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외사

설흔

발행일 2015년 5월 18일
ISBN 9788971996621 03810
면수 236쪽
판형 변형판 140x210, 소프트커버
가격 13,000원
한 줄 소개
순정한 문체를 오염시킨 주범으로 지목된 연암 박지원과 그의 대표작 . 정조의 문체반정을 따를 것인가, 작가의 시대적 소임을 다할 것인가.
주요 내용

“요즈음 문풍文風이 문란해진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이니, 

그는 법망을 빠져나간 거물이다.”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다는 정조.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책에 이어 당파의 세력 균형을 위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물론 문체반정이 세력 균형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는 후대의 것이다. 정조의 복심을 알 길 없던 당대 문인들에게 정조의 문체반정은 어쩌면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행한 문자옥(文字獄)에 비견되는 공포였을 수도 있다. 정조는 경연 자리에서 연암 박지원을 지목하며 문체를 문란하게 만든 주범이라 말했고, 이런 정황을 남공철이 편지에 기록해서 연암에게 보냈다. 이 소설은 남공철의 편지가 안의현 현감으로 있는 연암에게 도착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소설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청장관전서』, 『과정록』, 『조선왕조실록』 등 당대의 관련 기록들을 세심하게 읽은 바탕 위에 집필되었고, 사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을 더했다. 누가 이 소설을 허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인문소설’이라 칭하는 이유다. 이 책을 통해 문체반정이 일어난 18세기 조선으로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정조의 문체반정과 연암 박지원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가 당대에 유행한 소품체 문장들을 일소하고 순정한 고문(古文)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 책과 사상, 문장에 대한 탄압은 정조의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둘째, 남인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연암 박지원을 볼모로 삼은 정치적 노림수였다는 주장이다. 현재는 정조의 보수적인 면보다는 좀 더 정략적인 면으로 문체반정을 평가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정조는 연암 박지원을 정조준했다.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을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하게 해야 한다.   /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 「남 직각 공철에게 답함. 부(附) 원서(原書)」

 

이 소설의 시초가 된 남공철의 편지는 이러한 상황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위 글은 경연의 자리에서 정조가 남공철에게 한 말이다. 정조가 연암의 『열하일기』를 ‘익히’ 보았다는 점에 주의를 요한다. 변변찮은 벼슬 한번 한 일 없는 일개 선비의 여행기를 국왕이 친히 보았음을 경연의 자리에서 밝힌 것이다. 주지하듯 연암은 1780년 건륭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으로 전인미답의 열하 지방을 다녀온 후 『열하일기』라는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겼다.

정조는 치밀했다. 남공철에게 지금의 말을 그대로 편지에 적어 안의현으로 보내라고 하교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일개 문인, 그것도 나이 오십이 넘어 겨우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한 연암에게 정면으로 말을 건 것이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아든 연암은 어쩌면 살이 떨리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작가 설흔은 이 공포를 ‘카이카이’(開開)라고 표현한다. 카이카이는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다. 『열하일기』에서 황제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중국 관리들이 카이카이될 것을 두려워하며 울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이때의 연암의 마음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남자는 임금의 명을 담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은 후 봉투에 다시 넣었다. 순간 머릿속 피가 죄다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지럼증이 재빨리 다가와 주먹으로 남자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순간적인 충격에 머리를 주무른 후 술병을 기울였지만 나오는 건 몇 방울의 술뿐이었다. 남자는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편지를 받았으니 답장을 쓰는 게 예의일 것이다. 벗이 쓰라는 글, 그러니까 임금이 받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바른 글도 선물처럼 덧붙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피가 채워지지 않은 남자의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붓만 들면 문장이 절로 흘러나와 홀린 듯 종이를 적시곤 하던 남자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물론 드문 일이기는 하나 한 번도 없던 일은 아니었다. 글 쓰는 이들 대개가 그렇겠지만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남자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역시 하나밖에는 없었다. 글이 스스로 굴을 파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기는 하나 아무리 급하더라도 마음이 담기지도 않은 글을 글이라고 써서 보낼 수는 없었다. 자존심 대신 글을 이마에 붙이고 산 게 남자의 인생이었으므로.   /   이 책, 16면

 

연암이 이후에 자송문을 따로 지어 바쳤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과정록』에는 “예전에 지은 글 몇 편과 안의에 와서 지은 글 몇 편을 뽑아 서너 권의 책자로 만들어 두었다가 임금이 또다시 글을 지어 올리라는 분부를 내리면 그때에 가서 분부를 받들어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연암의 생각이 담겨 있다.

따로 연암이 자송문이라고 명명하진 않았지만, 「남 직각 공철에게 답함」이라는 편지의 수신인은 사실상 정조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에는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한 자기반성과 자기변명이 고문의 유려한 문장으로 적혀 있다. 연암은 자신의 글 『열하일기』를 ‘글방의 버려진 책’이라고 지칭하며, 중년 이래 불우하게 지낸 자신의 처지와 게으르고 산만한 본성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고 반성했다. 이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안의현감에 이어 면천군수, 양양부사를 역임했으니, 어찌 보면 정조가 그를 특별히 아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열하일기』를 둘러싼 조선 사회의 내면풍경

 

연암 박지원이 연행에서 돌아온 후, 정식 판본으로 채 정리되지 않은 초고본 『열하일기』는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심지어 한글 번역본도 등장했다. 이미 『열하일기』는 조선 사회에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었다. 『열하일기』는 오랑캐의 연호를 쓰는 원고라는 무수한 비난과 함께 창신(創新)에 목말라 있던 조선 문단에는 열광의 대상이었다.

 

중국에 다녀온 이후 그 견문한 사실 가운데 자못 기록할 만한 것이 있어서 연암골에 왕래할 때 늘 붓과 벼루를 가지고 다니며 행장(行裝) 속에 든 초고를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나갔다. 늙어 한가해지면 심심풀이 삼아 읽을까 해서였다. 그리하여 쓴 글을 수습해 몇 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애초 후세에 전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남들을 따라 이 책을 헐뜯고 비방하는 자들이야 난들 어떡하겠느냐?   /   『과정록』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장은 이미 연암이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킬 때 연암을 지목해 법망을 빠져나간 거물 운운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근신(近臣)이면서 연암의 친우(親友)이기도 한 남공철을 이용했다. 정조가 연암 한 명을 내리누름으로써 얻는 효과가 컸을 것이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인 남공철이 보내온 편지도 바로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설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벗들과의 『열하일기』 낭독회 장면은 『열하일기』를 대하는 연암 주변 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대 조선 사회에서 연암 벗들의 위치는 미미했지만, 훗날 이들의 글은 바로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설흔은 이 소설을 통해 정조의 문체반정 아래서 느꼈을 문장가 연암의 고뇌와 연암의 벗들에게 닥친 문체반정의 파장 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문장가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연암이 서슬 퍼런 임금의 정책 아래서 느꼈을 갈등의 지점을 면밀히 살폈다. 그간 정조의 문체반정은 정치적인 역학 구조로만 보았지, 실상 당대 문인들이 느꼈을 충격, 특히 연암과 같은 거물 문인이 느꼈을 고심처에 대해서는 인색한 것이 사실이었다.

작가는 이를 위해 『연암집』을 비롯해 박종채의 『과정록』, 박제가의 『정유각집』,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서구의 『척재집』, 남공철의 『금릉집』, 그리고 관찬 사료인 『조선왕조실록』과 『홍재전서』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조선 사회의 『열하일기』의 영향을 알 수 있는 모든 기록을 면밀하게 읽어내고, 그 속에서 이 소설의 큰 줄거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에서 다 보여줄 수 없는 빈틈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웠다.

작가는 문집의 글과 『열하일기』의 글들을 직접인용문 형태로 그대로 가져왔으며, 대화 속에서 구사되는 말들도 상당 부분 역사 기록을 빌려왔다. 「일야구도하기」, 「호곡장」, 「상기」 등 『열하일기』에서 꼽는 명장면이 곳곳에 담겨 있어 『열하일기』를 읽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한다.

연암의 『열하일기』, 정조의 문체반정과 관련한 소설로서 대표적인 것은 김탁환의 『열하광인』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열하일기』를 둘러싼 가상의 연쇄 살인과 암투를 내용으로 하는 추리소설이다. 『열하일기 외사』는 가상보다는 실제의 역사 기록에 근거하는 내용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독자는 『열하일기』를 둘러싸고 펼쳐진 정조의 문체반정과 당대 문인들의 면면을 다양한 기록을 통해 순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여타의 역사소설과 구분하여 ‘인문소설’이라 칭하는 이유이다.

 

장면 ❶ 남공철이 보내온 편지

 

한 자가 넘는 눈이 내렸습니다. 추위도 함께 찾아와 가죽옷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 선생이 계신 안의현의 상황을 잘 모르니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   이 책, 11면

 

이 소설은 남공철이 연암에게 보내온 편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울의 폭설, 멀리 있는 연암에 대한 안부 등 정겨운 내용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는 서슬 퍼런 정조의 하교가 담겨 있었다. 죄,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 세상에 유행한 문체, 결자해지 등 비수와도 같은 정조의 말을 연암에게 전했다. 또한 서둘러서 두어 달 내로 영남 산수기 한두 권을 지어서 바칠 것을 권했다. 그만큼 정조의 명은 지엄했다.

남공철은 연암의 글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글벗이었다. 어릴 적부터 연암을 따랐던 남공철은 소품체 글을 썼다 하여 정조에게 벌을 받았다. 남공철이 연암에게 편지를 보내온 시점은 대략 1793년경, 연암이 안의현의 현감으로 있던 시기이다. 소설은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이후 직접 안의현으로 내려와 임금의 뜻을 전하고, 이후 연암이 다시 벗에게 답장을 보낼 것을 생각하며 고뇌하는 모습을 순서대로 담고 있다.

 

장면 ❷ 벗들과의 『열하일기』 낭독회

 

햇빛처럼 쨍쨍하게 달이 비추는 밤이었다. 바람 소리가 묵직한 벽오동을 부드럽게 흔드는 밤이었다. 술도 흡족할 정도로 마신 밤이었다. 달과 바람과 술의 기운의 오묘한 조합 때문일까, 얼마 전에 초고를 마무리 지은 『열하일기』는 남자 스스로 보기에도 꽤 만족스러웠다. 박남수만 제외한다면 벗들도 글이 가져온 이국 정경의 흥취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얼마 전부터 제각각의 생활이 바빠진 탓에 만남이 전보다 뜸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것이 분명한 벗들의 작은 기쁨을 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반대로 그 기쁨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낭독을 멈춘 이유였다. 남자는 박제가의 얼굴이 기다림에 지쳐 일그러지기 직전의 순간을 날카롭게 낚아채 다시 낭독을 시작했다.   /   이 책, 19~20면

 

이 장면은 연암이 이덕무, 박제가를 비롯해 젊은 벗인 남공철과 박남수 등에게 『열하일기』를 읽어주고 이 자리에서 박남수가 촛불로 『열하일기』를 불태우려 했던 실제 사건을 쓴 것이다.

연암의 벗들은 『열하일기』에 환호했다. 남공철은 『열하일기』가 있어 연암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라 치하했고, 유득공은 『열하일기』의 서문을 써서 연암을 장자(莊子)에 빗대며 그 뛰어남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연암의 일가붙이인 박남수만은 연암의 글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한마디로 패관소품이라는 것이다. 『열하일기』를 요물이라 칭하며 촛불로 불사르려 했던 박남수의 행동을 저지한 이가 남공철이다. 『과정록』에서 박종채는 연암 당시 『열하일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썼다.

 

『열하일기』의 독자들은 이 책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대개 기이한 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써놓은 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비록 자신이 이 책의 애독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책의 진수를 깊이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다. (…) 아아, 이들이 어찌 우리 아버지를 제대로 알았다 하겠는가! 나는 이를 비통하게 생각한다.

 

장면 ❸ 별종 이덕무와 박제가가 그립다

서울에 한 자가 넘는 눈이 내렸다는 벗의 편지는 안의현에도 눈을 몰고 왔다. 그 눈이 미처 그치기도 전에 이제 편지의 당사자인 남공철이 직접 내려왔다. 임금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남공철이 연암과 대면하는 장면은 남공철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정조와 연암이 대면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열하일기』에는 당대 조선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글들이 많다. 작가는 정조가 『열하일기』에서 지적했을 법한 문제의 글들을 이 책에서 정리했다. 정조의 대리인인 남공철은 정조가 지적한 문제의 대목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연암 또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하지만 젊은 벗은 연암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견해 없이 오직 정조의 말을 전하는 데에만 충실할 따름이다. 이러한 남공철의 태도는 이덕무나 박제가가 연암의 글에 보인 애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덕무가 그리웠다. 비굴함 속에 숨어 있는 애정이 진심으로 그리웠다. 남자는 어떠한가? 또 다른 벗이 남자 앞에 있었다. 한때 자신과 글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벗이었다. 그런데도 그 벗에게서는 애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의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서안에서 『열하일기』를 꺼냈다. 벗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원고를 펼치면서 벗을 바라보았다. 벗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헛기침을 한 후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큰 소리로 읽어 나갔다.   /   이 책, 157~158면

 

남공철이 다녀간 후 이덕무의 부고를 알리는 박제가의 편지가 도착한다. 박제가는 자신의 글 마지막에 짤막하게 두 문장을 썼을 뿐이다.

 

우리의 벗 형암(이덕무)이 죽었습니다. 죽는 그날까지 자송문을 쓰다 죽었다 합니다.   /   이 책, 212면

 

부교리 이동직이 정조의 문체반정에 항의하며 이가환은 왜 벌을 내리지 않느냐 물었을 때, 임금은 이가환에 대해 시골에서 궁벽하게 살다 임금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므로 세도가의 너희들과는 분명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아울러 박제가와 이덕무에 대해서도 초목과 더불어 똑같이 썩어가는 서얼이라 지칭하며,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받아들여 양지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서얼을 별종 취급한 것이다. 서얼 이덕무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정조에게 바칠 자송문을 쓰다 죽었다. 박제가의 짧은 두 문장에 별종의 아픔과 분노가 서려 있다.

연암은 눈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연암은 자신의 글이 임금에게 그리고 당대 조선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임금의 명령을 흔쾌히 따를 수 없다. 평생 문장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온 그였기 때문이다. 이런 연암 앞에 「환희기」 속의 요술쟁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조언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두 눈을 감으십시오.”

차례

서문 『열하일기』를 읽는 또 다른 방법

1장 벗에게서 온 편지
2장 편지가 오게 된 곡절
3장 벗과의 재회
4장 벗에게 쓰는 편지

미주
참고문헌

지은이·옮긴이

설흔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공저), 『소년, 아란타로 가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우정 지속의 법칙』 등이 있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로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수상했다.

편집자 100자평
작가 설흔은 이 소설을 통해 정조의 문체반정 아래서 느꼈을 문장가 연암의 고뇌와 연암의 벗들에게 닥친 문체반정의 파장 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문장가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연암이 서슬 퍼런 임금의 명령 아래서 느꼈을 갈등의 지점을 면밀히 살폈다.
독자 의견
번호 도서 제목 댓글 글쓴이 작성일
1 열하일기 외사 – 설흔 지음 / 돌베개
조통 2015.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