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람

글쓴이 최윤식 | 작성일 2007.2.3 | 목록
프리모 레비 지음 | 이현경 옮김
발행일 2007년 1월 12일 | 면수 340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2,000원

소싯적 우연히 전쟁영화를 본적이 있다. 미국인이 쏘는 총에 수십명의 독일군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전쟁씬이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는 내용이 없고 그저 미국 찬양만 가득한 제국주의적 심리가 깔린 영화였다. 근데 그런 영화중에 너무 끔찍해 보지 못했던 영화 한편이 나의 뇌리에 스친다. 멋있는 군복을 입은 독일군 병사가 초라하고 거지발싸게같은 죄인들을 발가벗긴채 하나씩 머리에 총을 쏘며 죽이는 장면이 나에겐 상당히 무섭고 소름끼쳐 더 이상을 보지 못했던 영화였다. 그게 바로 게르만 민족을 우월과 열등한 민족인 유대인 학살이라는 사실을 10년 후에나 알았다.

유대인 학살과 핍박을 처음 접한 적은 안네 프랑코의 [안네의 일기]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잔혹성을 폭로라기보다는 숨어살는 유대인 가족사였기에 피부에 느끼는 잔학은 낯간지럽기만 했다. 군 제대 후 아우슈피츠의 소장의 회고록인 [헤스의 고백록]을 접해 읽었다. 이책은 아우슈피츠의 소장이 쓴 회고록이라서 그런지 독일군의 만행과 잔학의 고백과 자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오히려 학살의 진범들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게 해주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슈피츠의 소장 헤스는 치클론 가스로 신속 간편하게 학살시키는 기발한? 사고를 겸비한 재능있는 소장이기에 인간적인 면과 더불어 살벌함마저 떨쳐내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게오르규의 [다뉴브의 축제]-(현)[25시]은 비유대인 모르츠의 인권과 자유가 상실해가면서 전쟁의 소모품으로 전락되는 소설이지만 그 가해자들이란 독일군뿐만 아니라 연합군이라는 사실은 이분법적인 편협된 사고를 벗어나게 해준 책이었다. 오히려 독일군의 만행보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의 박탈과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잔학성을 고발한 점이 신선했다. 그리고 오늘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일독을 마쳤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책은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피치 수용소에서 겪은 수용생활을 토대로 그려낸 기록문학이다. “청결과 건상을 위해서라면 이곳에서라면 그 더러운 세면대의 흙탕물로 몸을 씻는 것이 사실상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다는 증거로서 무척 중요하고 도덕이 살아 있게 하는 수단으로 꼭 필요하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수용소 친구인 슈타인라우프의 말에 “하지만 또 그 가르침에 따르면, 다른 하늘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낸 도덕 체계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만큼 헛된 일은 없다” 56~58며 되새기는 프로미 레비는 윤리도덕의 기준은 시대와 사회 공동의 이익이 되는 기준이며 그 예로 아우슈피치의 소장인 헤스의 회고록에서도 학살이란 비윤리도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독일을 위해 지시와 복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독일군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윤리도덕 기준 또한 같은 맥락이다. 즉 식민지 건설로 수탈와 살육으로 산업혁명을 성공한 연합군과 식민지 건설의 후발주자였던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 쟁탈이 2차세계대전의 발발(發) 원인이었던 점으로 봐도 윤리도덕의 절대기준이란 없으며, 모호하고 모순이라는 저자의 생각을 읽었으며 그 다음의 책장에서도 독일군에 대한 적개심이나 복수심은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이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80 프리모 레비는 독일군의 잔학성보다, 한 인간의 타락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느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선의 희미한 가능셩,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인간의 선함과 인권의 존중,존엄의 발현을 느끼며 희망을 품는다.

“인간을 죽이는 것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몰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264 인간이 가진 윤리도덕 가치관보다, 생각하는 인간형을 추구했던 것 같다. 생각하는 사람만이 인류의 해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였을 것이다.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은 금세기에 이르러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직도 아돌프 히틀러의 광기로 몰아세우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 또는 사제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거나 신의 화신이라고 여겨지고는 했다. 사람들은 왕이 자연의 운행을 어느정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악천후나 흉작 등의 재해는 왕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뭄, 기근, 역병, 폭풍우 등이 닥치면 그 재난이 왕의 태만이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왕을 채찔직하거나 칼을 씌웠다. 그래도 잘못을 뇌우치지 않으며 왕위를 박탈하고 죽였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 헤스, 아이히만 등 그리고 나치스의 탄생은 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닌 한 공동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276

이런 만행은 이후에도 이어질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듯 우리 사회에선 경기불안이 노무현(이하 존칭 생략)탓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자, 많은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채 전근대적으로 퇴보하는 증거이며, 앞으로 현재진행형이라 할수 있다. 식민지 후발이었던 후진국인 일본한테 통치 당하고, 해방시 남북단으로 갈라져 골육상잔을 겪고, 박정희 군부쿠데타와 그의 심복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통치와 폭력은 겨우 20년도 채 되지도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섭고 소름 끼치며 현재에도 북녁땅엔 독재자가 존재하고 있다. 프리모 레비가 원하는 인간상은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생각이 든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285

개인의 인권과 자유을 보장을 위해 관심을 가진다며 금세기의 참혹한 전쟁과 살육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현재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전쟁은 종결되지 않은 채 휴전되어 있으며, 주변 이웃국가들의 눈치를 살피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순간이라 생각이 든다. 유대인 학살이란 인류의 경고를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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