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의 역사

한반도 정전체제와 비무장지대

한모니까 지음

발행일 2023년 11월 27일
ISBN 9791192836508 93910
면수 540쪽
판형 신국판 152x225mm, 반양장
가격 27,000원
한 줄 소개
‘DMZ의 역사’를 조명한 최초의 책
주요 내용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언은 가능한가?

 

정전체제 다음에 올

어떤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

 

책 소개

 

정전협정 조인 7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출간된,

‘DMZ의 역사를 조명한 최초의 책

2023년 11월 21일,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한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정상회담에서 합의한 「9․19 군사합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북한은 이에 대응해, 9·19 군사합의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겠다며 합의에 따라 지상, 해상, 공중에서 중지했던 모든 군사적 조치들을 즉시 회복하는 재무장화에 나섰다. 그리고 실제로 비무장지대(DMZ) 경계초소(GP)를 복원시키는 움직임이 정찰되었다.

정전협정 70년을 맞은 2023년이 저물어갈 무렵, 이처럼 「9․19 군사합의」 파기를 둘러싸고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DMZ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책이 돌베개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전쟁과 남북 접경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분단과 냉전, 통일과 평화의 문제에 천착해온 역사학자 한모니까(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성립과 DMZ의 탄생 순간에서부터 1960년대 DMZ 무장화의 과정과 냉전 경관의 형성, DMZ에서의 화해와 체제 경쟁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살핀다.

 

 

출판사 서평

 

한국전쟁의 유산이자, 정전체제를 지탱하는 3개의 축

― 정전협정 ․ 비무장지대(DMZ) ․ 유엔군사령부(UNC, ‘유엔사’)

한반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는 70년이 되었지만, 정전협정(문서), 비무장지대(공간), 유엔군사령부(행위자)는 3개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며 정전체제를 존속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굳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생산적인 남북 간의 논의를 통해 평화(그것이 어떤 형태든)로 향할 수 있을까?

정전체제의 변화 가능성, 즉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이행 가능성은 비무장지대라는 공간과 이 공간을 탄생시킨 정전협정, 또 유엔군사령부의 역사적 변화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이 셋 모두는 처음의 모습이 아니다. 정전협정문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사문화했다. 비무장지대는 역설적이게도 무장지대화했다. 유엔사의 임무 또한 미묘하게, 하지만 크게 달라져왔다. 이 책은 비무장지대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정전협정이라는 제도와 유엔사라는 행위자의 역사적 변화를 추적하고 실상을 파악하려는 최초의 작업이다. 이것은 분명 현재 체제의 대안을 논의하고 그 논의를 현실화하는 데 중요한 참조가 될 것이다.

 

DMZ의 과거에서 알 수 있는 것들

― 1960년대의 무장화와 군사충돌 ․ 1970년대의 화해 기류와 남북접촉

2018년에 이뤄진 9․19 군사합의 이후, 남북은 DMZ의 GP 각 11개씩을 철거하고, 향후 DMZ 내 모든 GP를 철수해 실질적 비무장화를 추진하기로 했었다. 완충구역을 설정하고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자는 합의도 있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채택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서인 군사합의 결과 나타났던 이런 움직임이 1970년대에 있었던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를 포함한 남북교류 움직임의 연장선에 있다면, 2023년 말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이어진 연쇄적인 ‘합의 파기’와 재무장화 움직임은 마치 1950년대 말 미국이 한반도에 원자무기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에 반발해 북한이 지하갱도(땅굴)를 포함해 ‘전 지역의 요새화’에 나섰던 ‘무장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DMZ의 역사’ 속에서, 남북이 경쟁적으로 GP 무장화에 나선 이후인 1960년대에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극심한 군사충돌이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졌다. 9․19 군사합의 파기 이후 어떤 일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질지, 접경지역의 주민들은 또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게 될지가 그려지는 이유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구(名句)는 또 한번 증명될까? 역사학자 한모니까는 『DMZ의 역사』에서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을 찾고자 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는 이미 비무장지대가 어떻게 평화지대화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1970년대에 이미 평화 지향적인 방안들이 정부의 주도하에 검토되었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이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고 70년이 흘렀다. 정전 이후 70년간, 한반도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완화되었다 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세의 물결에 따라 DMZ도 성격을 달리해왔다. 이곳은 무장화와 군사충돌의 전장(戰場)이 되었다가도, 남북 사이에 훈풍이 불면 교류와 접촉이 일어나는 만남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평화로 향하는 발걸음은 앞을 향하다 어느 순간 멈추어 퇴보하곤 했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반환점에 섰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DMZ라는 공간 또한, 역사의 산물이자 정전협정이라는 제도의 산물이다. 이곳은 멈추어 있거나 고정된 공간이 아니며, 제도를 만든/제도가 낳은 행위자들의 인식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다. 우리가 앞날의 행위자로서 DMZ의 역사를 알고 다음에 올 무언가를 상상해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 책의 제1장에서는 비무장지대의 탄생을 살핀다. 시기적으로는 1950년 10월 38선 북진 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다. 비무장지대에 관한 첫 발상과 확산, 정전회담에서의 논의와 정전협정 조항 등을 살피고, 정전 이후 제도의 이행과 균열 등을 살핀다.

제2장은 1960년대 비무장지대 무장화의 핵심 내용과 과정, 사건, 그로 인한 경관의 변화 등을 살핀다. 가시화된 철책과 경계초소(Guard Post, GP), 불모지, 비가시화된 땅굴 등을 비무장지대의 핵심적인 냉전 경관으로 주목하고, 형성 과정을 분석한다. ‘경이로운’ 생태의 모습도 ‘군사 생태’(military ecology)의 측면에서 살핀다. 무장화와 사건, 경관의 변화는 남북관계의 차원이 아니라, 베트남전쟁, 한‧미 관계, 북‧중‧소 관계의 변화, 군사와 과학의 결합 등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비무장지대 경관 원형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제3장에서는 비무장지대의 화해와 체제 경쟁을 살핀다. 시기적으로는 정전 이후부터 1970년대초까지다. 북한, 유엔사, 남한, 중립국감독위원회 등이 처음으로 제안한 평화적 이용 방안들, ‘자유’와 ‘평화’의 경쟁과 실상 등을 다룬다.

 

DMZ의 기억 하나,

― 비무장지대는 처음부터 늘, 그곳에 있었다?

DMZ는 한반도의 중앙부를 가르는 지리적 공간으로서 ‘분단의 상징’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가보기 힘든 미지의 공간이라는 비밀스러움 때문인지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많이 받는 곳이다. 생태에 관한 연구를 비롯해 DMZ 관련 연구도 양적으로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DMZ의 ‘역사’를 다룬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흥미롭게도 DMZ를 다룬 거의 모든 보고서와 논저, 안내서 등의 도입부에는 이곳의 역사가 반드시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DMZ가 한국전쟁의 결과 탄생했다는 점과 정전협정 제1조의 규정으로 인해 생겼음을 언급하는 정도이다. DMZ는 처음부터 늘 그곳에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한반도에 DMZ라는 공간을 두자는 생각은 누가 제일 처음 떠올렸을까? 그런 의견을 주고받고 합의한 주체였던 이들은 어떤 논쟁 과정을 거쳤을까? 정전협정문의 조문은 어떤 과정을 거쳐 확정되었을까? 『DMZ의 역사』는 우선 제1장에서 DMZ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다룬다. DMZ의 ‘탄생’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누가? 영국이다. 언제? 1950년 11월이다.(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했고, 정전협정이 1953년 7월에야 조인되었다는 점을 보면 생각보다 이른 시기이다.) 어디서? 영국 참모위원회와 내각이다. 무엇을? 영국에서 논의된 것은 ‘완충지대’를 설치하자는 구상이었다. 어떻게? 유엔의 개입을 통해 관련국들이 합의에 이르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왜?

영국은 ‘왜’ 1950년 11월에 한반도에 완충지대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을까. 1950년 6월 25일 북·중·소의 합의와 북한의 선공으로 한국전쟁 전면전이 시작되자, 전세는 빠르게 국제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직접 참전하지 않은 유럽의 국가들도 각기 남북한을 여러 형태로 지원했다. 한반도에서 발발한 열전(熱戰)은 미국과 소련을 각 축으로 한 냉전의 축소판이었다. 1950년 10월 1일, 유엔군과 국군이 38선 너머로 북진하여 북한 전역을 점령하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을 때,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후의 전황은 어느 한쪽이 확실한 승기를 자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졌다. 비무장지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의 참전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영국 측에서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고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한국(남한) 입장에서는 낯선 구상이었지만, 한반도 DMZ 같은 ‘완충지대’는 서방 강대국들이 영토 분쟁이나 국경지대의 적대행위를 종결시키는 과정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실험해본 ‘해법’이었다.(자세한 내용은 책의 50~52쪽 참조) 이렇게 DMZ의 탄생은 정전회담장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 전에 이미 국제 열강들과 유엔의 각국 대표단 사이에서 공유되고,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DMZ의 기억 둘,

― 북한의 기습남침용 ‘땅굴’?

『DMZ의 역사』 첫머리에서 저자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1970~1980년대, 기억 속 화면에 비친 DMZ는 “하얗게 쌓인 눈을 배경으로 조를 이룬 군인이 철책 주변을 순찰하는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뉴스는 “북한의 기습남침에 대비하여 ‘철통 같은 방비 태세’를 갖추었다”며 강조했다. ‘땅굴’ 소식이 대중에게 처음 전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땅굴은 1974년 연천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어렸던 그는 “좁은 땅굴의 남쪽 출구를 막으면” 남침용 땅굴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그 당시에 DMZ는 ‘무서운’ 곳이었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DMZ는 그렇게 멀리 그러나 ‘가까이’ 있었다.

후에 역사 연구자가 되어 DMZ를 바라보자 그의 눈에는 ‘철책’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저자 한모니까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철책은 언제 왜 만들어졌을까? 우리는 DMZ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DMZ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누가 처음 떠올렸고,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비무장’지대는 왜 ‘비무장’ 상태가 아닐까?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갈수록, 길지 않은 한반도 DMZ의 역사가 실에 꿰였다. 그곳의 과거를 들여다보자, 이런저런 사건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남북한의 경계인 DMZ에 얽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DMZ를 분단의 구조화와 관련된 문제로 본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DMZ는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만든, 정전협정이 규정하는 행위자들의 인식과 정책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 행위자들이 대립하는 공간이다. 정전체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문제들이 터지는 곳이다. 우리는 ‘정전체제’하에 있음을, 우리가 분단국의 국민임을,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식하고 살아가지 않지만, DMZ라는 공간은 여전히 분단의 무대이다. 냉전이라는 배경을 두고 남북한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다.

1974년 연천에서 처음 발견된 ‘땅굴’은 이 드라마의 복선(伏線)과도 같은 존재였다. 흔히 ‘땅굴’이라 알려진 ‘비무장지대 지하갱도’는 현재 총 4개가 발견되었다.(1974년 연천, 1975년 철원, 1978년 파주, 1990년 양구에서 발견) 땅굴의 존재는 충격적이었다. 땅굴이 ‘무장간첩 남파와 남침용’으로 건설된 것이라 추정되었고, 대중에게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땅굴의 군사적 활용도가 중대한 데 비해, 그 목적도, 만들어진 배경도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다. 땅굴이 처음 발견된 것이 1974년이고, 베트남전에서 ‘지하갱도’가 활용되었으니 북한 땅굴이 북베트남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DMZ의 역사』에서 저자는 동유럽(동독과 헝가리)의 외교문서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록, 미국 국무부 자료 등을 폭넓게 활용해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낸다. 북한이 DMZ에 건설한 땅굴(지하갱도)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이 한반도에 원자무기를 도입하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의 제2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DMZ라는 공간이 어느 날 갑자기 한반도에 ‘생긴’ 것이 아니듯, 땅굴 또한 그 탄생의 맥락을 좇다 보면 어느새 한국전쟁까지 돌아가게 된다. 한국전쟁 때 북한은 갱도식 진지를 구축하고 주요 시설을 지하화하여 유엔군의 폭격에 대비한 경험이 있다. 고지전이 잇달을 당시에는, 전선 일대에 갱도식 진지 체계가 구축되었고 평양을 비롯해 북한 각지에는 방공호와 지하시설이 구축되었다. 북한은 이렇게 구축한 지하시설을 한국전쟁에서 유용하게 활용했는데, 김일성은 이를 두고 1963년 5월 소련 대사에게 “바위동굴로 첫 번째 전쟁에서 승리했었고, 두 번째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북한은 1950년대 말, 미국이 한반도에 원자무기를 도입할 계획을 세우자 다시 한번 한국전쟁의 경험을 살려 ‘전 지역의 요새화’에 나섰던 것이다.

이렇듯 북한이 한국전쟁 때의 경험을 살려 DMZ 일대에 땅굴을 구축해나간 것은 곧 1962년의 ‘4대 군사노선’의 채택으로 이어졌다.(4대 군사노선이란,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 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이다.) 북한은 특히 ‘전 지역의 요새화’를 통해 북한 전역에 지하갱도를 구축해나갔다. DMZ에서 발견된 땅굴의 목적을 기습남침용이라는 단순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부터 쌓아온 기술력을 북베트남에 이전하기도 했다.

북한이 북베트남에 ‘땅굴’을 수출했듯, 남한은 남베트남에서 ‘철책’을 수입했다. 우리가 DMZ 하면 흔히 떠올리는 장면에 빠지지 않는 철책은 미국이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 17°선에 구축한 것을 도입한 것이다. 남측 DMZ의 철책은 1960년대에 진행된 비무장지대 무장화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DMZ의 경관을 형성했다. ‘비무장’ 상태여야 할 비무장지대에서 결국 상대 측의 무장화에 대응하는 ‘방어 체계’의 일환으로 북한은 땅굴을, 남한은 철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DMZ의 기억 셋,

― 경이로운 자연의 회복력이 만든 ‘생태의 보고’

DMZ는 과연 ‘생태의 보고(寶庫)’이기만 할까? 그간 민간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전쟁의 피가 뿌려진 곳에서 스스로 회복된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DMZ 경관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이 상흔이 남은 곳에서 자라난 생명력은 그 역설에 주목하게 만들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설의 다른 단면 또한 있다. 저자 한모니까는 『DMZ의 역사』에서 DMZ의 자연환경이 단순히 ‘경이로운 자연의 회복’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이루어진 끊임없는 군사작전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이를 ‘군사 생태’(military ecology)라 명명한다.

1960년대는 DMZ의 무장화가 집중적으로 진행되는 동시에 이곳의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이 최초의 생태 연구로 이어진 때이기도 했다. 이때는 미국 대외 과학정책의 지원을 받아 비무장지대 인근 남쪽 지역에 대한 최초의 생태학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군사적인 목적의 연구와 작전 또한 진행되었다. 전염병의 매개가 되는 조류와 설치류 연구, 초목 통제 실험과 프로그램 시행 등이 그렇다.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일어난 빈번한 산불도 DMZ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사계청소’ 작전을 위해, ‘까까머리’가 되도록 풀과 나무를 제거하는 ‘고엽제 작전’은 대규모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후반, 철책 구축과 함께 대침투체계의 하나로 시행된 초목 통제(vegetation control)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1960년대는 ‘글로벌 환경주의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1962년에 『뉴요커』에 연재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 등 인간의 지나친 개입이 자연환경 그리고 다시 인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하게 만들었고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는 전 세계적인 환경적 화두가 되었다. 이후 미국 정치계에서는 자연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환경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주한미군과 미 국방부는 태평양 너머 한반도에서 자연환경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고엽제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DMZ의 역사』에서는, 이때의 고엽제 작전이 유엔군사령부와 미 국방부, 주한미군, 주한 미 대사관 등의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1966년 10월 존슨 대통령 방한 당시 일어난 DMZ 북한군 침투 사건을 계기로, DMZ 남쪽과 민간인통제선 사이 지역에 적용된 과정을 상세히 밝힌다.

 

DMZ의 기억 넷,

― ‘자유의 마을’ 대성동이라는 무릉도원?

DMZ는 자연의 회복과 인간의 훼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역설의 공간이다. DMZ는 분단의 상징이자, 냉전이 응축된 곳이다. 체제가 대립하는 전장이지만, 비무장과 평화를 추구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DMZ는 무엇 하나로도 설명될 수 없는 다층적인 곳이다. 이런 DMZ에는 자유와 평화의 이름을 달고 소리 높여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꿈꾸지만 자유롭지도 평화롭지도 않은, 특이한 마을이 있다. 바로 기정동(북쪽 ‘평화의 마을’)과 대성동(남쪽 ‘자유의 마을’)이다.

무장화와 군사충돌, 베트남전으로 점철된 1960년대가 가고 나자, 이곳저곳에서 변화가 움트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데탕트의 기류가 흘렀다. 유엔사는 군정위에서 DMZ의 비무장 상태를 회복하자는 제안을 했다.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둔 동독과 서독이 만났다. 국토통일원 등에서는 DMZ의 평화적 이용 방안을 찾고 ‘통일 이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DMZ에서는 남북 간에 ‘체제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다. 이 전쟁은 선전 전단과 확성기, 경쟁적인 개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미 1950년대부터 북한에서는 DMZ 안의 마을 평화리(기정동)를 체제 선전의 장으로 내세웠고, 남한도 질세라 대성동에 ‘자유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맞붙었다.

두 마을에는 각각 ‘자유’와 ‘평화’를 선전할 역할이 주어졌다. 지척에 있는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 오갈 수 없었지만, 확성기 소리가 경계를 넘나들었다. 유엔군사령부의 관할하에서 사실상 유엔군정의 주민이었던 대성동 마을 사람들은 1963년에 대한민국 행정구역으로 대성동이 편입되면서 소속을 다시 찾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유’롭게 파주 등지로 나다니지 못했다. 고성능 확성기가 왕왕거리는 속에서 ‘평화’도 찾지 못하고 ‘자유’롭지도 않았던 두 마을은 냉전기에 남한과 북한이 양 체제의 대표로 서로 다투었던 과거를 그대로 축소하여 재현하고 있었다. 『DMZ의 역사』에서는 두 마을이 탄생하게 된 연유와, 두 마을에 얽힌 개발의 역사적 실상, 체제 선전의 기본 서사 형성 과정 등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DMZ의 과거에서 찾는 미래의 길

―경계에서 중심으로 ‧ 객체에서 주체로 ‧ 대상에서 행위자로

생산적인 남북관계 논의는,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떼는 듯했다가도 어느새 정치 차원의 쟁투와 사회적 거부감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히곤 했다. 남북 사이에 훈풍이 불면 DMZ는 교류와 평화의 장이 되었고, 그러다 북쪽에서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면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군사분계선(MDL)의 경비는 삼엄해지곤 했다.

이런 상황에 종전 논의는 시작하기조차 어려우니 평화로의 이행은 동면하듯 멈춰 있다. 정전체제 다음에 와야 할 것이 평화체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미래에 이를 수 있을까? 이럴 때 과거의 역사에서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길을 찾지 않던가. 그렇다면 비무장지대라는 다층적이고 역설적인 공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비무장지대(공간), 정전협정(문서/법체계), 유엔군사령부(행위자)는 한반도 정전체제 존속의 핵심 축이며, 정전체제의 변화도 세 가지 축 모두의 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경계에서 중심으로, 협정의 객체에서 주체로, 논의의 대상에서 행위자로―이러한 변화는 가능할까?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정전회담이 진행되기 전부터 서방 강대국을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DMZ의 모습은 처음의 구상과 매우 다르다. 정전협정이 ‘규정한’ 모습과도 다르다. DMZ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행위자들의 인식과 정책이 달라짐에 따라 경관(景觀)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DMZ는 계속 변화해왔다.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미래는 DMZ를 둘러싼 남한, 북한 그리고 유엔사라는 행위자가 어떠한 인식과 정책, 의지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차례

책머리에

서장
― 한국전쟁의 유산: 정전협정, 비무장지대, 유엔군사령부 •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 • 연구 방법과 자료 • 구성과 내용

제1장 한국전쟁,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탄생

1 비무장지대라는 아이디어: 확전 방지와 정전 모색
1) 영국의 비무장지대 제안과 제안의 확산
― 1950년 11월, 중국의 참전과 영국의 비무장지대 구상 •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비무장지대와 영국 • 월경추격권 제어와 비무장지대안 확산 • 미국, “비무장지대는 자유 진영의 패배” • 완충지대를 반대하는 한국 정부 • 군사적 접근을 고수하는 미국
2) 1950년 12월, 미국의 휴전 모색과 비무장지대 설치 구상
― 트루먼의 핵 사용 언급과 비무장지대 설치 논의의 재개 • 영국·인도의 비무장지대 제안과 중국의 거부 • 미국의 정전 모색과 비무장지대 구상

2 정전회담과 비무장지대 설치·관리
1) 정전의 조건: 비무장지대 설치
― 의제 채택과 동상이몽의 비무장지대 • ‘38선’ 대 ‘38선 이북의 20마일 폭’의 비무장지대 • 군사분계선 논쟁의 이면: 개성 확보 • 1953년 11월 경계선 가조인과 지도 그리기 • 1953년 6~7월 지도 수정
2) 정전의 유지: 비무장지대 관리와 행정
― 비무장지대 관리 원칙의 쟁점 • 군사 시설·장비·인력의 철수: 13항 ㈀목 • 민정 경찰의 출입과 성격 • 비무장지대 관리 조사 기구: 군사정전위원회와 공동감시소조 • ‘디테일’의 함의

3 군사정전위원회의 정전협정 이행과 균열
1) 공동감시소조 구성과 축소
― 첫 군사정전위윈회 • 위반사건 조사 • 공동감시소조의 축소
2) 비무장지대의 위험물 제거와 비무장 회복
― 13항 ㈀목 이행을 위한 세부 방안 • 안전한 통로 정비
3) 물리적 경계선 만들기
― 경계선 표식물 규정 및 설치 • 표식물의 보수와 유지
4) 민정 경찰의 군사화
― 10항의 균열: 군사 경찰(MP) 사용 • “가장 위험한 관례”: 무장 인원의 임시 투입 • 휴대 무기와 완장 표식

제2장 1960년대 비무장지대의 무장화와 냉전 경관

1 비무장지대의 무장화(militarization)와 군사충돌
1) 정전 이후~1960년대 전반, 정전협정 위반의 양상과 북한의 요새화
― 비무장지대 위반사건의 양상과 점증 • 미군의 전술핵 배치와 북한의 ‘땅굴’ 건설 • 고지전과 갱도식 진지 구축 • 북한의 방위 전략과 북·중·소 관계 • 북한의 북베트남 지원과 ‘땅굴’ 기술 • 경계초소(GP)의 등장
2) 1960년대 후반, 북·미의 군사충돌과 오울렛 초소 사건
― 1966~1967년 북한의 공세와 존슨 대통령의 방한 •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의 유엔사 경계초소 • 1967년 4월 5일 오울렛 초소 사건 • 군사정전위원회의 사건 처리와 소집 주체 논쟁 • 공동감시소조의 조사와 그 한계 • 잊힌 오울렛 초소 사건
3) 베트남전과 비무장지대 장벽 건설
― 남한의 베트남전 추가 파병 • 미국의 비무장지대 충돌 억제와 유엔군사령부 존속 • 한미의 비무장지대 대침투체계 구축 • ‘베트남 17˚선과 비슷한’ 철책 설치

2 군사 생태(military ecology)의 양상과 형성
1) 1966~1968년 한미 공동 ‘비무장지대 인근 생물상 조사
― 비무장지대의 군사 생태 • 글로벌 환경주의의 시대 • 미국의 과학기술 원조 정책과 비무장지대 생태 연구 기획 • 장기 연구를 위한 예비조사와 네트워킹 • 미 공군의 지원: 과학과 안보 • 첫 생태 연구의 종결과 과제
2) 전염병 매개로서의 조류와 설치류 연구
― 철새의 이동경로와 질병 매개 연구 • 야생조수보호운동 • 한국형 유행성출혈열 연구
3) 초목 통제(vegetation control) 프로그램
― 벌목과 제초제 사용 • 1967년 고엽제 실험 • 1968년 불모지 장기화 작전

제3장 1970년대 비무장지대의 화해와 체제 경쟁

1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구상의 형성
1) 1950년대 북한의 군사분계선 통과 및 평화교류 제안
― 비무장지대 통과를 위한 첫 제안과 쟁점 부상 • 정전협정 제7, 8, 9항과 유엔사의 허가권 • 남북 교역지로서 개성과 철원 • 북한의 통일론과 동서독의 연방 제안
2) 데탕트와 남·북·미의 비무장지대 평화적 이용 구상
― 1970년 판문점 사건과 변화의 조짐 • 1971년 유엔사,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와 한국화 제안 • 북한의 제안 • 한국의 대응: 국토통일원의 비무장지대 공동개발 연구 • 동서독 정상회담의 영향 • 약함과 두려움: 심리전단과 확성기, 장벽 강화 • 군사분계선 표식물 관리 중지 • 중립국감독위원회의 비무장지대 비무장화 감독 제안 • 평화지대화 구상의 태동과 한계

2 ‘자유’와 ‘평화’의 ‘쇼윈도’ 경쟁
1) 대성동과 기정동의 탄생
― 정전회담장의 옆 마을 • ‘평화리’에서 ‘기정동’으로 • 비무장지대 마을의 존속과 주민의 출입 규정
2) 명명(命名)되는 ‘평화의 마을’과 ‘자유의 마을’
― ‘신해방지구 평화리’의 전후 복구와 선전 • “실제로 더 좋아 보이는” 평화리 • “버림받은 무릉도원” • “이상촌” 만들기: 마을 자치와 주택, 전기 • 평화리 주민과 경쟁하는 대성동 주민: 심성의 동원 • “효과적이지 않은” 쇼윈도 • 마을 자치의 현실과 이상 • 1963년 행정구역 및 국민 편입
3) 1971~1972년 대성동 개발과 ‘시범농촌 새마을’
― 1971년의 “낙후된 대성동” • “국력을 과시”하는 “자유대한의 대표적인 부락” • 정신계몽: 승공과 자조 • 시범농촌 새마을사업 • 닮아가기

종장
― 냉전과 탈냉전의 연쇄, 그리고 한반도 • 평화의 길 만들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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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옮긴이

한모니까 지음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조교수.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전쟁 전후(前後) ‘수복지구’의 체제 변동 과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과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을 지냈다. 『내일을 여는 역사』·『역사문제연구』·『역사와 현실』·『통일과 평화』 편집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과 남북 접경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분단과 냉전, 통일과 평화의 문제를 해명하는 연구를 하고 있으며, 평화통일문화공간 조성 자문위원과 ‘DMZ 평화지도’ 연구책임을 맡는 등 공공역사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과 수복지구』, 『한국전쟁기 남·북한의 점령정책과 전쟁의 유산』(공저), 『분단의 역사인식과 사유를 넘어』(공저), A History of Korea(공저), 『북한신문 연구 해제집』(공저), 『대한민국 평화기행』(공저) 등이 있다.
‘강만길연구지원금’(2011)과 ‘DMZ 평화상—학술상—’(2021)을 받았다.

편집자 100자평
비무장지대이지만 '비무장' 상태는 아닌, 우리 땅에 있지만 유엔군사령부의 관할 아래 있는, 그야말로 '역설'적인 공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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