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 유몽인, 최익현 외 지음 / 전송열 엮고 옮김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7.2.28 | 목록
발행일 2016년 7월 25일 | 면수 372쪽 | 판형 변형판 153x215 | 장정 소프트커버 | 가격 18,000원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 유몽인, 최익현 외 지음 / 돌베개

조선 팔도 명산 20곳을 유람한 유람기를 엄선해서 그 내용을 한글로 다시 옮겨 쓴 책.

글을 엮은 순서는 집필 시점부터 계절별로 차례대로 배치해서 계절을 따라 읽어 갈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뭐 해당 산이야 다들 알만한 산인데…

나 또한 무지하게 게으른 탓에, 남북으로 갈린 탓에 못 가본 산들도 몇 곳이 있다.

그 기억들을 더듬으며, 글속의 장소를 이리저리 생각하며 산행을 따라다니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산행기라고 해야 할지 유람기라고 해야 할지는 원행의 목적에 따라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나,

늘 원행의 길을 나설 때는 몸종을 대동하고, 피리 부는 악사를 불러서 앞장세우고 가마와 말을 준비해서 명산을 등지고 앉아 있는 절들의 중들을 불러서 때론 길잡이로, 때론 가마꾼으로, 법당을 숙소로 사용하는 글들이 많은 것을 보면 당시 선비들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의 척불숭유라는 말이 뭔 말인지 한방에 시원하게 이해시켜준다.

한반도에 정착한 불교는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조선으로 들어가면서 조선이 정치적 이념으로 유학을 기본으로 한 성리학을 선택하고 부패했던(조선의 시각) 불교를 정치 일선에서 배척함으로써 도시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큰 변화를 겪었다.

덕분에 조선시대는 고관대작은 물론 양반들과 유생들이 사찰에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차원의 공공사업에 늘 기본적으로 동원되었으며(불법을 공부한 글쟁이에다가 엄격한 계율로 통제도 잘 되었기에….) 전쟁 시에는 승군으로도 활용되는 조금은 어정쩡한 위치였기에…

아무튼 어느 특정 시점을 계기로 한반도의 산들은 숭배와 경외의 대상에서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의 대상으로, 그리고 유람의 대상으로 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도 늘어나고 과학의 발달로 산속의 맹수들과 이론으로 설명이 잘 안 되는 기타 기괴한 사건들을 이성으로 설명이 가능한 시점이 경배에서 유람으로 변경되는 시점이었으리라 유추된다.

덕분에 조선 선비들은 등정, 등반이라는 개념보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산에서 공자를 뒤따르며 성리학적 요소를 찾아내고 시적 요소를 끌어다 붙여서 예악을 즐기는 유람이 되었다.

그러다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하였고, 땔감으로 모든 나무들에 베어 나간 뒤 최근 5~60여 년 사이에 많이 푸르러지고 그 모양새를 갖추자 세상은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을 산으로 몰아붙여 최근에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산에 오르고 있다.

물론 그 산행에는 IMF와 정리해고라는 특수한 상황은 50세가 넘으면 모두들 평일 낮에 도봉산에서 만나기 때문에 별도로 동창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웃지 못할 말들도 만들어 낸 아픈 기억들도 갖고 있다.

물론 이 또한 아직 진행형인듯하고….

언제 봐야지… 하고 있다가….

내가 소속된 산악회에서는 매년 회지를 발간하는데, 금년부터는 산과 관련된 책들을 소개 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아서 얼른 꺼내서 급히 읽은 책 되겠다.

흠흠 내가 언제 이렇게 공식적으로 원고 청탁을 받은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ㅎㅎ

덕분에 한 일주일 동안 신나게 조선시대 한반도의 산을 잘 돌아봤다~

조선 선비들의 산행 스타일 중 주요한 사항들을 좀 따오자면 아래와 같다.

*****

_ 의외로 산수유람 글들이 제법 많이 남아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_ 금강산 유람은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소원일 정도로 명산을 유람하는 것은 사회적, 신분적 제약이 심했고 비용 또한 만만하지 않아서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_ 고관대작들이 산행을 나서면 산속의 승려들 수십 명이 가마를 들고 달려 나와 가파르고 험준한 길들을 가마를 타고 오르고, 오솔길 등으로 가마가 오르기 어려우면 빈 가마를 들고 가거나 험한 곳은 매달아서 먼저 올려 보내고 다시 평지가 나오면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천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벼랑을 오를 때에 가마가 마치 허공에 매어 달린 듯한 느낌이 들어 몸을 거의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어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올라가는 일도 빈번했고, 길이 미끄러워 가마를 맨 승려들이 열 걸음에 한 번씩은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늙은 승려에게는 곁에서 돕게 하고, 젊은 승려에게는 뒤에서 붙잡게 하면서 나가게 하면서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외진 곳에 위치한 절이면서 승려가 얼마 없는 절에서는 벼슬아치들이 오면 음식을 대접하고 가마를 메야만 하는 고통이 따랐으니 그곳 절의 승려들은 서로가 무리를 지어 숨어버리기도 하고, 또 함께 피해 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오대산 월정사를 오를 때 만난 양식을 구하러 가던 한 무리의 승려들은 가마를 멜 생각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모두 몰래 달아나버리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와서 절에 기거하면서 쌀이 떨어질 경우 승려들을 민가에 보내 쌀을 구해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최대로 동원된 승려의 숫자는 이인상의 ‘유태백산기’에 두 대의 가마를 정돈시키고 승려 90명을 선발한 일. 그는 때로는 끈으로 가마의 앞뒤를 묶고 골짜기에 줄을 매어서 매달리듯이 나아가기도 했다고 씀.

_ 산수의 묘사가 정밀하다기보다는 시청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글이 많다.

_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큰 바위, 미친 듯 내달리는 시냇물과 깜짝 놀랄 만한 폭포가 모두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 모양들이 달리는 듯, 머무르는 듯, 싸우는 듯, 절하는 듯,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 봉황이 춤을 추고 난새가 나는 듯했다. 또 그 가운데는 금이나 옥을 치는 듯한 소리와 거문고를 켜는 듯한 소리도 들려와 보는 눈을 압도하고 듣는 귀를 울려대며, 마치 천지가 개벽할 무렵에 조물주가 막 재주를 부리는 장면을 보는 듯했다."

_ "나는 일찍이 미수 허목 선생이 83세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그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그를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저자인 채제공은 현종 대에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과 근력을 비교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채제공은 당시의 허목보다 16살이나 적은 나이인데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저자인 채제공은 자신도 83세까지 산다면 비록 업혀서 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오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다. 하지만 채제공은 아깝게도 79세에 졸하고 말았으니 소원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_ "저기가 김생굴이고, 저기가 치원대이며, 이 뒤로는 원효사가 있고 서쪽에는 의상봉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 산에 이 네 명의 성인이 살면서 서로 학문의 벗을 맺고는 오고 가면서 이곳을 유람하며 쉬었다고 합니다."라고 한 승려가 자욱한 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노학자 주세붕은 대답하기를

"원효는 신라 중엽의 승려이고, 김생과 의상도 다 신라시대에 났으나 세대가 다르다. 이 네 사람 중 가장 뒤에 태어난 사람은 고운 최치원으로 신라 말기에 살았거늘 어떻게 나머지 세 사람과 만나서 놀았단 말인가? 그대는 어리석은 말로 나를 속이려고 들지 마라."라고 일침을 놓는다.

또 주세붕은 치원암에 찾아가 최치원이 마셨다고 하는 총명수는 최치원이 이미 열두 살에 당나라에 들어갔기 때문에 어찌 이 물을 마시고 총기를 길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라고 쓴다.

_ 책에 나온 대부분의 선비들을 산을 유람하는 기본 장비에 가마와 말에 술과 책을 싣고 다녔다. 물론 혼자 간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좋은 벗들과 함께 하면서 멋진 곳 혹은 산의 정상이나 이름난 봉우리와 대에서는 술 석 잔과 시 일곱 편은 기본이었다.

_ 의외로 유명한 산을 접하는 기회는 극명하게 두 가지, 벼슬을 하러 가거나 오던 중이 아니면 귀양이었다. 물론 귀양의 경우에는 대부분 임금의 성은을 입어서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유람하고 남긴 글이 대부분.

_ 옛날부터 백두산에 온 사람은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에야 산에 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구름과 안개와 비바람이 어지럽게 하여 생각한 대로 끝까지 다 구경하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_ 김창흡은 불과 21세 때 금강산 및 동해를 유람하고 쓴 글 ‘동유기’가 있고 글의 대부분은 금강산 유람 기록이다. 1671년 8월 11일에 경성을 출발하여 9월 11일 다시 경성에 돌아오기까지 꼬박 한 달 간 유람하면서 마치 일기처럼 매일 날짜를 기록하며 꼼꼼하게 썼다.

_ 덕유산 서쪽 외진 곳을 따라 수백 보를 올라가 향적암에 이르면 가운데에 쌓은 돌 제단과 같았으니 곧 암자의 터였다. 도끼에 찍힌 나무가 있는데, 그 가득한 뿌리가 한 아름이나 되었다. 암자가 없어진 것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남쪽에는 돌샘이 있어서 맑은 물이 나오고 서쪽에는 향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덕유산 향적봉이란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에는 판잣집이 몇 채 있는데, 창문과 벽이 아직도 온전했다. 향나무 숲 속에는 옛 우물이 있는데, 둥근 돌로 꾸며 놓았다. 옛날 그 암자가 있을 때 팠던 것이 틀림없다.

_ 옛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주된 목적 중의 하나는 수양이었다.

_ 김창흡은 우통수를 찾아갔다. 그는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색깔도 깨끗해 다른 여러 샘물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고 하며 맛은 일반적으로 달고 향기로웠다고 하고, 세상에서는 한강물이 이 우통수에서 발원한다고 일컬으니 애당초 어느 물은 취하고 어느 물은 버리려는 생각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샘들이 같이 쏟아지는데 어떻게 참으로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며 한탄하기도 했다.

_ 김창흡은 오대산을 바라보며 4가지 장점을 논했다. 중후해서 덕이 있는 군자와 같으며, 하늘에 닿을 듯한 거목들이 많아 속인이 드물게 온다는 장점, 암자가 절 깊숙한 곳에 있어 승려들이 어느 곳에서라도 하안거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샘물 맛이 다른 산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좋다는 것 덕분에 마땅히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했다.

_ 겹겹 바위에 쏟아지는 물 뭇 산봉우리를 울려 대니 / 지척 간인데도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네, / 아마도 세상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들릴까 하여 / 일부러 물을 흘려 온 산을 다 가두려고 하나 보다. – 가야산의 어느 폭포 골짜기에 각인된 최치원의 시

*****

지금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혹은 자기 차로 북한산 입구에 도착해서 도선사까지 신도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듯 마찬가지로 옛 선인들은 가마와 말을 타고 어프로치 했으며,

다리에 기운이 달려서 오르지 못할 때는 케이블카나 헬리콥터 혹은 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14좌를 돌아보듯 심산의 사찰 승려들이 제공(?) 하는 가마를 타고 올랐으며,

지금 정상에서 마시는 한 잔의 막걸리를 마시듯 옛 선비들도 명소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나 지금이나 벼슬을 받아 관직에 나가거나, 죄를 지어 귀양을 가면서 오르는 산이라고 하듯 매번 좋은 벗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공부와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오른 다는 것이 좀 아쉽긴 하다.

예전의 선비들이 공자와 유학을 산에서 구하듯, 지금은 참된 정의와 민주를 찾으면 될 것을…

생각 없이 오르는 일은 없어야 할듯하다.

물론 생각 없이 살면 더 안 되겠지만~ ^^*

그리고…

1984년 7월인가 8월인가….

설악산에서 내가 했던 생각 그대로가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의 글에 있어 옮겨 온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면서 열 번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이렇게 힘들게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얼굴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다리는 시큰거리면서 발은 부르텄다.

이것이 만일 사람에게 부림을 당해서 억지로 하는 일이라면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을 아무리 꾸짖고 금한다 하더라도 그만두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길을 가며 함께 쉴 때는 웃음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두류암으로 들어갔다.

3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는 정말 집에 가고 싶었다…..ㅠ.ㅠ

하지만 그 때 그 벗들과 지금도 산을 중심으로 인연이 되어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 유몽인, 최익현 외 지음 / 전송열 엮고 옮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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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편의 조선선비의 글을 통해 옛 선비들이 우리 산수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과 산수를 유람하며 어떤 즐거움을 찾았는지를 찾아보고 그저 유람한다기 보다는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다녔던 산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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