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발행일 | 2015년 10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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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1996805 04810 |
면수 | 236쪽 |
판형 | 변형판 135x220, 소프트커버 |
가격 | 9,500원 |
분류 | 우리고전 100선 |
『난중일기』에서 인간 이순신을 만난다!
우리에게 『난중일기』는 무엇인가?
나라를 구한 영웅의 고군분투와 고뇌로 가득 찬 전쟁 일기. 그러나 이는 어쩌면 후대 사람들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닐까. 『난중일기』는 어느 조선 장수의 일과와 행적이 기록된 사료(史料)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는 내밀한 일기장이기도 하다.
단아하고 진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했고 매사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리고 조선 수군 장수로서 자신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했기에 이순신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또 조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순신 역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을 두 눈에 담는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었고, 공정하지 못한 처사에 분개하며 자신을 모함하는 이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그리며 남몰래 눈물짓고, 달빛 아래 잠 못 이루고 번민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모든 내면의 감정을 일기에 적었다.
새로 읽는 『난중일기』 _주제별로 재분류한 7년의 전쟁 기록
『난중일기』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쓴 일기다. 이 일기가 처음부터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집필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일기가 쓰인 연도에 따라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처럼 그 해의 간지가 적혀 있었다.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때, 이순신의 일기를 수록하면서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비로소 붙었다.
1592년 6월부터 12월까지와 1596년 10월부터 1597년 3월까지 등 더러 일기가 빠진 때도 있지만, 이순신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바다에 나가 왜적과 전투를 치른 날도, 왜적이 쏜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날도, 감옥에서 풀려나온 날도, 아들의 부음을 들은 날도 일기 쓰기를 멈추기 않았다.
이순신은 왜 일기를 썼을까? 추측건대, ‘전쟁’이라는 너무나도 비일상적인 상황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일기는 말 그대로 ‘그날’의 기록이므로 이순신은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잊히기 전에 최전선에서 몸소 겪은 일을 일기에 적었다. 『난중일기』 덕분에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7년간의 긴 전쟁의 실체를 실상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지킨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이순신의 기록정신은 기려져야 할 것이다.
『난중일기』는 마치 어느 수군 장수의 공무일지 같기도 하다. 일기의 많은 부분이 그날 어떠한 공무를 보았는지, 무슨 훈련을 했는지, 부하 누가 다녀갔는지, 조정이나 다른 군영에서 온 공문의 내용은 무엇인지 등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내면이 솔직하게 드러난 부분도 많다. 동시대 다른 문인의 일기보다 더욱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글도 여러 편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공적인 면모뿐 아니라 사적인 면모, 즉 내밀한 자아까지 모두 담고 있는 이순신 개인의 ‘일기’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일부를 가려 뽑아 번역한 책이다. 선별한 일기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장마다 제목을 붙였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공적인 인간, 즉 장수로서 전쟁에 대비하고 직접 왜적을 물리치는 이순신의 모습이 담긴 일기가 들어 있다. 4장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조선과 조선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전쟁의 참상을 보여 주는 일기를 수록했다. 5장과 6장에는 이순신의 사적인 면모, 내면의 감정이 솔직하게 나타나 있는 일기를 실었다. 마지막으로 7장은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거쳐 관직에 복귀한, 정유재란 시기의 일기로 구성했다.
수많은 『난중일기』 번역본이 있지만 텍스트를 주제에 따라 재구성해 독자가 내용별로 『난중일기』에 다가갈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을 통해 인간 이순신의 마음을 느끼고, 이순신이 조선을 지키고 영웅이 된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을 지키리라 _공적인 인간 이순신
임진왜란은 예견된 전쟁이었다. 일본의 각 지방을 나누어 다스리던 다이묘(大名)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던 일본을 통일하며 1585년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자신의 천하를 넓히기 위해 중국을 평정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낸다.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본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누구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단언하지 못했다. 건국 이후 200년이 다 되도록 전쟁 없이 살아온 조선에 전쟁 방비가 갖추어진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전쟁에 대한 방비가 철저히 이루어지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이 다스리던 전라 좌수영이었다.
1592년 3월 6일
아침밥을 먹고 관아에 나가 무기를 점고했다.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環刀)는 깨지거나 훼손된 것들이 많았다.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담당 아전과 활 만드는 장인, 감고(監考) 등의 죄를 논하였다.
1592년 4월 12일
식사 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순찰사 아래에 있는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오후가 되어 동헌으로 나갔다. 활도 열 순 쏘았다.
위 4월 12일의 일기는 왜군이 부산포에 도착하기 바로 하루 전의 상황이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선봉이 된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고, 5월 3일에는 한양을 그리고 6월 13일에는 평양성을 파죽지세로 무너뜨렸다. 그렇지만, 조선의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경상 우수사와 힘을 합쳐 적선을 격파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을 결행했다. 익숙지 않은 바다였지만 5월 7일에는 거제도 인근 옥포에서, 5월 29일에는 사천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6월에는 고성 당항포 등지에서, 7월 8일에는 한산도에서, 9월 1일에는 부산포에서 왜적의 배를 수없이 침몰시키며 남해를 조선의 바다로 지켜냈다.(이 책 14면 ‘임진왜란 주요 해전’ 지도 참조)
1592년 5월 29일
우수사(이억기)는 오지 않았다. 혼자서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새벽에 출발해 곧장 노량에 닿았다. 경상 우수사도 약속 장소로 왔다. 왜적이 배를 댄 곳이 어디인지 묻자 적의 무리는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하였다. 즉시 가리키는 곳으로 갔더니 왜적은 벌써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배는 봉우리 아래에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왜적들은 재빠르고 견고하게 우리를 막아 싸웠다. 나는 장수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달려 나가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화살을 빗발처럼 퍼붓고 여러 가지 화포(火砲)들을 폭풍 치듯 우레 치듯 어지러이 쏘아댔다. 왜적은 두려워하며 퇴각했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고, 나 또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들어갔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활 쏘는 병사와 노 젓는 선원 중에도 총탄을 맞은 자가 많았다. 왜적의 배 열세 척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위 일기는 바로 사천 해전을 치른 날에 쓴 기록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전투를 치른 날, 심지어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한 몸으로도 일기를 남겼다. 1592년 일기는 5월 이후 빠진 날이 많아 한산도 해전이나 부산포 해전의 상황을 이순신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는 없지만, 적과 대치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장(戰場)에서 이순신은 그날그날의 일기를 남겼다. 일기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도 이어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량 해전의 광경을 이순신이 손수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통해 생생한 해전의 모습뿐 아니라 당시 조선 사람들의 생생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자기 잇속만 차리느라 징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결탁해 산 사람을 죽었다고 고하는 아전들, 수군에 복무하기 싫어 도망치는 백성들, 전쟁 중에도 배에 어린 여자를 태우고 다닌 남해 현령 기효근, 전쟁터에 첩까지 데리고 내려온 순변사 이일, 싸우지도 않고 도망부터 친 경상 우수사 배설, 제 한 목숨 보전하려고 자기 고을 백성들을 버리고 산골짜기에 몸을 숨긴 무안 현감 남언상, 좌의정에게 아첨해 전라 우수사의 자리까지 오른 김억추 등 이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일기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것들도 많은데, 굶주림에 사람 고기까지 먹는 백성들, 헐벗고 굶주린 병사들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출전한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주변의 지형과 물살, 조수 등을 고려하여 조선군에 유리한 해전 장소를 택하고, 일본군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기습 공격을 하는 등 전략 면에서 앞섰다는 것이 승리의 한 요인일 것이다. 또한 학익진(鶴翼陣)과 같은 전술의 사용, 일본군 무기보다 성능이 뛰어났던 조선의 화포(火砲), 모든 부하가 자신을 따르고 분발하여 싸울 수 있도록 독려한 이순신의 지휘력, 이 모든 것이 일본 수군을 압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순신이 언제나 이길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그가 언제나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는 데 있다. 이순신은 전쟁에 직면하여 사사로운 나를 버리고 오로지 공적인 인간, 즉 나라를 지킬 임무를 지닌 조선군 장수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이는 류성룡의 『징비록』이 증언하는 바이다.
“이순신은 전쟁터에 있을 때 밤낮으로 경계를 엄중히 하여 갑옷을 벗지 않았으며, 한밤중에도 부하들을 단속하고 경비를 삼엄히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은 부하들의 상처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었지만 도망치거나 군율을 어긴 군사는 가차 없이 처벌하여 군대 안의 기강을 세웠다. 또한 점검과 훈련을 통해 언제 있을지 모를 전투에 늘 철저히 대비했다. 꿈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공적인 인간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맡은 바를 해낸 위인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_사적인 인간 이순신
『난중일기』는 제목 그대로 전쟁이라는 난리 중에 쓴 일기이지만, 그 안에는 이순신의 여러 가지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장수로서 언제나 공적인 것, 즉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철저한 준비로 빈틈없이 행동하던 이순신도 일기에는 그리움이나 기쁨, 분노, 슬픔, 절망과 같은 감정을 솔직하게 적었다.
이순신의 일기에 가장 빈번히 표현되는 감정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순신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생활하며 언제나 가족을 그리워했다. 연로하신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 못해 애를 태우고, 배를 타고 먼 길 떠난 자식들이 무사히 바다를 건넜는지 가슴을 졸이며, 병든 아내를 걱정해 한숨짓는 이순신은 그저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의 모습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본가가 있는 아산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 좌수영에서 머무는 날이 길어지자, 이순신은 1593년 어머니를 수영 부근의 여수 고음천으로 모셔 왔다. 그러나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뒤로는 가까이 계신 어머니도 1년에 고작 한두 번 찾아뵐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백의종군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시다가 별세하였다. 이순신은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 된 것이다. 더구나 죄인의 몸이 되어 어머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다시 남쪽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참담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도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글로 적기 힘들었는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일기는 모두 나중에 기록한 것이라 한다.
1597년 4월 16일
배를 끌어와 중방포에 대어 놓고 어머니 영구를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고향 마을을 바라보니 눈물이 나고 가슴이 찢어진다. 이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는데 빗줄기가 거세졌다. 남쪽으로 갈 일도 다급하니 부르짖고 통곡하며 다만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순신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고 명량 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해 가을 막내아들 이면이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1597년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서 온 어떤 사람이 본가에서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봉투를 열기도 전에 살과 뼈가 먼저 후들거리고 정신이 어찔했다. 겉봉을 대강 펼쳐 열(䓲)이의 편지를 보니 바깥쪽에 ‘통곡’(痛哭)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면이가 전쟁터에서 죽었구나. 나도 모르게 간담이 내려앉고 목이 메었다. 통곡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하늘은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리도 어그러졌느냐. 하늘은 어둡고 땅은 컴컴하니 한낮의 해도 빛을 잃었구나. 슬프다! 우리 막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영특한 기질이 범상치 않아 하늘이 너를 세상에 남겨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그 화(禍)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남아 있은들 마침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네 이름 부르며 울부짖을 따름이구나.
하룻밤이 일 년 같았다.
이순신은 슬픔을 넘어 절망에 빠졌다. 자식을 먼저 하늘로 보낸 아비의 심정이 어찌 참담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순신은 아들을 잃은 절망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이면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나라를 구해야 할 장수이기도 했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왜적과 싸우던 이순신은 결국 조선을 지켜내고 왜적의 총탄에 맞아 막내아들 곁으로 떠났다. 아들보다 고작 한 해를 더 살았다.
◎ 조선을 지키리라
전쟁에 대비하라
무기와 전선을 점검하라
거북선을 만들다
오늘도 활쏘기를 연습하고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앞날
실정 모르는 조정 관원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영의정 류성룡
◎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임진년, 전쟁이 시작되다
첫 출전의 날
사천 전투
당포 해전
적을 유인하라
수군의 기세에 왜적이 달아나고
나에게 항복한 왜인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
정유년, 다시 왜적과 맞서다
진린과의 연합 작전
◎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자기 잇속만 차리는 아전들
도망친 군사에겐 죽음이 기다릴 뿐
배에 여인을 태운 남해 현령
전쟁터에 첩을 데려온 순변사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 우수사
산에 숨은 무안 현감
아첨으로 지위를 얻은 김억추
◎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피란 떠나신 임금님
헐벗고 굶주린 군사들
왜적의 손에 부하를 잃고
피란길에 돌아가신 숙모
돌림병으로 죽은 금산이
사람 고기까지 먹는 백성들
나라 안의 적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어야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새해 첫날에
수영(水營)에도 봄은 오고
전장에서 보낸 명절
항복한 왜인의 광대놀이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잠 못 이루고
앞일을 일러 준 꿈
몸이 아파 신음하여도
점괘에 위안을 얻고
◎ 멀리서 그리는 가족
꿈에 뵌 아버지
머리 흰 아들의 어머니 생각
어머니의 당부
병든 아내
아비의 마음
염이 걱정
면아,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 백의종군의 길
감옥 문을 나와
다시 남쪽으로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원균
나의 자리로 돌아와
두 번 다시 바다를 빼앗기지 않으리
번호 | 도서 | 제목 | 댓글 | 글쓴이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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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 김지윤 편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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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통 | 2016.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