’을 ‘1980년’으로 고쳤습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1982년이 아니라 1980년 연말에 시작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집필할 때 연도와 인명, 사건의 선후관계 등을 착각하거나 오타를 냈는데 교정 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해 생긴 오류입니다. 글 쓴 사람으로서 이런 오류를 낸 것을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일일이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제 홈페이지와 돌베개출판사 홈페이지에 오류 교정 내역을 말씀드리는 것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착오나 오타가 아니라 서술이 크게 잘못된 곳이 하나 있었습니다. 흔히 ‘6.3사태’라고 하는 한일협정반대투쟁을 기술한 198쪽에서 대규모 반대투쟁이 벌어지고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1964년 사건과 협정 조인이 이루어진 1965년 상황을 서술한 내용이 뒤엉키면서 계엄령 선포가 1964년이 아니라 1965년인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분량을 줄이려고 원고를 압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잘못이 생겼는데, 연표를 펴놓고 대조해 가면서 오류를 방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매우 불철저하고 불성실했다는 비판을 들어도 아무 할 말이 없을 만한 잘못입니다. 이것은 아래와 같이 바로잡았습니다.

<바로잡기 전>
중앙정보부가 시위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중략)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하자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사태’ 또는 ‘6・3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투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바로잡은 후>
중앙정보부가 시위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사태’ 또는 ‘6・3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투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중략)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년 2월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제법 긴 세월 책 쓰는 일로 살아왔지만 초쇄본의 오류 때문에 이런 글을 쓰기는 처음입니다. 저와 돌베개출판사에 이러한 잘못을 알려주신 분들께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이 꾸지람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저로서는 크게 꾸지람을 들은 심정입니다. 또 어떤 오류가 앞으로 더 드러날지 겁이 나기도 합니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더 성실한 태도로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독자여러분의 너그러운 용서를 청하며

2014년 7월 9일

자유인의 서재에서

유시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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