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92년 5월 25일 1쇄가 나온 날이니… 내 손에 들어온 건 2011년이니 출판하고 20년 만에 만난 셈이다.
때론 이렇게 특별행사나, 중고책방에서 책을 만날 때는 참 반갑기도 하고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 책은 돌베개 리퍼브 도서 50% 할인전에서 만나 구입한 책이다.
역사교육이 딱딱한 주입식 교육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입시만을 위한 암기과목으로 향해 가고 있을 때 이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다양한 연구와 자료집을 만들고자 1990년 9월 1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서 한국사사료연구모임을 출범시켜 그 작업의 결과로 이 책으로 엮이게 된 것으로 ‘민중의 생활과 항쟁’이라는 주제를 뼈대로 엮은 책이다.
민중항쟁의 원인이 되는 각종 사회 모순과 ‘민중의 생활’에 관한 사료를 정리한 것으로 제도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사회적 지위, 생산력과 사회의 변동이 민중에게 주는 영향, 여러 가지 모순으로 인한 민중의 어려움 등에 대한 자료를 보여준다.
책의 내용 중 주요 내용을 보자면~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 생산력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잉여생산물이 생겨나자 공동체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잉여생산물을 차지하는 지배층과 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으로의 분화가 시작된 것이며, 사회도 씨족사회 단계에서 부족사회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나무 삽과 괭이뿐만 아니라 농사의 능률을 높일 수 있는 나무 후치가 사용되는 등 농기구가 발달하였으며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국가가 형성되었다. 철기의 발달로 인해 계층 분화가 심화. 전쟁이 자주 일어나며 전쟁으로 생긴 포로를 노예로 부리기 시작.
삼국과 통일신라 시기 – 원시공동체 사회는 중기 이후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하여 평등하던 사회관계는 무너지고 빈부, 남녀,직업의 차가 생겨났고 계급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은 왕을 비롯한 지배계층과 호민, 그리고 하호와 노복(노비)이라는 상하의 신분계층으로 나누어졌다.
김대성이 가난한 용작농의 아들이었으나 선한 덕을 쌓아 귀족으로 다시 태어났듯이 불교가, 현실의 어려움은 결국 전생의 업보에 대한 자업자득이라는 것과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현생에서 열심히 덕을 쌓으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줌으로서 현실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구실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민중의 저항이라고 부를 만한 기록은 드물다. 수탈에 대항하여 도망가거나 하는 항조 피역의 성격.
고려시대 – 고려사회의 구성원은 귀족과 중간계층의 지배세력과 양인, 천민의 피지배세력으로 나누어짐.
양인은 농민과 상인,수공업자 등으로 구성, 대다수는 농민. 농민은 생산에 종사하면서 각종 조세와 노동력을 부담함으로써 고려사회를 지탱해 가는 물질적 기반을 제공. 양인 농민(丁)은 16세에서 59세에 이르기까지 도시, 궁궐, 사찰,관아의 축조, 성곽과 도로의 건설, 하천 제방의 수축 등 각종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요역을 연 20일가량 제공.
고려의 봉건 지배체계는 권력을 둘러싼 문벌 귀족들 사이의 갈등으로 지배세력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남 결국 무신정권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무인 세력을 정점으로 새로운 지배체제가 이루어짐. 그러나 이러한 지배세력의 교체로 민중의 생활이 낳아지지는 않음, 사회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싸움에만 열중. 토지의 겸병에만 열중하여 지방관리와 토호들의 착취로 인해 농민들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 이러한 사회적 필연으로 농민들의 대대적 봉기는 대몽 전쟁기까지 지속.
경상도 일대에서 민중항쟁이 일자 최충헌은 경주를 강동 시키고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시켜, 경주 관내의 주, 부, 군,현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경상도란 명칭을 상진 안동 도로 바꾸기도 함.
최씨 무신정권은 몽고 침입 이듬해인 1232년 도읍을 강화로 옮겨 몽고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강화천도 이후 몽고군에 의한 직접적인 위협이 줄어들자 이들은 여전히 사치 호화 생활을 계속하였다. 궁궐과 의리의리한 저택을 짓고 잔치를 벌이느라고 날이 새는 줄을 몰랐다. 민중에 대한 수탈도 여전하였다.
개경 환도 이후 고려사회는 원의 간섭으로 인하여 많은 변화를 겪는다. – 관제의 축소 개편, 왕의 이름에는 충(忠)자가 들어가고 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어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된다. 원은 고려에 대해 많은 공물을 요구한다. 고려는 몽고군의 주둔에 필요한 식량과 말은 물론 매를 산 채로 잡아서 바쳐야 했다. 심지어는 환관과 처녀까지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어 조혼의 풍습이 만들어졌고, 일본 정벌이나 삼별초를 공격할 때도 고려 민중은 병사로 징발되거나 배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어 지배층의 수탈에 시달리던 고려민중에게는 이제 원의 수탈까지 덧붙여져 엄청난 고통을 겪음. 원의 간섭기에도 고려 지배층의 사치 향락은 줄어들지 않음.
조선전기 –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은 근본적인 사회체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 말의 문란했던 토지 소유관계 및 수취 체제가 어느 정도 개선되고 강제로 종이 된 사람들이 양인으로 환원되는 등 부분적인 개혁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봉건적 신분제도와 수취 체제는 그대로 유지. 결국 조선의 성립은 봉건사회 체제가 보다 완성된 형태로 재편된 것에 불과했다. 이는 곧 조선이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 계층의 한계이기도 함. 경국대전은 사회 신분질서를 명확하게 법제화한 것이다.
노비란 원래 죄를 짓고 잡혀온 데서 비롯된 것으로 후손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는데, 고려 초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공신의 노비로 삼아 대대로 이어지게 한 데서 노비 세습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비록 스스로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경우는 있더라도 대를 이어 종살이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국가가 통치질서 및 수취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민중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감시가 필요하여 호적제도와 민중 통제를 시작함. 3년에 한 번씩 호적을 새로 만들고 4대 조의 이름과 거주지 관직 등을 기록하고 멋대로 옮겨 다니는 자는 처벌. 16세 이상은 호패 착용. 2품 이상인 자는 상아, 3품 이하는 뿔, 그 위는 신분에 따라 나무로 된 것을 한성부와 지방의 해당 관청에서 발급한 것을 참.
이 책은 1,2부로 나누어져서 조선 전기까지 가 1권 그 이후가 2권으로 나누어지는데 불행히도 2권은 현재 구할 길이 없어 1권만 구해서 읽게 되었다. 2권은 여기저기 헌책방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고,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 정도는 가야 보관이 되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의 향락과 부도덕성, 재산의 불법적인 축척 등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국가의 역을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 나랏돈으로 그 비싼 땅에 자기 새집과 경호공간을 마련하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최근에 언론에서 뭇매를, 국민에게는 분노를 사는 사람이 있다. 공직자와 집권층의 도덕성은 그 국가가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한 1순위의 덕목임을 현재의 집권층들은 잘 모르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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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우리역사- 전국역사교사모임엮음/돌베개]한국사사료연구모임 ‘민중의 생활과 항쟁’ 연구 결과를 뼈대로, 민중항쟁의 원인이 되는 각종 사회 모순과 ‘민중의 생활’에 관한 사료를 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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