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과 그의 시대 3
열정과 냉정 사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1922~1945)
발행일 | 2025년 8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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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4442394 94910 |
면수 | 800쪽 |
판형 | 신국판 152x225mm, 양장 |
가격 | 50,000원 |
소련, 미국, 중국을 넘나든 김규식의 20여 년 항일투쟁
그리고 파란만장 한국독립운동사의 빛과 그림자
해방 80년, 들리지 않았던 역사의 목소리에서 미래를 조망한다
마침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저술 부문을 두 차례 수상한(2006년 『한국전쟁』, 2015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독보적 한국현대사 연구자, 역사학자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를 출간한다. 1919년 단기필마 1인 외교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자주독립을 외치며 3‧1운동의 불씨가 됐고, 해방 전 임시정부에서 부주석을 역임했던 탁월한 독립운동가 김규식.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몇몇 화려한 일화들을 제외하면 해방 80년을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발굴되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이 책은 김규식의 일생을 관통하며 명징하게 드러나는 한 인간의 비극적 서사와 함께, 비록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을지언정 민족과 역사, 자주와 독립을 가슴속에 품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 한 인간의 진정성과 불꽃 같은 열정의 순간들을 온전히 살려내고자 하였다. 인물 평전이자 독립운동사 논픽션으로 김규식이 걸어간 시대의 한복판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이로써 ‘역사의 진정한 교훈’에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고자 했다. 스스로 ‘필생의 작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책에서 역사학자 정병준은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한국현대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 성과와 자료 발굴을 총망라했다.
3권은 1921년말부터 1945년까지에 이르는 김규식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다루었다. 1921~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온축과 정돈의 시기 이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1933년 도미 외교, 1935년 민족혁명당 참가, 중국 대학교수 생활, 1943~1945년 임시정부 부주석 등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된 김규식의 활동을 다룬 것이다. 김규식은 조직을 이끄는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1919년을 전후해서는 신규식 및 동제사, 여운형 및 신한청년당과 연계했고) 1920년대 초반에 소련 및 사회주의 운동 세력과 연계(특히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했고, 1930~1940년대에는 우여곡절 속에서 임시정부〔한국독립당(김구)과 민족혁명당(김원봉), 이 시기 김규식은 민혁당 소속〕와 연계하였으며, (앞 시기 중한호조사부터) 중한민중대동맹 등을 통해 중국 항일 세력과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다. 그렇기에 긴 시기의 다양한 활동, 조직, 인물들을 다루게 되었고, 사실상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사를 쓰게 된 셈이 되었다.
특히 제3권은 김규식뿐만 아니라 그를 이끈 시대, 시대정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뤘다. 이 시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김구·한독당·임정 중심, 김원봉·민혁당·조선의용대 중심,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중심의 설명 구도가 병립하는 기성의 연구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연합과 갈등, 중국국민당과의 연계, 그리고 세계정세와의 연동 등을 포괄하여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임시정부의 전체적이고 진실된 상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또한 1920년대 초반 김규식이 외교독립노선의 방향타를 소련(러시아)으로 돌리고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일들이나, 1930년대 초반 ‘문제적 인물’ 한길수(리한)에게 준 위임장과 그와의 관계 등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목받아야 할 사실들 역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3권에는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권 전체를 총괄하는 역사학자의 분투기,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와 4권을 예비하는 논문(「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글
1장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가와 모스크바 외교(1921~1922)
1 상해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형극의 여정
(1) 상해·천진·북경·장가구·고비사막·고륜·캬흐타·베르흐네우딘스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의 여정
(2) 고륜에서 마주한 이태준의 죽음과 사촌여동생 김은식
2 모스크바대회와 한국대표단장 김규식
(1)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2) 모스크바대회 주석단에 오른 한국대표단의 김규식·여운형
(3) 한국대표단장 김규식의 연설과 한국 문제 보고서
(4) 극동민족대회의 유산: 김규식-러시아 밀약설
3 모스크바에서의 분열: 외교교섭단, 상해파 고려공산당, 임시정부의 3각 외교전
(1)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외교교섭단 단장 김규식
(2)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임정의 모스크바 외교 3파전
(3) 레닌자금을 둘러싼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극한 대결
(4) 임정 특사단의 모스크바 외교전 참가와 김규식에 대한 악평
(5)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 중단 결정
2장 국민대표회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위원 김규식(1923)
1 국민대표회의의 동력: 한형권의 20만 루블
(1)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대결
(2) 레닌자금 20만 루블의 사용처
(3) 중한호조사와 교육사업의 김규식
2 국민대표회의의 경과: 창조파 정부 수립이라는 결말
(1) 국민대표회의의 개막과 참가자
(2) 창조파와 개조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
(3) 창조파의 ‘한’(韓) 정부, 국민위원회의 설립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몇 개월: 국민위원 김규식
(1) 정부가 아닌 혁명정당 ‘국민위원회’
(2) 국민위원회의 혁명정당 강령 초안
(3) 국민위원회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
(4) 국민위원회 총회와 종막
(5) 박용만 제명 미스터리
3장 생업에 돌아가 일상을 돌보다(1923~1932)
1 상해 남화학원·고등보수학원·삼일공학의 교육자(1923~1925)
2 상해 혜령영문교·복단대학 교수, 5·30운동, 북벌 참가(1922~1928)
(1) 혜령영문교·복단대학 교수
(2) 일본 경찰과 영국 경찰의 체포 시도
(3) 국민당 북벌 참가(1927)
3 천진에서의 일상(1928~1933)
4장 또 한 번의 도미 외교 시도(1933)
1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1932)
2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중한민중대동맹의 결성(1932)
(1) 한국 측 통일전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창립(1932. 11)
(2) 중한연대를 위한 중한민중대동맹의 결성(1932. 11)
3 김규식의 도미와 재미한인사회의 실정(1933)
(1)『원동정세』의 정세관
(2) 대공황기 재미한인사회의 실정
4 김규식의 미주 여정과 주요 활동: 분열을 품은 통일
(1) 캘리포니아에서의 일정: 중한동맹 지부 결성 실패와 대한독립당 조직(1933. 3. 10~1933. 5. 16)
(2) 중부·동부에서의 일정: 중한민중동맹·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의 결성(1933. 5. 17~1933. 7. 7)
(3) 하와이에서의 활동: 이용직·한길수와의 연결
5장 실의와 온축의 10년(1933~1942): 임시정부·민족혁명당 합류와 탈퇴, 사천대학 교수 시절
1 김규식의 임시정부 재합류(1933~1935)
2 1930년대 중국국민당정부의 후원과 임시정부·민족혁명당의 양립
3 민족혁명당의 결성, 김규식의 참여와 사직(1935)
(1) 대일전선통일동맹의 해체와 민족혁명당 결성
(2) 김규식의 민족혁명당 “사직”
4 온축의 사천대학 교수 시절(1935~1942)
(1) 영문학 교수 생활과 저술
(2) 화상마 찻집, 죽근탄 감귤원의 김우사
6장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결(1937~1942)
1 중일전쟁과 광복진선·민족전선의 분립(1937)
(1)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의 분립
(2) 기강7당회의·5당회의의 결렬
2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분립
(1)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북상
(2) 한국광복군의 창설
3 한독당·민혁당 통합 실패와 군대·의회·정부의 통일(1942)
(1) 중국국민당정부의 광복군·의용대 통합 결정
(2) 한독당과 민혁당의 통합 시도
(3)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확대 개편
7장 중경 임시정부의 김규식(1943~1945)
1 김원봉·민족혁명당과 한길수·재미한인사회의 연계(1941~1942)
(1) 김규식과 문제적 인물 한길수의 관계
(2) 김원봉과 한길수·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연계
2 신탁통치 문제의 대두와 한독당·민혁당의 갈등(1943)
(1) 한반도 신탁통치론의 대두와 국제공관·국제공영·국제감호설(1942~1943)
(2) 1943년 카이로회담·카이로선언의 이중적 의미
(3) 광복군 행동준승 9개조와 중국정부 지원금의 연계
(4) 중국지원금을 둘러싼 갈등: ‘암살단 사건’과 ‘공금횡령’의 대결
(5) 갈등의 안팎: 생계 문제와 정치 갈등, 중국 지원통로의 불통일
3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1944)
4 중경과 미주의 연계·갈등·분열(1941~1945)
(1) 의정원의 갈등: 헌법 개정, 한독당의 분열, 국무위원 선임(1944)
(2) “민족통일전선적 정부”의 부주석 김규식
5 임시정부의 외교·군사·통일·연대(1945)
(1) 외교: 김규식의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 시도와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파란
(2) 군사: 행동준승 9개조 철폐와 광복군-OSS의 공동작전
(3) 중경 내 정당 통일 시도: 5당통일회의와 독립운동자대표대회
(4)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독립동맹, 만주빨치산의 연락·연대 시도
8장 해방과 귀국의 길
1 중경에서 맞은 해방의 날
2 33년 만의 귀국길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
1 가계, 유년기, 도미 유학
(1) 미국 내셔널아카이브의 현대사 자료로부터 출발한 여정
(2) 홍천 후손들의 증언, 가계, 부친 김용원
(3) 언더우드 고아원학교
(4)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김규식 사진들
(5) 김규식의 신분과 신분의식
(6) 도미 유학, 의화군과의 관계
(7) 로녹대학의 기록들이 이야기하는 김규식의 대학 시절
(8) 호주로 인삼 팔러 간다며 여권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다
2 3·1운동,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구미위원부,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국민대표회의
(1) 영국에서의 자료 조사: 김규식이 인도양 콜롬보에서 쓴 편지
(2) 미국에서의 자료 조사: 토머스호 밀항 실패가 남긴 기록
(3) 여운형이 윌슨 대통령에게 쓴 청원서 편지를 찾다
(4) 파리강화회의의 김규식: 무명의 청년에서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나다
(5) 공채표 세일즈맨 김규식의 뇌수술
(6) 김규식과 여운형의 관계
(7) 김규식과 신규식, 동제사의 관계
(8) 일본에서의 자료 조사: 최정익 미스터리, 박용만 미스터리
(9) 임정과 김규식의 1차 결별: 극동민족대회
(10) 극한까지 밀고 간 국민대표회의
3 1930~1940년대 중국 시절
(1) 1932년 중한민중동맹단, 1933년 도미 외교, 한길수와의 만남
(2) 1935년 민족혁명당 참가와 탈당: 행간으로 읽은 인간관계
(3) 사천대학 교수 시절
(4) 1943년 임시정부 복귀
(5) 임시정부와 미주의 관계
(6) 카이로선언, 국제공관론과 반탁운동
(7) 해방과 귀국
4 해방 이후 김규식
부록: 「한국독립당의 정강 급 쁘로그람」의 성립 과정, 국민위원회 집무규정, 한국독립당 조직안
부록 논문: 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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