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없이 주장을 잘 전달하고 있는 책

글쓴이 7212100 | 작성일 2005.1.27 | 목록
신영복 지음
발행일 2004년 12월 13일 | 면수 516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8,000원

서문에 저자가 ‘저자’라는 호칭에 부담스러워 하는 내용이 있다. 그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심지어 외국 책을 번역해 놓고도 저자라고 버젓이 표시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보면 한심함을 금할 길이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풀이한 것일 뿐 무엇 하나 지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겸손에서 나온 것일 게다.

이 책은 시경, 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법가 등에 대한 내용 중에서 아주 일부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동양 고전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하고 있다. 동양고전에 관한 책자를 많이 읽은 적이 있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며, 혹시 동양고전은 많이 접하지 못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저자는 감옥에서 20년을 지낸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 판단으로는 진보적임에도 진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진보를 남게 한다. 즉 독자에게 강요함이 없이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주장함이 없는 주장이 마음에 남는 것을 느낀다.

공자가 시경의 시를 한 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는데 이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으로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58쪽)고 설명한다. 그 시경 속에 국풍이라는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시의 정수는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경에 저항시와 노동요도 많이 실려 있다는 것도 시경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시경의 비판과 저항의 시의 예로 ‘박달나무 베며’의 1절을 소개하고 있다.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63쪽).

논어의 처음인 學而時習에 대해서 좀 다르게 해석하는 것 같다. 즉 여기에서 時를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고 하고 있다. 즉 배워서 적절한 시기에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서비스를 말함에 있어서 그것을 공자의 時中이라고 하고 이는 서비스를 제공할 때에 때와 장소와 사람에 맞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공자의 인을 설명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를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163쪽)고 읽고 있다.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고 있다. 이 역시 이 책의 전체를 흐르고 있는 존재론이 아닌 관계론에 입각한 해석일 것이다.

이 책에서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를 소개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지난 역사나 현 시대에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전쟁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평화라는 미명하에 전쟁이 벌어진다. 그게 종교의 목적이나 평화라는 목적을 이룬 적은 없다. 좋은 전쟁은 없고 나쁜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목숨은 우주이므로 그 목숨 하나가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한다. 국가라는 것도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순자에 대해서도 내용은 길지 않지만 나름대로 소개를 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법가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어서 좋았다. 주나라 이래로 공경대부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렸는데 법가는 귀족을 아래로 내려 똑같이 상벌로서 다스리자는 것이고, 유가는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 다스리자고 한다. 중요한 것은 법가가 똑같이 상벌로서 다스린다는 사실에서 똑같이에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유전무죄 운운하거나 유권무죄 운운하는 경우에 법가의 진정한 사상을 배워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의 강의를 마치며 에서는 불교, 대학, 중용, 양명학 등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나름대로의 저자의 주장을 펴고 있다. 대학에서 수신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 과정으로 이해하면 대학의 선언은 봉건적 관문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게 된다(490쪽)는 내용에 심정적으로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테러란 기본적으로 거대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면서 거대폭력이 먼저 거론되어야 한다는 주장(492쪽)도 그렇다.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 현실적 사실은 이해할 수도 있지만 안중근이나 윤봉길이 테러주의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항일운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거대폭력이 먼저 거론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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