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 김동욱지음/돌베개
제목이 조금 길다… 수원화성이 제목이고 부제로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이다.
19세기 중반까지 경기도 굴지의 도회지(유수부)로 자리 잡은 화성의 모습은 지금도 수원에서 회자되고 있는 수원팔경의 노래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수원은 원래 1793년(정조 17년) 왕명으로 그 명칭을 화성으로 고쳤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는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도시라서 수원으로 다시 굳어졌다.
짜장면을 표준어로 아무리 자장면이라고 눌러도… 결국은 짜장면으로 돌아왔다…
큰 나무는 바람에 쓰러질지 몰라도 잡초는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는다. 백성이 항상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아무튼 다시 책으로~
‘테마한국문화사 시리즈’는 한국의 문화사의 진수를 테마별로 뽑아서 만들어낸 책들이다.
이 ‘테마한국문화사 시리즈’는 사실은 와이프가 좋아하는 책들로 이루어진 시리즈라서 내가 구입한 책은 아니다. 나는 역사 쪽 책을 좋아하고 집사람은 문화 쪽을 좋아하다 보니 집사람이 덜컥 시리즈를 세트로 총 8권을 집어 들어 과감하게 들여온 책들이다.(물론 파주 책잔치 특별 할인 행사할 때^^)
9월의 어느 날 하루 휴가를 보태서 2박 3일간의 고향 여행 겸 벌초하러 집을 나설 때 집사람에게 물었다.
"지금 [밖에서 본 한국史 - 김기협지음/돌베개] 다 봐 가는데 고향 가서 감나무 그늘 아래나 대청마루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볼만한 책 없을까?"라고 물었더니 단박에 집어서 뽑아준 책 되겠다.
참으로 지겹던 장마가 지나고, 쨍하니 파랗고 높은 하늘이 나오면 수원화성이나 남한산성을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은 겨우내 버티던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날이 음력 1월 30일이니 겨울에 오르면 되겠고… 수원화성은 어느 쨍하게 해가 나와서 이 지루한 장마가 끝나는 좋은 가을에 이 책을 금요일 저녁에 한방에 읽고 옆구리에 끼고서 수원행 전철에 몸을 실으리라…. 하고 벼르고 있던 책이었다.
그런 책을 들고 고향으로 향해서 벌초를 마치고 맑은 공기에 맑은 강바람에 대청 마루에 소반 하나 올려놓고 거기에 막걸리 한 통, 얼음 물 한 통, 수원화성 한 권 두고 책보다 졸리면 대청에서 낮잠 자다, 눈 뜨면 다시 읽다가 하면서 본 책이다… 심심하면 TV 보면서 읽어도 좋을 정도로 가볍게 접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썼고,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문화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돌베개 출판사의 ‘테마한국문화사 시리즈’는 총 8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첫 권인 백자 편이 2002년 3월에 나왔고 지금 까지 가장 최근에 나온 8권 사군자 편이 2011년 1월에 나왔으니 근 1년에 한권 정도를 펴냈으니 아직도 이 시리즈가 중단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시간 나면 중단되었는지 진행 중인지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 시리즈를 보자면 이렇다.
테마한국문화사 1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방병선 지음, 252쪽)
테마한국문화사 2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 문화』 (신명호 지음, 304쪽)
테마한국문화사 3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 (김동욱 지음, 272쪽)
테마한국문화사 4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 (권오영, 320쪽)
테마한국문화사 5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김문식ㆍ신병주 지음, 296쪽)
테마한국문화사 6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지음, 384쪽)
테마한국문화사 7 『불화, 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김정희, 432쪽)
테마한국문화사 8 『사군자, 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이선옥 지음, 336쪽)
[테마 한국문화사]의 심볼인 네 개의 원은 조선시대 능판화에 새겨진 태극 무늬와 고려시대 상감청자 대접의 연화 무늬, 훈민정음의 [ㅇ]자, 그리고 부귀와 행복을 상징하는 길상무늬. 가는 선으로 이어진 네 개의 원은 우리나라의 국토를 상징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테마 한국문화사]의 주제를 표상한다고 한다.(이러다 돌베개 직원으로 오해 받겠다…..ㅠ.ㅠ)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겠다… 정리 좀 하자면~
영조와 영조 66세에 15세에 왕후의 자리에 오른 정순왕후, 그리고 당쟁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정조의 즉위, 정조의 즉위 시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하고 왕위에 오른다.
1776년 즉위한 정조는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고치고 어머니의 존호를 혜빈에서 혜경궁으로 높였다. 또 아버지의 사당을 장대하게 새로 지어 경모궁이라 하고, 창경궁 내에는 경모궁이 바라보이는 높은 언덕에 어머니가 머물 새 전각인 자경전이라 짓는다. 또한 정조 13년(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천장한다. 옛 수원 고을의 주산인 화산 아래 남향한 곳에 영우원에서 옮겨와 현륭원으로 바뀐다.(후에 영릉으로 바뀐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을 잇는 세 개의 큰길이 있었다. 평양을 거처 의주로 가는 의주대로, 서울에서 충주, 안동, 상주,대구로 가는 좌로(임금의 시선으로 보면 좌측), 서울에서 수원을 경유해서 공주, 전주, 나주로 이어지는 우로가 있었다. 의주대로는 중국 사신이, 좌로인 영남대로는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호남과 서울을 잇는 우로는 비교적 지형이 평탄해서 물자 소통이 원활한 편. 정조는 구 수원읍은 화산에 싸여진 군사적 방어 도시에 있었다. 거기에 비해 팔달산 아래의 넓은 개방된 곳으로 이어 큰 길을 중심으로 한 명실상부한 삼남의 교통 중심지이자 경제 도시로 키우고자 하였다.
화성 신도시의 건설의 직접적 계기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옛 수원 고을 뒷산으로 이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성 신도시 전설은 단순히 무덤 이전에 따른 도시 건설이라기 보다는 정조의 치밀한 준비와 정치적 목적(왕권강화) 아래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신하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어렵게 왕이 된 정조는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남인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했고 왕의 친위 군사부대인 장용위를 키워서 내장용위(내영)는 도성에 외장용위(외영)는 수원화성에 두게 된다. 수원화성은 왕권을 지탱해주는 배후도시로 조성되었다. (오잉… 그럼 그 아저씨는 낙동강 흙들을 퍼올리고 하는 것이 왕권을 강화하는 자본금 확충 차원에서 실시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오리알이 되고 싶어서…..과연 4대강 조성의궤가 제대로 나오게 되어 세월이 흐르고 흘러… 3-400년 이후에 큰 홍수가 나서 보들이 다무너졌을때, 그 의궤(설계도면,시방서,준공관련 자료 등등)를 보고 새로 꼭~ 만들고 싶은 사대강 사업이 되어야 한느데…..아무튼 왕권 강화?, 퇴임 후 자금 확보 차원에서 그렇게 4대강에 매달리남… 차라리 자신만의 성을 쌓고 후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쪽이 낳을지도 모르겠는데 ㅉㅉㅉ)
아무튼 임진왜란 때 조선은 해군은 강력했으나 초기의 관군은 무력하게 패퇴했고(20일도 안돼서 도성이 무너졌다.) 읍성과 방어벽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와서는 대대적으로 산성 정비 명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선조 말년까지 거의 전국의 산성이 수축되었다. 지금 지방 각지에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산성은 바로 이때 손질된 것들이다.
종전의 성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떨어진 방어하기 좋은 산속에 성들이 지어졌는데 위급한 일을 당해도 백성들이 산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전쟁이 나면 산성에 누가 누구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머가 이뻐서…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조선 후기의 신분 구조의 변화가 있었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그래서 그 이후에 반계의 주장 등에 의해서 읍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제활동의 거점을 보호하자는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협축과 내탁. 협축은 서양식으로 평지에 성의 안과 밖을 모두 석축을 쌓는 것이고 내탁은 바깥쪽에만 석축을 쌓고 안에는 성벽 높이까지 흙을 돋우는 방식,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내탁 방식.
성문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므로 문 앞의 성벽을 한 겹 더 쌓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옹성.
화성 축성 공사에는 22직종의 1,840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석공이 전체 장인의 30%인 662명, 화공 46명 가운데 40명은 승려, 화공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단청을 칠하는 것 단청은 승려 장인들의 점유분야, 승려 화공은 대부분 경기도의 사찰에 속함
최초 제안은 3,600보 4.2Km, 실제는 4,600보 5.4Km 1974년 시작해서 1796년에 완성, 4성문(창룡,화서,팔달,장안문), 5암문(동,서,남,북,서남암문),2수문(북-화홍문,남수문),3공심돈(서북,남,동북공심돈) 등.
도심 한복판에 열십자 형태의 교차로를 두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매우 이례적인 일. 조선시대의 가로는 서울이나 기타 주요한 지방 도시에서 보듯이 T(丁)자형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도시가 사람들의 원활한 소통보다는 행정 기능이나 군사 기능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존의 전통을 깨고 화성에 열십자 형태의 가로를 조성한 것은 사람들의 소통이 활발한 새로운 상업도시를 건설하고자 했기 때문.
당시에도 나랏돈 6만 5천냥을 얻어 1만 5천냥을 희망자에게 무이자로 빌려 주어 성내에 신설한 상설 점포도 있었음. 하지만 1800년 정조가 죽고 난 후 화성에 쏠렸던 나라의 관심이 사라지면서 점포의 기능이 소멸되고 도시의 기능도 점차 약해진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찰 건립을 억제해 왔으나 왕릉을 지키는 능찰만은 예외였다. 능찰은 조포사(造泡寺)라고도 불렸는데, 조포사란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대개 왕릉은 인적이 드문 외딴 숲 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수로 올릴 두부를 제공해 줄 사찰이 능 주변에 필요하였다. 이처럼 제수를 장만한다는 것은 왕릉 곁에 절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능찰이 되면 인근 관리들이나 양반들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괴로운 노역으로부터 벗어났으며,승려들의 신분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능찰은 강남의 봉은사가 선릉(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릉),정릉(중종릉)의 능찰
수원화성은 세계문화유산 등록,
성곽 수리는 1964년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74년 정부의 국방문화유산 정비 계획에 따른 예산 지원에 의해 5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70년대에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 등록 시 그 복원 과정이 얼마나 진실성이 유지되었는지가 평가의 관건.
성곽의 복원에 결정적 도움을 제공한 것은 [화성성역의궤]였다. 각 건물 하나하나의 형태와 치수뿐만 아니라
공사에 소요된 못의 숫자까지 명시된 뛰어난 의궤 덕분에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이 되었다. 정조는 후대에 있을 이런 정비 사업에 참고하라고 의궤를 그렇게 꼼꼼하게 만들어 두었나 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오욕의 추잡한 단어들을 뱉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을 남기고 그 공사에 사용된 못 하나하나의 개수와 치수까지 기록해두었던 사람도 있었다. 死대강이다, 아라뱃길이다, 각종 지방 공항이다, 아시안 게임이다, 동계 올림픽이다… 토목 공화국이 되어가는 지금……예산의 책정과 집행, 그리고 훗날에 길이 길이 남을 예산의 사용처에 대해서 못 하나까지 기록하여 훗날에 귀감이 되기를 바랐던 그 시절의 선비, 장인 정신이 아쉬운 때다….
옴마니반매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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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 김동욱지음/돌베개]조선시대 대표 성곽이자 정조의 계획 신도시, 개혁 군주 정조의 개척, 실학, 효 사상이 축약된 곳이기도 한 수원화성의 도시적 측면을 부각시키려 노력하며 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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