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강의 – 저우스펀지음/김영수옮김/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2.13 | 목록
저우스펀 지음 | 김영수 옮김
분류 절판도서
발행일 2006년 6월 15일 | 면수 480쪽 | 가격 30,000원

번역서인 줄 모르고 잡았다가, 책을 다 읽고 저자가 누구지? 싶어서 표지를 보니 저우스펀 지음이다.

의외로 그는 정통 사학자가 아닌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비 전공자이면서 전기 문학 방면에 재미난 글을 쓰는 작가 겸 화가인데, 중국 출판계에서는 꽤 인기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2006년 6월에 나온 책을 2014년 6월에 만나 9월 말에 마무리를 했으니… 말머리에서 보았던 저자를 잊어버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의 이름이 중국의 주류 역사학자가 아니어서, 거기다 한국에서 번역한 서적이어서, 판형 또한 통상적인 A5가 아닌 B5… 덕분에 어디 들고 다니거나 사무실 책상 한편에 두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집, 침실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한 장 두 장 넘겨보다 보니 책 나온 지 8년 만에 인연이 된 책이, 우리집 침실에 들어와 손에 잡은지 3개월이 걸려 다 보게 된 책.

아무튼 원저는 『중국 역사 11강』​은 중국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가 쓴 교양 역사서 가운데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책이라고 한다.

그런 스토리 덕분에 마음을 두고 있다가, 책잔치에서 리퍼브 도설 파격 할인으로 인연이 된 책​..

전년 책잔치에서 구입한 서적들이 서가에서 재고가 소진되어 이제 약 10권 밖에 남지 않았다… 2014년 10월 3일부터 12일까지 파주에서 "북소리 책잔치"가 다시 열리니 빈 서가를 좀 채우러 다녀올 예정이다.

아무튼

​11강으로 나누어 중국을 끊어서 보는데, 역사를 보는 수정주의적(정통 사학자의 학풍의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최근 우리에겐 일본에서 들어온 중국사, 서양인들이 만든 중국사를 번역해서 볼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사대주의적 중국 역사관에 갇혀있었는지도 모른다. 중국과 수교한 게 1992년이니 불과 22년밖에 경과하지 않았으니 지금 돌아다니는 대부분의 중국 역사서는 미국식 또는 일본식의 비자주적 역사서(중국 사학자, 중국 비 주류 사학자 측면에서)이리라…

물론 중국 주류 사학자들은 우리가 예전에 그랬듯이 ​자신의 프라이드를 너무 앞장세운 나머지 동북공정이니 뭐니 해서 동북아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비틀려는 잘못된 움직임들도 간과할 수 없으나… 외세에 의한 중국사 중 너무 심하게 비틀린 것은 되돌려 놓는 작업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이며, 어느 부분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중국인들이 쓰는 중구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맞공부(맞대응)를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무조건 우리 것은 독창적이며, 아시아는 물론 세계 최고의 유적이고, 최선의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무턱대고 우기면(물론 아닌 것을) 세상은 우리를 버리고 웃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말이 안 되는 것이라 욕하듯이…

​​

어디까지가 우리 땅, 우리 역사인지를 알려면 그들이 캐고 있는 어두운 밀실까지 밀고 들어가서 정확하게 맞다고 아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고구려이던, 발해이건, 독도던, 해방과 한국전쟁이건, 근대화와 군부독재이건, 보수와 진보던….

워낙 표리가 부동한 세상에 살고 있어서 뒷방 밀실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까지 감리가 필요한 시점인 듯…

​중국인이 쓴 중국사, 일본인이 쓴 일본사(물론 객관적인 시각으로), 한국인이 쓴 한국사를 똘똘 말아서 통독해야 비로소 동북아 2,000년을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너무 멀리 왔나?

일단 최근(4-50년간) 문제가 되고 있는 독도나, 한국전쟁, 러일, 청일, 아편 전쟁 등은 좀 더 캐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책으로 좀 들어가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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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청동의 사용과 제사와 전쟁이 일치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청동은 바로 정치권력을 대표한다. 청동 시대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수 부호가 탄생한다.

​서주 300년 역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봉건’이란 정치체제의 창간, ‘봉건’이란 ‘봉분 건국’의 줄임말로 땅을 나누어 주고 나라를 세우게 한다는 뜻.

『춘추』는 노나라 은공 원년에서 애공 14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이 책을 편찬한 사람, 즉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었다. 서력기원으로 따지면 사상 해방의 시기였던 기원전 722년에서 기원전 481년 전까지이다. 공자의 행운과 위대함은 그가 시대를 뛰어넘는 혜안을 가지고, 대략 은공 원년을 전후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전개되었음을 보았다는 데 있다. 이후 이 시대를 공자의 책 이름을 따서 ‘춘추’라고 불렀다.

​서주의 예제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 민간에서 창조된 각종 악기가 만들어 내는 교향악이 탄생하고 단순히 두드리는 악기에서 치고, 뜯고, 부는 다양한 소리의 합주로 바뀌면서 이 무렵 5음계 위에 완전한 7음계가 나타남, 궁상각치우의 5음은 별자리로 정한 것이며, 이 기초에 중청각과 변치가 창조됨.

초나라 초왕이 가녀린 허리의 궁녀를 좋아하여 궁녀들이 많이 굶어죽었다는 기록은 마르고 가는 모습을 추구한 당시의 풍조를 알려 준다.

​중국이란 개념은 역사적 범주이다. 춘추 시대의 중국은 동이, 남만, 서융, 북적이라는, 사방의 하족이 아닌 민족 부락에 대한 상대적 호칭으로, 제하를 중심을 중국이라 했다. 이후 중국은 끊임없는 민족 융합의 과정 속에서 확대되었고, 따라서 사방의 개념도 확대되었다. 중국은 역대로 ‘사방’에 대한 대단히 폭넓은 인색을 가져왔다. 동서남북, 중의 ‘5방’개념은 거의 중국인 특유의 것이 되었고, 중방을 핵심으로 하는 개념은 ‘중국’을 마침내 중국 민족의 통칭이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민족 응집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5방 통일 관념은 수천 년 동안 줄곧 중국 문화의 핵심이었다.

진시황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획일화’된 표준을 단호히 채택했다. 전국의 도(길이), 량(부피), 형(무게)도 통일, 화폐를 통일하여 금융을 안정시키고 수레바퀴의 크기와 문자 통일 및 통일된 윤리 도덕도 실시

​분서는 당시 여전히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는 보수적 신하들이 있어서 시황제는 신하들에게 이 문제를 토론하게 했다. 승상 이사는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논하는 신하는 국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강력하게 반박하며, 개인의 사교육을 모두 금지시켜 ‘비방’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토론은 진시황의 분서 결심을 굳히게 했다. 이에 진시황은 전국에 조서를 내려, 일상 대화에서 고전을 인용하거나 고대의 전례로 현재 정치를 평론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리고 진나라 이외의 역사, 고문헌과 제자백가의 학설은 모두 불태우고, 진 조정에서 반포한 법규와 의약, 점복, 농경 및 양잠에 관련된 서적만 남기게 했다. 그러나 당시에 태운 것은 주로 6국의 역사서였고, 제자백가는 오히려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역사 문서는 진시황이 ‘박사’부터 남겨 보존하게 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분서와 갱유를 한 사건으로 묶어 거론하면서 진시황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인상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려 했다. 갱유는 분서 사건이 있고 난 이듬해에 일어났다. 갱유에는 우연적인 요인이 개입되어 있었다. 진시황은 문신들 외에 한 무리의 점성가와 연금술사를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당초 얼치기 과학자라 할 수 있었는데, 그중 두 사람이 장생불사의 선약을 ​구하라는 진시황의 엄숙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을 찾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시황이 성질이 급하여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비난성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되어 극도로 화가 난 진시황은 두 사람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으나 끝내 잡지 못 했다. 도리어 이 와중에 경성 곳곳을 수색하여 460명을 잡아들인 뒤 도망친 두 방사와 관계가 있거나 비슷한 방술을 구사한다고 해서 결국 모조리 산 채로 파묻어 버렸다.

사실 진시황은 훗날 지식인들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다. 그러나 진은 이후 전문적으로 저술과 학술을 훼손하는 정책을 더 이상 실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불교를 배제한다는 것은 그 의미의 절반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불교가 중국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불교는 위진 남북조 시기에 갑자기 일어났는데 그 사실 자체로도 깊은 차원의 까닭이 있음을 말해준다. 원시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나 유포되었고, 인과응보를 주장하는 소승 불교를 위주로 점차 서역으로 전파되어 그곳에서 대승 불교의 싹을 틔웠다 그러나 불교는 발원지인 인도에서는 오히려 힌두교와 브라만교에 밀려 억압받았다.

당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당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위대한 시인 중 절반이 당대에 탄생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시가를 ‘당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이름이나 성이 남아 있는 당대의 시인만 2,300명에 이르고 4만 8,900여 수의 시작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는 그 후 20세기 초까지 1,000여 년 넘게 영향을 미쳤다.

​명대 창위의 특무 대원은 무려 15만~16만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관부와 민간 곳곳에 침투하여 활동했다. 천계 연간에 평민 네 사람이 밤중에 밀실에서 술을 마시던 중 술에 취하자 그중 하나가 환관 위충현을 크게 욕 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나머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듣기만 했는데, 욕이 다 끝나기도 전에 느닷없이 창위의 대원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그들을 모두 위충헌에게 데리고 갔다. 욕을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받았고, 나머지는 약간의 상금을 받고 귀가 조치되었다. 이 일로 백성들은 늦가을 매미처럼 입을 다문 채 경악했다.

정권이 ‘아무도 믿지​ 못하는’지경에 이르면 손바닥만 한 당에 의지해서 사는 농민들은 근본적으로 집안을 일으켜 부를 이룰 수 없게 운명 지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창위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던 것이다.

떠도는 백성인 ‘유민’의 증가는 명 왕조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 문제로, 이 문제를 확대하다 보면 왕조의 모든 병폐가 줄줄이 따라 나온다. 이 문제를 확대하다 보면 왕조의 모든 병폐가 줄줄이 따라 나온다. 주원장이 설계한 명 왕조의 정치적 지탱점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위로는 뛰어나면서 독재할 줄 아는 군주와 아래로는 비교적 청렴하면서 책임감 있는 관료였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바로 환관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관료주의가 팽배해져 정치적 파산이 군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다한 세금 징수로 이어져 경제가 파탄에 이른다. 그런데 마침 불행하게도 명 왕조가 바로 이 길을 걸었다.

​소농을 바탕으로 세운 왕조가 세수를 늘이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지출이 갑절로 증가하여 문제가 된다. 지출의 주범은 황실의 헤픈 씀씀이, 과도한 지불 비용, 관료 집단의 유지 비용 이를 위해 세수를 증대하기 위해 세금을 걷는 인원을 늘리는데 그 비용 마져도 부담이 되며 부과 대상과 율을 올려 대응을 하지만 세금을 낼 수가 없어 땅을 버리는 일 등이 생기면서 나라는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다.

​역사상 왕조 교체 과정을 청 왕조처럼 통 크고 활달하게 치른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1644년 수도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명 왕조의 모든 관리들을 전부 그 자리에 머물게 했고, 이듬해에는 과거 시험까지 치러 인제를 선발했다. 또 자결한 명의 숭정제를 위해 상을 치르고 능을 세우게도 했다. 또 자결한 명의 숭정제를 위해 상을 치르고 능을 세우게도 했다. 명에서 항복해 온 관리와 장수들 중용했으며, 명 말기의 각종 잡세를 폐지하고 과다한 착취를 금지했다. 환관 세력을 도태시키고 뇌물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 모든 조치들은 지극히 진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렇게 되자 망국 명왕조의 유신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유가의 전통적인 이론 중 맹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백성을 잘 살피고 기쁘게만 한다면 군주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명 왕조의 유신들의 청에 대항하는 반감 정서는 설자리를 읽게 되었다. ​ 그러나 기본 방략은 어디까지나 만주족을 통치 민족으로 했으며, 각 부의 지위 또한 만주족 관리가 통솔하게 했다. 여기에 정권을 확고히 할 필요성에서 청 왕조 통치자들은 항복을 거부하는 자는 인정사정없이 죽였고, 사상적으로 뜻을 달리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문자옥’으로 대처했다.

​왕조나 시대의 교체가 좋은 것은 사회 전체에 대한 한 차례 대 정리가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바둑판을 새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 두다가 만 판을 다시 복기할 것 없이 모든 역사는 옛 장부와 함께 청산되고, 장부에 남은 중대한 문제들도 낡은 시대의 견제를 받지 않는다. 하물며 명 왕조라는 바둑판은 사실 복기할 것도 정리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판을 짜는 어려움은 낡은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지만, 이미 정해진 규칙은 지켜야 한다는데 있다. 이것이 전통 시대의 모든 왕조가 직면했던 ‘낡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답’이라는 난제였다.

​입관 후 청왕조는 각종 제도 면에서 일부 세부적인 것만 바꾸고 대부분은 명대를 계승했다. 황궁은 새 주인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장식상 만주족의 풍속과 부호를 첨가하는 선에서 수리하는 데 그쳤다.

만주족이 얼굴빛 하나 변치 않고 차분하게 문화와 마음의 지혜 면에서 한화를 완성한 반면, 조직적,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기마 유격병의 민첩함을 유지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의 만-한 융합을 이루어 냈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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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이 넘는​ 깊고 넓은 중국 역사를 480페이지 속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책은 작은 책속에 자신들의 역사를 자신들의 색상과 시각을 덧대어 넣어둔 책이다.

그간 우리가 표상적으로 알고 있던 굴직굴직한 역사를 중국의 시각으로 그것도, 중국 역시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중국들이 만들어져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고, 흥하고, 기울고, 망하는 과정을 이제것 들어왔던 흔한 "왜?"가 아니라 조금 다른 "왜?"라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나라를 조금 유리하게 보면서 그간 잘못 알고 있었던 여러 오해들이 조금 풀리게 하는 부분도 제법 나온다.

최근 100 ~ 150여 년 전후로 중국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모두들의 세계로 던져졌다고 본다. 책을 읽는 내내 아마도 자신들이 동아시아 중심으로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화’사상을 기본으로 세상을 이끌었으면 어떤 지구史가 흘러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지난 100여 년은 중국은 자신이 끌고 가지 못하고, 따라가거나 남의 차에 납치당해서 끌려갔던 댓가를 치렀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 납치되어 끌려가던 버스와 택시 그리고 그렇게도 덜컹커리던 화물차에서 내려 방향을 잡으려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뒤를 돌아보고 있는 듯… ​

​​

​하지만 우리는 왜….

왜?

기울어 망했던 명, 청의 나쁜 길, 그것도 가장 썩은 냄새가 나는 짓들을 뒤따르고 행하려 하는가?

지척에서 쓰러져간 역사를 따르려 하는가? … 그것도 가장 지저분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 ​

​현재의 눈으로 작금의 현실을 파악할 수 없다면, 과거의 여러 일들을 바라보며 현재의 일들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애써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 하지 말고, 불의를 보고 눈 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를 맞았을 때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단테​, <지옥>편 『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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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강의 - 저우스펀지음/김영수옮김/돌베개] 일본이나 서양인이 쓴 중국사가 아닌 역사 비전공자이자 예술인이 쓴 교양 중국 역사서로서 통찰력과 예리한 시각이 많이 들어 있어 수준과 재미가 공존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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