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서 관계로

글쓴이 72hansop | 작성일 2005.1.27 | 목록
신영복 지음
발행일 2004년 12월 13일 | 면수 516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8,000원

올 해(2004년)의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책은 신영복의 『강의』였다. 그의 책은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었다. 고전은 특히, 동양 고전은 실천적 관점들이 결여되어 갑갑하고 보수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편견은 부족한 나 자신의 공부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자세가 결여된 우리의 지적 풍토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자구적 해석에 치중한 나머지 그 문장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동양 고전은 고루하고 답답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편견이 심어진 것이다. 이러한 나의 편견은 신영복의 『강의』를 읽으면서 많이 사라졌다.

신영복의 책 『강의』는 동양의 고전, 특히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서들을 중심으로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과거를 재조명하고 미래에 대한 성찰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그의 해석은 새롭고, 그 새로움은 나 자신의 동양 고전에 대한 무지 때문에 특히 놀라웠다. 동양 고전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은 그가 고전을 읽는 방법론, 나아가서는 그의 사상과 학자적 자세에 관계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동양 고전을 읽는 방법은 차이보다는 관계에, -사상과 사상의 관계, 전체 사상과 부분 문장의 관계, 과거와 현재의 관계- 존재론보다는 관계론에, 사상에 대한 비판보다는 사상의 현재성에 의미를 두고, 당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의 동양고전 해석의 새로움은 그의 이러한 방법론의 새로움이다. 이러한 방법적 새로움이 해석의 새로움을 낳는다. 예를 들면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장자』 ‘호접몽(胡蝶夢)’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이다. 그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는다. 온고(溫故) 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읽는 것이 아니라 지신(知新)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는다. 보수적 관점이 아닌 진보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장자』의 나비의 꿈 해석은 더욱 놀랍다. 그는 ‘나비의 꿈’이 삶의 무상함이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일장춘몽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비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속에서 상호침투(interpenetrate)하는데, 장자의 ‘나비의 꿈’은 바로 이러한 실재들 간의 상호 침투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이는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라는 관계론적 해석이다.

그는 동양고전 강의에서 그의 이러한 독법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저자 자신은 책의 말미에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 강의가 고전 독법을 관계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고하고 이러한 관점이 일관되게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대단히 편의적인 관점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실천적 과제와 유리되어 진행되기도 했다는 반성을 금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고전을 차이보다는 관계를, 존재론보다는 관계론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상의 비판보다는 사상의 현재성에 주목하면서 일관되게 해석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관점의 새로움과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의 고전 해석의 새로움은 결국 그가 취한 관점의 새로움이며, 그 관점의 새로움은 결국 학문하는 자의 태도와 입장의 분명함과 관계되어 있다. 적절한 관점과 태도가 없는 비일관적인 학문은 비록 문장들의 재기와 화려함은 보여줄 수 있을지라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신영복의 문장들이 우리의 가슴에 와닿는 것은 학문하는 자의 태도와 자세가 분명하기 때문이며, 그가 학문을 끊임없이 현실과 연결하려는 그의 실천적 의지 때문이다. 비록 그가 인간성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제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전을 읽는 학자로서의 자세는 현실과 유리된 학문의 세계에 갇혀있는 지식인 모두가 배우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신영복의 책 『강의』를 읽으면서, 정민 교수가 그의 책 『책 읽는 소리』에서 옛 선비들이 수 천 번씩 반복해서 책을 읽은 이유를 설명한 부분을 계속 떠올렸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신영복이 진정한 선비의 모습을 닮아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책을 내 삶 속에 체화(體化)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독서의 목적은 지혜를 얻는 데 있었지, 지식의 획득에 있지 않았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모두 독서에서 나왔다. 책 속의 구절 하나하나는 그대로 내 삶 속에 체화(體化)되어 나를 간섭하고 통어하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네들이 읽은 책이라고 해야 권수로 헤아린다면 몇 권 되지 않았다. 그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읽다 못해 아예 통째로 다 외웠다. 그리고 그 몇 권의 독서가 그들의 삶을 결정했다.
-정민, 『책 읽는 소리』, 마음산책, 2002. p.44.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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