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후반생 – 차벽글·사진/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2.13 | 목록
차벽 사진
발행일 2010년 10월 4일 | 면수 392쪽 | 가격 20,000원

부제 : 다산 정약용, 유배와 노년의 자취를 찾아서.

제목을 굳이 따로 하나 더 붙이자면 [다산의 후반생을 같이 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산의 지인들에 대해서 조사를 많이 하고 후반 생의 자취를 연구하여 만든 책이다.

다산은 정조의 중용으로 많은 역할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순조의 뒤에서 조종하는 정순왕후는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당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노론을 예쁘게 보았을 리는 없으니 즉위 후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을 등용했는데 그렇듯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노론이 다시 세력을 잡아서 남인을 축출하기 시작했는데 그 명분이 천주교였다.

물론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어서. 정론이 바로 서면 사론은 신경 쓸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니 만큼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천주학으로 알려져 있던 그런 시기였었는데 이를 악용하여 남인들을 축출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로 인해 셋째 형 정약종, 자형이던 이승훈을 비롯한 홍락민,최창현,홍교만,최필공 등 6명이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이 옥사하며, 정약용, 약전 형제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되게 되면서 남인은 축출되는 변을 당한다. 그는 그때같이 추출하고자 음해하는 세력들이 많았으나 참수할 만큼의 명분을 채우지 못한 시파들의 명분 부족으로 약전과 함께 18년(1801~1818) 이라는 긴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그 유배길(1801년 2월 27일)에 오르는 시점부터 책은 시작하여 그의 회혼식이 열린 1836년 2월 19일 회혼식을 마친 이후 마지막 시를 남기고 며칠 뒤 세상을 등지는 날 까지를 그리고 있다.

책은 다산의 후반생의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총 15명의 주요 인물들을 소제목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첫 번째는 다산을 감시하러 온 현감 이안묵을 시작으로 동문 매반가의 주모 이야기를 등과 그의 저작을 도와주든 제자들의 이야기 등을 두루 거쳐서 마지막으로 회혼식을 함께 치른 부인 홍씨까지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이야기 식으로 저자의 생각을 곁들여서 풀어쓰고 있는 책이다.

책을 통해서 본 다산은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롭지 않기 위해서 꾸준히 집필에 정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학문적 열의가 18년이라는 유배 생활을 굳건하게 버티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600 여권이라는 대작들을 남긴 다산의 업적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그를 높이 사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산은 외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학래, 황상, 정약전 등과 같은 수많은 지인, 형제, 제자 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다양한 형태의 책을 기획, 제작, 출판한 멀티플렉스 그 자체인 천재 작가였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600여권의 책의 출판이 가능하였을까…

단순히 많은 훌륭한 책을 저작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런 그의 책의 저술 능력과 아울러 멀티플렉스 한 편집/출판 능력 또한 높이 사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실학자답게 매우 경제적으로 저술에 접근했다. 작은형 약전에게 무료로 검수를 받고, 혜장선사와 대화하며 아이디어를 얻고,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참여토록 유도해서 열성을 끌어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업무를 분담해 효율성을 추구했다. 이런 효율성과 치밀함, 뼈를 깎는 노력이 없었다면 600여 권에 달하는 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600여권의 책을 저술한 유학자나 사상가로만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다. 과학과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에 능통하며, 배다리와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을 만든 발명가로서의 다산을 덧붙이며, 아울러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다. 시와 산문은 말할 것도 없으며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난 예술가였다.

아무튼 이 책을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과연 노론 시파들의 정변은 성공한 것일까? 그들의 짧은 집권 생활과 살아생전의 남은 3~40년 평생에 기간 동안의 기름진 음식과 안락한 생활을 탐닉한 삶이 승리한 것일까? 다산은 긴 유배와 외로움, 그리움으로 정조에 대한 사랑만 간직하다가 세상을 등져서 실패한 것일까? 후대에 두고두고 몇 백 년 이상을 칭송을 받는 다산이 승리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된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하고…

다산은 긴 유배와 해배 기간 동안 자신의 비상구를 저술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 또한 이런 방대한 사료를 정리하여 책으로 내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듯하다. 그래서 이 저자는 책머리에 아래와 같이 써 두고 있다. 다산과 저자는 같은 유배(또는 어려운 환경)를 당한 동병상린으로 출발을 한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산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절망에 빠져 양자산과 설악산, 지리산을 헤매고 다닐 때, 눈에 익은 다산초당이 달리 보였고 나뭇잎이 눈에 박히게 흔들렸다. 평범하게 보이던 다산 묘소도 별나게 다가왔고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때부터 인간 다산을 찾에 헤매기 시작했다. 다산이 간 곳이라면 어디고 찾아갔다.

위 글처럼 이 책은 어려움을 겪은(다산의 유배처럼, 저자의 내용 모를 절망에 빠졌을 때) 시절에 비상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읽어 보면 다산이 걸었던 것처럼… 세월이 흘러 누가 이긴 사람이 되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그런 곳과 사람들이 읽으면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일 듯하다.

그의 수많은 글과 시 중에 훈계 목적으로 아들에게 준 유명한 글들 몇 줄만 옮겨 오면

남들 모르게 하려면 안 하는 것이 최고고, 남들이 못 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 이 두 개의 문장을 평생 동안 외우고 다닌다면 위로는 하늘에 떳떳하고, 아래로는 집안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의 재앙이나 우환, 천지를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전복시키는 죄악이 모두 몰래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치열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 [학유에게 노자 삼아 주는 훈계] 중에서(1810년 작)

나는 너희들에게 전원을 물려줄 수 있을 정도로 벼슬은 하지 못 했다. 하지만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의 부적이 있어 지금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들은 하찮게 생각하지 마라. 한 글자는 ‘부지런할 근(勤)’자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검(儉)’자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성실함이니, 모든 일에 속임이 없어야 한다" , "다만 딱 한 가지 속여도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입을 속이는 것이다."라는 가훈을 지어 부치고 이렇게 덧붙였다. – [두 아들에게 주는 훈계] 중에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사진과 글의 저자가 동일한 [차벽]이라는 저자인 점이다. 프로필을 보면 환경대학원, 토기와 달항아리 등 도자기에 심취해 사진을 찍고, 두 번의 전시회를 열고 사진 작품을 찍는 틈틈이 역사 기행과 글을 쓰고 있다. 나와 닮은 점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난 급여 생활하는 와중, 일과 중에는 책을 볼 시간이 전혀 없어서 저녁에 운동할 시간, TV 볼 시간을 쪼개서 책을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하고 있고 주말에는 가까운 산으로, 유적지로 나들이를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집중하고 싶은, 애정이 가는 내용에 대해서 시간이 날 때 좀 더 깊게 넓게 공부해서 수준 높은 책 한 권 썼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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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 - 차벽글·사진/돌베개] 다산의 유배와 노년의 자취를 찾아서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 사연과 글에 대해서 자료를 찾고 현장을 답사하며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결코 외롭지 않았던 다산의 후반 36년간의 삶에 대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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