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 김지윤 편역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8.19 | 목록
이순신 지음 | 김지윤 옮김
발행일 2015년 10월 12일 | 면수 236쪽 | 판형 변형판 135x220 | 장정 소프트커버 | 가격 9,500원

난세에 나라를 구한 영웅의 임진왜란 참전기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며 소설, 영화 드라마 등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상태

물론 임란 이후의 사료에 정조가 숨을 불어 넣어 지금에 이르렀고. 학문적으로도 그가 남긴 『난중일기』는 여러 사람들의 번역과 연구의 대상.

너무도 잘 알려진 탓에 최근 사료를 말도 안 되게 오역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퍼트린 말이 인터넷에 휘돌아 성웅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도 있고..

일생을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의 번역과 연구에 바치는 사람도 여럿 있다.

이 책은 그간의 번역과는 방향이 좀 다르게, 『난중일기』의 내용 중 일부를 뽑아서 번역한 책.

그 일부라는 것이 선별한 주제(공적인 인간, 사적인 인간)로서의 이순신을 바라보면서 그 주제에 따른 글들을 모아서 번역했다는 것으로 전쟁과 장수(원균)들을 바라보는 시각, 백성의 참상, 자신의 내적 감정, 백의종군 시기의 글 등이 그 주제다.

『난중일기』 완역본을 찬찬히 읽어본 나로서는 ‘주제별로 정리를 좀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하루하루 써나간 일기를 사안별, 주제별로 모아서 보는 것도 재미나다.

이순신 장군은 거의 매일 일기를 썼고, 왜적과 전투를 치르다 총탄에 부상을 당한 날도, 감옥에서 풀려난 날과 심지어 아들의 죽음을 통보받은 날도 일기를 썼다.

최초(? 저자 주장에 따른다~ ^^*)의 주제별 재구성으로 이순신의 생각과 시각을 느낄 수 있다.

****

–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은 1598년 7월에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처음부터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진린을 극진히 대접하고 진린이 이순신의 인간 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더욱이 진린은 이순신과 노량 해전에 출전함으로써 이순신의 마지막을 함께한 명나라 장수가 되었다.

– 왜적이 침입해 온 뒤 조선 백성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져 농사를 지을 수 없는데다, 곡식이 있다면 명나라 군사들이 우선. 배고픔에 지친 조선 백성 가운데 일부는 실제 사람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형제나 자식을 죽여 그 고기를 먹은 경우도 있다고 하니,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명나라 군사가 술을 마신 뒤 토한 찌꺼기를 핥아먹기 위해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었다는 기록까지 전한다. 몇몇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결국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 전쟁의 참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 1596년 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간첩 요시라를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진격하는 시기를 거짓으로 알렸다. 요시라의 말을 믿은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이 정보를 의심한 이순신은 출전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이순신을 게으른 장수로 여겨 왔던 선조는 이순신의 태도에 격노해 이순신을 옥에 가두라 명하였고,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년 2월 26일 압송되기 시작해 3월 4일 서울의 감옥에 갇혔다. 정탁 등이 구명을 위해 애쓴 끝에 4월 1일 감옥 문을 나왔지만, 이순신은 더 이상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요, 관직 없는 무관이었다.

–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전라 좌수사였던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로 지원을 나가 함께 왜적을 물리칠 때만 해도 경상 우수사 원균과 이순신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라도와 경상도 수군이 연합 작전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출전을 두고 자주 대립하였다. 원균이 대부분 곧바로 진격해 왜적과 싸우자는 주장을 하였던 반면, 이순신은 신중한 자세를 취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이 속한 당파의 입장과도 유사했는데, 원균은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서인이었고, 이순신은 일본과의 강화를 도모했던 남인과 가까웠다. 전쟁이 계속되고 원균에 비해 공을 많이 세운 이순신이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나이도 다섯 살 위인 데다 무관으로서 경력도 많았던 원균은 이순신을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1598년 11월 17일 일기는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며 조선의 바다를 지켰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철수하라 지시하고 1598년 8월 18일 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순천 왜교에 성을 싾고 주둔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고니시를 구원하러 순천으로 향하던 시마즈의 수군 부대를 공격한 것이 바로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가 된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시마즈 부대를 크게 이겼지만, 이순신은 이날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사실상 정유재란은 끝이 났다. 이순신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선을 구하며 두 번 다시 조선의 바다를 왜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 임진왜란은 예견된 전쟁이었다. 일본의 각 지방을 나누어 다스리던 다이묘(大名)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던 일본을 통일하며 1585년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자신의 천하를 넓히기 위해 중국을 평정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무력이 강한 일본국이 대명 문인의 나라를 쳐부순다"라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낸다. 다시 말해 조선에 일본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 침공의 길잡이가 되라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본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누구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단언하지 못 했다. 건국 이후 200년이 다 되도록 전쟁 없이 살아온 조선에 전쟁 방비가 갖추어진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전쟁에 대한 방비가 철저히 이루어지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이 다스리던 전라 좌수영이었다.

–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부산 앞바다에 도착. 그다음 날 부산성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 시작. 4월 24일 상주, 4월 28일 충주 함락, 4월 30일 서울을 떠나 피란, 5월 3일 왜군 서울 점령, 6월 13일 평양성 점령 반면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옥포, 5월 29일 사천, 6월에는 고성 당항포, 7월 8일에는 한산도, 9월 1일에는 부산포에서 왜적의 배를 수없이 침몰시킴

****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 김지윤 편역 / 돌베개
———-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기록했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번역해서 전쟁에 임하는 장수의 공적, 사적 부분과 외면과 내면 등을 통해 장군이자 인간 이순신을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준다.
———-

p.s
휴가길에 동행하려고 구입하고 바로 읽지 않고 꽤 오래 대기하다가 휴가길에 동행,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4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