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 – 최완수 외 지음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7.2.28 | 목록
최완수 지음
발행일 1979년 1월 1일 |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 – 최완수 외 지음 / 돌베개

부제 : 예술과 예술가들

정선이 진경시대의 진경산수화를 통해서 조선의 회화사를 완성시켰다면, 진경산수화의 보존은 간송 전형필이,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다시 우뚝 세운 곳은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 관장은 최완수 관장..

그 최완수 관장과 5명(김기홍, 오주석, 유봉학, 강관식, 방병선)의 학자들이 「예술과 예술가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논문을 엮어서 책으로 낸 것.

『진경시대 1권』이 시대와 시와 사상 그리고 종교와 경제의 변천을 알아보며 시대적 배경을 연구했다고 하면 『진경시대 2권』은 정선과 심사정, 김홍도를 통한 풍속화와 초상화 그리고 조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백자에 대해서 알아본다.

조선 후기의 문화사에서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선생의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 문화재 지킴이의 완성판.

그 간송미술관을 중심으로 진경시대를 알아본 두 권의 『진경시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결코 얕지 않게 들여다보면서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두세 번은 필독해야 할 서적.

지금 살아있으면 그 누구보다도 우리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쉽고 친근하게 풀어서 다시 써줄 故오주석 선생의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 글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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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조선의 성리학파들은 본래 명에서 주자학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은 데 반해 조선에서의 발전에 긍지를 갖고 자신들이 주자학의 적파 정통임을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제 한족의 명이 여진족 청에게 멸망당하자 중화문화가 중국대륙에서 소멸한 것으로 보고 중화문화의 여맥을 조선이 계승한다는 포부와 자세를 자임하게 된다.

이는 야만족 청에게 무력으로 굴복당한 수치와 절망에 대한 심리적 치유에 더없는 묘방이었다.

_ 겸재는 숙종 2년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탄생. 지금 경복중고등학교와 청운중고등학교가 있는 청운동 89번지 일대의 백악산 서쪽 아랫동네

겸재라는 호는 30대 이후에 쓰던 것으로 주역에 능통한 그가 "주역" 권 6 겸쾌의 "겸손은 형통하니 군자가 끝이 있으리라"는 괘사에서 취해서 스스로 겸손하기를 다짐하는 의미로 택한 것일 듯하다.

겸재의 증조부 창문이 문학재망으로 일시에 이름을 떨쳤으나 벼슬을 사양하다 40세로 선교립의 품계만 받은 채 돌아가자 겸재의 직계 집안은 이후 차츰 영락하게 된다.

외조모 남양 홍씨는 퇴계 이황의 손자 이안도의 둘째 딸. 겸재는 외가를 통해 퇴계의 혈통을 이어받음.

남인이 정권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어 이후 200년 동안은 율곡학파인 서인 즉 조선성리학파가 정권을 유지해 나간다. 겸재로서는 이 갑술환국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를 일이었다.

이에 겸재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내게 되는 큰외숙 박견성의 후원 아래 그 외사촌 형제들과 삼연 김창흡, 농암 김창협 형제의 문하에 드나들며 하계수련에 열중한다.

삼연을 중심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진경시문학이 크게 일어나니 그를 추종하던 이들이 대개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의 순화방에 세거하던 서인의 자제들이었다.

그래서 이를 백악사단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데 겸재는 바로 백악사단 출신이었다.

_ 성리학 이념 아래서 경세의 학문이 아닌 그림 그리기 같은 기예는 대개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화원은 양반이 기피하는 중인들의 전문직종이었으며 그 벼슬도 가장 높아야 종6품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도는 예사 화원이 아니었다.

정조는 30명이었던 화원 가운데서 더욱 뛰어난 10명을 따로 규장각에 소속시켜 각별히 우대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김홍도는 정조 연간에 이 규장각 화원의 정수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홍도는 이미 약관의 21세의 나이에 정치적으로 지극히 의미 깊었던 <경현당수작도>라는 작품을 그렸으며 29세, 37세, 47세 세 차례에 걸쳐서 나라의 화역 가운데 가장 중차대한 임무인 국왕의 초상화 제작에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44세 때는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금강산 절경을 그려 와서 수십 미터가 넘는 대작을 완성, 진상하였으며, 46세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원 용주사의 후불탱을 주관해서 완성시켰다.

화원 조직의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서 따로 임금을 지척에서 모셨으며 국왕이 요구하는 특별한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이다.

쟁쟁한 실력을 가진 오래고 새로운 가문의 화가들이 넘쳐나던 시대에 김홍도가 유난히 두각ㅇ르 드러내게 된 배경으로, 일찍이 7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명문 사대부 강세황에게 나아가서 서화 공부를 하였던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강세황은 그 자신의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것은 물론, 서화에 대한 평론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서 동시대의 작품 중에 그의 화평이 적히지 않은 작가가 없었다고 할 정도다.

김홍도가 어떤 인물이었는가 하는 점은 그의 이름, 자 호에서도 일부 시사되고 있다. 먼저 이름 ‘홍도’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도를 넓힌다는 뜻. 홍도는 논어 위령공편에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능히 도를 크게 하지 도가 사람을 크게 함이 아니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김홍도의 호로 가장 유명한 단원은 명나라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1757~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단로나 단옹이라는 호는 모두 단원을 응용한 노년의 호다.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가 이유방의 호를 이끌어 쓴 것은 이유방이 "문사로서 고상하고 맑으며, 그림의 됨됨이 기이하고 아취 있음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_ 도담삼봉은 조선 왕조 개창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이 이곳에서 출생해서 그 호를 삼봉이라 하였다.

_ 17세기 전반 임진란의 피해가 채 아물기 전에 발발한 병자호란은 자기 제작의 제반 요소에 타격을 가하여 조선의 도자문화가 일대 퇴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실 자기를 전담 제작하는 사옹원 분원의 운영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으며 중국과의 배타적, 폐쇄적 관계와 국내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국에서 수입하는 회회청이 부족하여 청화백자의 생산이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인조 16년에는 제사에 사용되는 청화백자 화룡준(畵龍樽)을 구하지 못하여 종이에 가화로 대신할 정도였다.

또한 관요체제가 채 정돈되지 못하여 인조 초기에는 분원 장인들의 이탈로 심한 노동력 부족을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생산뿐만 아니라 진상품의 운반과 같은 주변체제도 미비해서 인조 후반 운송 도중에 상당량의 그릇이 파손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 북벌론과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청과는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강개시 등을 통해 청의 문물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그 영향은 미미하였고, 한편으로는 중국도자의 선진 제작기술 도입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17세기의 명, 청 교체기의 중국 도자 양식은 18세기에 가서야 서서히 조선 도자에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원래 분원 사기장은 "경국대전"에 명시되었듯이 380명을 정원으로 법제상으로는 조선 말기까지 변동 없이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조와 숙종 전반까지 여러 외적이 요인으로 이 숫자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도망하는 경우까지 발생.

이러한 현실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체제 이완과 예산 부족에 따라 이들에게 충분한 급료 지급이 불가능했던 때문이었다.

숙중 후반에 연이은 가뭄과 질병 등으로 장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쌀과 베가 부족하게 되자 장인들이 굶어 죽는 사건이 재발하였다.

이렇듯 장인들의 생계 보장이 어렵게 되자 생계를 위해 상품으로 자기를 제조, 판매할 수 있는 사번을 허용하게 되었다.

숙종 후반들어 사실상 공식화된 사번은 분원 경영과 유기적 관계를 이루면서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_ 철화백자는 소위 석간주라 불리는 산화철을 사용하여 문양을 시문한 것이다. 원료가 국산이라 청화백자의 원료인 회회청 구득이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_ 사치분위기의 만연을 염려한 영조는 후반 이후 여러 가지 규제 조치를 발표하는데 급기야는 영조 30년 청화백자 금령을 내린다.

청화백자도 하나의 사치품으로 자리 잡을 만큼 고가의 완상품으로 떠오르니 이 시기에 상인물주의 출현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청화백자를 비롯한 여러 기교품들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꾸준히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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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하게 딱 할 말만 들어있다.

덕분에 꼼꼼하게 읽어보느라 한 달 넘게 투자했다.

이쪽을 공부하려면 꼭 봐야 할 책이다.

그리고…

이 말은….

만만한 책은 아니라는 사실~ ^^*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 – 최완수 외 지음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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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이 구축한 간송미술관 사단의 핵심인 최완수 미술관장을 중심으로 진경시대의 정치적,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 그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의 세계에 대해서 알아본 논문들을 기반으로 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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