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19 16:27
몇 년전에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은 적으면서 참으로 잔잔하고 찬찬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 이번에 나온 이 책 역시 절제된 감정으로 잔잔하고 찬찬하게, 책표지의 부제처럼 자신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시기는 1960년대와 대략 일치하는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 정도까지이지만, 돌아보는 식으로 기술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도 포함되어 있어서 사실은 저자 자신의 전 생애를 걸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는 점은 1960년대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성장해가던 저자의 느낌과 경험 등이, 내가 살아온 1970년대 개발도상국 (당시는 그렇게 표현하였다) 의 지방 중소도시에서의 성장경험과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 부모님이 실은 진짜가 아니고 언젠가는 진짜 부모가 나타나서 나를 이 고달픈 (?)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환상, 평범함에 대한 걱정과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혼란스럽던 사춘기에 대한 묘사 등을 읽으면서 나는, 자신이 걱정하던 만큼 ‘지나친 정도의 자의식’을 가졌던 게 아니라 ‘보통 평범한 아이가 가졌을 정도의 자의식’을 가졌던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또한 ‘도락으로서의 책읽기’가 현실도피의 또다른 얼굴이 아닌지 늘 마음에 걸렸던 나의 지난 시절 고민도 유별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같은 에피소드들만 늘어놓았다면 한낱 지난날에 대한 추억을 쓴 글밖에 되지 않겠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재일 조선인으로 살면서 온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역사인식이 차츰 자라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 저자의 두 형님인 서승, 서준식 형제의 이야기가 긴밀하게 엮여있음은 물론이다. 둘째로는 책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라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 관점, 또는 달리 해석하게 된 것, 새로 알게 된 것 등을 적어놓아 그야말로 저자의 전 생애에 걸친 영혼의 성장을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특히 루쉰의 “고향” 말미에 나오는 ‘희망’에 대한 해석은 아주 오래도록 내 마음에 와닿는 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