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본 한국史 – 김기협지음/돌베개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두 권을 구입했던 책 중의 한 권이다. 먼저 본 책이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이고 뒤에 잡은 책이 [밖에서 본 한국사]이다.
먼저 본 망국의 역사~에서 저자 김기협의 글은 나에게는 일종의 태풍처럼 크게 한 차례 쏟아붓고 지나갔다.
저자는 에세이 형식으로 툭 툭 던지는 글(물론 연구를 많이 하고 썼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편하게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인다, 이 점도 저자가 가진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참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로 써 내려갔지만 읽어 내려가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충격들이 있고 재미가 있는 그런 글을 쓰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저자는 한민족의 공간 형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삼국, 몽골, 명청시대, 쇄국과 개항, 피지배와 광복, 폭력 국가의 청산에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순서로 한민족의 통사에 대해서 차례대로 한 건, 두건씩 다룬다.
제목에서 보듯이 서언의 제목 또한 [더러는 밖에서 볼 필요도 있다]이다. 국사란 애초에 ‘안에서 본’ 개념이고, 내가 속한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역사를 지적 인식의 한 영역으로 설정한 것이 역사이다.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국사’란 개념이 성립도 되지 않는다고 쓰면서 들어간다.
‘민족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을 새로운 차원에서 표출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라고 글을 열어간다.
뭐 다들 알고들 있는 내용이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한번 더 세기고 싶은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금속활자를 생각해보자. 금속활자의 발명은 한민족의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금속활자 출현의 배경 조건은 중국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인쇄술의 기초를 중국에서 받아왔을 뿐 아니라 서적의 수요 또한 중국문명 도입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한민족이 중국문명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 그 발전에 주동적 역할까지 맡은 하나의 사례가 금속활자였다. 이것을 경쟁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며 중국보다 앞섰다는 사실만을 내세우는 것은 그 발명의 진정한 의미를 외면하는 편협한 관점이다.
최영의 요동 출병 시도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요동 지역을 고려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을 새로 통일한 명나라와의 정면 대결은 무리한 것이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정책대결이 결국 회군으로 마무리 됨에 따라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촉진되었다.
원나라의 통치 지역을 모두 접수하려던 명나라가 함경도 지역을 조선에 양보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요동에서 경쟁을 포기한 댓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왕실이 함경도 지역 이주민 출신이므로 왕실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조선에 대한 우호감을 표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문화 수준이 낮아 직접 통치하기 힘든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이 조금 더 흘러 여진은 청을 세우고 명으로부터 천하를 빼앗고 다시 조선을 치게 된다.
문명의 발달은 보편성의 확산을 가져온다. 동아시아의 경우 황하 중류 유역에서 발생한 한자 문명이 발달함에 따리 인접 지역이 끊임없이 중국문명 속으로 흡수되었다. 각 지역이 원래 가지고 있던 문화적 개별성이 흐려지고 사라져가는 과정이었다.
중국 문명이 하나의 양양한 바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진 시황의 통일이었다. 그 통일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에 그치지 않고 도량형의 표준화, 도로망의 정비, 문자 통일과 분서갱유 등을 통해 경제적, 문화적 통일을 이루어 중국문명이 중화제국이라는 몸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온 세상을 [天下]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그것을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해서 보았다. 제국으로 조직되어 있는 中華 즉 문명이 확립되어있는 영역과 제국 밖의 만이(오랑캐蠻, 오랑캐夷),즉 문명이 덜 미친 영역이었다. 그리고 천하 전체를 제국의 연장선 위에 조직하려 노력했다. 천자를 중심으로 문명의 동심원을 그리는 천하 체계…..
중국의 소수 민족 중 만주족은 1,500만의 인구를 가진 비교적 큰 집단이다. 그러나 만주어를 일상 생활에 쓰는 사람은 전혀 없다. 만주어를 쓰는 사회가 사라진 것이다. 만주족은 1644년 중국을 정복하고 청왕조를 세워 1910년까지 중국을 지배했다. 그런데 지배자의 언어인 만주어가 한어(漢語)에 밀려 사라진 것이다. 군사적, 정치적으로는 만주족이 지배자 행세를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중국문명에 정복당한 결과다. 그 전에도 중국을 정복하고 왕조를 세웠던 이민족들이 거듭해서 겪은 일이다.
한민족의 정치적 독립이 역사상 가장 큰 위협을 받은 몽골 정복기에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될 것을 청원하는 움직임이 고려 내부에서 있었으나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합병 청원을 기각했는데 그 이유는 고려가 중국과 다른 문화 전통을 지키면서도 높은 문명 수준에 도달하여 중국 문명에 스스로 어울리지 못하는 미개한 나라처럼 병탄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존재를 보장해온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력이었다.
서희의 강동 6주 할양이라는 전화위복의 결과는, 고려에 대한 거란의 요구는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자기네와 조공관계를 맺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동 6주는 당시 여진족 거주 지역이었다. 강동 6주를 고려에게 주어 고려로 하여금 여진을 견제하게 하는 것이 거란의 뜻이었고, 서희는 이 뜻을 잘 읽었기 때문에 담판에 성공한 것이었다. 고려 침공 당시 거란은 대규모 중국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 침공은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거란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여진과 고려였다.
삼국통일이 임박한 시점까지 신라의 국력은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이 백제에 대해서도 미약한 실정이었다.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에 입조해 원병을 청한 것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지 통일의 위대한 포부가 아니었다. 백제 정벌의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신라의 공헌은 미미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할을 부풀려 보여주려 시종일관 애쓰지만, 백제 정벌 때 당나라 병력은 13만, 신라병력 5만이었다.그리고 황산벌 전투를 박진하게 그려놓았지만, 진짜 전투는 기벌포에서 당나라 군대가 치른 것이었다. 기벌포 방면의 백제 주력군은 병력 10만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군에 맞선 계백의 병력은 불과 5천이었다. 신라군이 약속 기일을 어겼다고 소정방이 펄 펄 뛰었던 것은 동맹군으로서의 신라군의 신뢰성 때문이었다. 자기네 싸움에 원군을 불러놓고 자기네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그것이었다. 5만의 군대가 5천의 적군에 가로막혀 제일 중요한 전투를 놓치는 꼴이었다.
소정방이 신라군의 위약을 문책하려 했을 때, 그렇게 나온다면 당나라와 먼저 붙겠다고 김유신이 기염을 토한 것은 당나라 측의 필요를 꿰뚫어본 허장성세였다. 신라까지 등지면 너희가 간절히 원하는 고구려 정벌이 쉽겠냐? 백제가 깨졌으니 우리는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하는 배짱이었다.
고구려는 고구려인만의 민족국가가 아닌 광역국가이며 다민족국가였다.
장성이라 하면 밖에서 오는 오랑캐를 막아낸다는 대외적 용도를 누구나 떠올린다. 그런데 어찌 보면 안의 백성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용도가 그 못지않게 컷을 수도 있다. 농업국가 중국에게는 주변의 유목지대로 인구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를 통해 불교는 국교의 위치에 있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신라는 527년(법흥왕 14)에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의 불교 공인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느낌이 든다. 150년에 이르는 고구려와의 시차는 중국문명 도입에 유리하고 불리한 차이로 설명하기에 너무 큰 것이다. 외래 사상의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국가 체제 정비 및 국제 정세와 관련된 문제로 이해 해야 할 것. 고려 말년 불교의 극심한 보수반동화는 조선조의 억불정책을 불러왔고, 그 결과 불교는 전성기의 장엄한 모습을 잃고 말았다.
고려의 몽골 항복 조건에는 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을 것, 몽골군이 모두 철수할 것, 다루가치를 두지 않을 것 등 고려 측 요구 조건이 반영되었다. 한지파 정책이 적용되었고, 또 요긴한 시점에서 고려의 항복이 반가웠기 때문에 이런 관대한 조건이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이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기 오래전부터 반도국가는 중국 국가와 오랫동안 조공-책봉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명나라와 맺은 관계에는 종래 중국과의 관계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었다.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명나라를 받드는 ‘사대’의 의미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조선말기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았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쇄국을 주장한 조선의 위정척사론자 중에는 일본과 서양을 배척할 뿐 아니라 청나라까지 오랑캐로 몰아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중국 중심 천하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당시 조선 지식층의 주류였다.
주요 내용을 더 쓰다가 보면 책 되겠다… 여기까지…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어려웠던 시절 우리 것이 최고라는 자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더 낳은 곳으로 더 멀리 가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구라는 작은 촌락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우리 것을 정확하게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본 것 들을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그런 시각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객관성을 더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책에서 내내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다양한 시각과 시점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또 한 차례 史觀의 태풍]이 나를 거세게 흔들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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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한국史 - 김기협지음/돌베개] 우리의 역사를 무조건 최고라고만 말하지 말고 다른 나라들과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지켜오고 최고로 만들어 왔는지 그리고 세계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었었는지 등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바라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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