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국가의 회화 – 한국학중앙연구원지음/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2.13 | 목록
발행일 2011년 5월 9일 | 면수 372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28,000원

왕과 국가의 회화 – 한국학중앙연구원지음/돌베개

책 값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서 가능하면 구간을 할인 받아서 사는 편인데(역사 서적은 예나 지금이나 내용이 크게 변하지 않고,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신간 구간의 의미는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 책은 내용이 마음에 들어 바로 구해서(사지 않고 구해서…^^) 읽게된 책인데….지난달에 나온 따끈 따끈한 책이다. 소위 말하는 신간~

저자는 책머리에 이렇게 이책에 대해서 자신들이 압축 요약하고 들어간다.

(한방에 정리가 되서 별도로 서평이 필요 없을 듯하다….^^)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왕실문화총서 발행 사업 중 왕실의 미술 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왕실문화총서 발행을 위한 제1단계 연구는 왕실의 행사, 왕실의 일상,그리고 왕실의 미술 세 분야로 나뉘어 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에 걸쳐서 수행되었다. 왕실의 미술에 대해서는 궁중회화로 범위를 좁혀 조선시대 부터 대한제국기를 지나 일제 강점기 이왕가가 존속하던 시기까지의 궁중회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려는 목적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책은 3권으로 정리될 궁중회화 연구에 대한 첫번째 결과물이다.』

한장 한장 넘기면서 밑줄 그으며, 인터넷 뒤져가면서 보게 되는 재미난 책인데 전반적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왕과 국가의 회화를 다루는 책답게 그림과 사진이 아주 많이 담겨져 있다.. 이 많은 그림들을 어떻게 수집하고, 편집하고, 해설을 정리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과 사진이 많은 책이다. 물론 질서정연하게 배치되고 편집되어 읽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또한 이 책은 329쪽부터 372쪽 까지의 43페이지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최근 교양서적이나 일반 서적에 각주,미주가 사라진지 오래다. 내가 알기로는 책의 가격을 올라가게 되면서 원가절감(?), 책값을 싸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부록(각주,미주,참고도서목록,찾아보기)을 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을 위해 연구하고 집필한 4명의 연구원들과 편집자의 학문적 고집은 부록을 그대로 사용하게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책 내용에도 참고문헌, 도판 목록 찾아보기를 꼼꼼히 기록하여 이 책을 기반으로 좀 더 학문적으로 깊게 더 연구할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정성들여 기록하여 확장성을 가질 수 있도로 해둔 것은 저자와 편집자에게 감사한다.

이런 저런 점들로 인해 나는 인문, 역사서를 즐겨보는 편인데 참으로 오랜만에 정성들여 만들어낸 책을 만났구나…. 라는 생각에 고마움이 샘솟는다.

왕과 국가의 회화에 대해서 잘 정리된 내용이 참 깊고 알찬 책이다.

1부는 『궁중회화의 세계』로서 궁중회화가 무었인지를 다룬다. 어진,공신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왜 만들어 지는가와 산릉도, 지형도, 건물도는 무었인가, 도감의궤와 의궤도, 반차도 등을 다루어 궁중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해준다.

궁중회화는 궁궐 안에서 제작되고 소용된 그림이라 말할 수 있다.


왕실회화와 궁중회화는 미묘한 차이를 둔다, 왕실이란 용어는 ‘국가’라는 개념을 배제시키며, 궁중은 궁궐의 공간적 제한


국가에서는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보관함으로써 그들의 공에 보답의 표시를 하였다.


국가의례의 시각적 기록인 공식기록물 의궤도는 사고등에 영구히 보존되었지만, 궁중행사도는 관료들의 개인 소장을 위해 좀더 사적인 목적에서도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어진은 왕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 어진의 보존은 왕실의 안위와 계승을 의미하였다.


주자성리학적 제의의 영향으로 영정을 대신하여 신주를 모시는 관습이 정착된 17세기에는 어진 제작이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왕들은 자신이 가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궁금증을 그림을 봉진케 함으로써 해소하였다. – 산수형세도,산천형세도,지형도,형지도,축성도,산릉도,태실산도 등.


현전하는 최고의 의궤는 1600년 의인왕후의 국상관련된 의궤들에서 1928년 순종부묘주감의궤까지 이다.


지금은 의궤의 그림을 ‘의궤도’라고 통칭하지만 당시에는 도식,도설,반차도,견양도,도형이라 지칭하였다.


반차도는 의주에 따른 관원과 의물의 위치, 순서, 숫자를 표시한 그림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반차도와 같은 개념의 용어이다. 반차도는 이동하는 행렬도 형식으로 그리거나, 일정 공간 내의 설위반차를 글자로만 표기한 형식으로도 그렸다.


반차도는 의궤에만 수록되었던 것이 아니다. 예문과 관련된 반차도는 예의 실행과 준비과정에서도 필요하였으므로 관청에서 소장업무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도식을 그려 놓고 왕과 신료들은 의례 절목을 논의하고 실제 행례나 예행연습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반차도는 행사의 준비과정에서 왕의 열람을 위해 봉진되었다.


큰 행사는 보통 3차례 예행연습을 치르는데, 도감에서는 주로 초도습의(初度習義)를 하기 전에 미리 반차도를 봉진해 왕의 재가를 받았다.


모든 의궤에 반차도가 실렸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반차도는 행렬반차도로서 내입 반차도를 담당하였던 해당 방의 의궤 끝에 수록되는 것이 보통이다.


왕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 의궤와 여러 곳에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 의궤는 달랐다. 분상용 의궤의 반차도는 이미 17세기 후반이 되면 목판과 필사의 방법이 혼용되지만,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는 시기에 관계없이 전체가 손으로 그려졌다.


대한제국기의 반차도는 죽책에서 금책으로, 옥인에서 금인으로 바뀐다. 물론 표지도 붉은 색에서 황제의 위의에 걸맞은 황색 비단으로 바뀐다.


어진을 제외하고는 의궤와 반차도에는 왕을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대한제국기에 비로소 500여년의 오랜 관습이 깨진다. 어진 화사 지낸 채용신이 그렸다고 전하는 <대한제국동가도>에 적색 곤룡포를 입은 왕이 그려져 있다.


왕과 종친들의 회화의 범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채색을 다루는 것은 화원들의 업무였고 사군자 정도의 수묵 사의화를 통해 군자로서의 교양을 넓히는 수준이었다. 이를 벗어나면 군신들로 부터 한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일월오봉병은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궁중장식화로서 왕의 생사와 상관없이, 왕이 임하는 장소가 어디든지에 관계없이 왕의 존재 뒤에는 오봉병이 설치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꽃 중의 왕이라는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모란병풍은 왕실이나 사가에서 혼례에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인식, 모란그림, 그중에서도 모란병풍은 일월오봉병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궁중장식화였다.


궁중회화의 특징 ① 전례에 대한 상고(尙古)를 매우 중요시했다. ② 왕이나 왕실 가족이 그린 것을 제외하면 거의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나 지방의 화사에 의해 생산된 그림이다. ③ 궁궐을 장실할 때에는 목조건축에 필요한 병풍 형식이 절대적으로 선호되었다. ④ 명료한 윤곽선, 오방색에 기초한 농채, 부감시, 다시점, 좌우대칭의 균제미가 선호되었다. ⑤ 길상(吉祥)의 시각화에 주력. ⑥ 민화와는 차별해야 한다. ⑦ 한국 궁중회화와 중국 궁정회화의 차별성. 가깝고 청나라 미술과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분명 다르다.


궁중회화는 제작 목적과 용도, 제작자와 향유층을 고려할 때 대략 다음의 일곱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궁중 회화중 가장 중요한 어진,② 행정에 필요한 각종 실용화, ③ 예치의 실천과 국가예전의 시각적 보전을 위해 제작된 의궤, ④ 국가 행사의 재현과 기념을 위해 제작된 궁중행사도, ⑤ 왕의 덕치와 교육을 위한 감계화, ⑥ 왕과 왕족의 감상과 취미를 의해 그린 그림, ⑦ 궁궐건축을 장식했던 궁중 장식화.

2부 『조선시대 왕의 그림취미』에서는 지금까지의 왕실회화 연구는 궁중기록화를 비롯하여 왕의 초상화인 어진, 왕실 기록문화의 정수인 의궤, 화원 화가와 화원제도의 운영, 장식성이 뛰어난 궁중 장식화, 왕실 서화 수장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좀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왕을 주체로 한’왕의 회화취미’를 다룬다.

왕의 취미를 알아보기에 앞서 왕이 의무적으로 감상해야 했던 감계화(鑑戒畵)부터 살펴본다.


감상용 그림은 사대부에게는 교양일 수 있지만 왕에게는 말예(末藝)로 간주되었고, 이는 왕의 그림취행을 제한하고 취미 활동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감계화는 거울로서 경계하다는 뜻으로서 교훈과 감화를 주는 그림으로서 감상화와는 차별화됨


세종은 난화와 죽화를 즐겨 그렸으며 개인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그림의 공적인 기능과 화원들의 사실적인 기량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성종은 그림감상을 무척 즐겼고 이해 또한 깊었으며 궁궐내에 구현전이라는 곳에 별실을 마련하고 화가를 출입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에게 영향을 받아 궁궐내에 화원들이 머물던 내화청을 운영하였고, 사실주의적 성향의 그림을 선호하였다. 중종은 자신의 취향은 아니지만 감계화에 큰 호감을 가졌다.


선조는 서화에 대한 안목이 높았고, 사군자화에 뛰어났으며 중년에는 난화, 말년에는죽화를 즐겨 그렸다. 인조는 감상화와 채색 그림을 선호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초기보다 감상화 비중이 선호되기 시작.


왕이 그린 그림은 많지 않다. 어화는 감상의 단계를 넘어 화필을 잡는다면 이를 경계한 신하들과 여러가지 불편한 논란에 휩싸이게 되므로 오늘날 어화로 전하는 작품이 몇 점에 지나지 않는 이유이다. 인종의 묵죽도, 선조의 묵란도, 묵죽도, 정조의 묵매도를 비롯한 수묵화 6점, 그리고 현종의 산수도 등이 있다.

3부는 『조선왕실의 회화 컬렉선과 궁중미술관』으로 왕실이 운영한 회화 컬렉션의 개황, 작품을 보관했던 궁궐전각,관리체계등을 살펴본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수장품을 전문적으로 보관한 전각이 있었다.소외 삼각이라 불리는 청연각, 보문각, 천장각을 세워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고 서적과 예술품을 보거나 하는 궁중도서관, 서화수장처로 활용.


어진 못지않게 어필도 중요하게 수장했었다.


국왕의 초상을 보관했던 진전, 국왕의 글씨와 그림을 보관했던 존각,


규장각은 크게 내각과 외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각에는 어제,어필을 봉안한 봉모당인 내각, 중국도서를 보관한 개유와와 열고관, 조선의 서고를 보관한 서고, 이문원, 임금의 어진과 어필을 보관한 서향각이 속했고, 외각으로는 교서관과 외규장각이 있었다.


봉모는 임금의 글인 모훈을 받드는 것을 의미한다. 봉모당은 역대 임금의 유훈, 편지, 족보,서화작품, 문집, 묘지명등 왕실 관련 자료를 전문적으로 모아두던 곳이다.

4부는 『제국을 꿈꾸었던 전환기의 한국화단』으로서 19세기 후반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 요구가 빈번해지던 전환기의 국가와 미술에 대해서 다룬다.

도화서가 1894년(고종31) 갑오개혁 때에 폐지되고 그 일부가 궁내부 규장각의 장례원에 소속되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1895년에 규장각이 규장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을 때에는 기록사란 곳에서 맡아 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는 노안도(蘆雁圖-갈대와 기러기 그림)이다. 중국 육조시대부터 그려져 오던 것으로 북송대에 그림의 형식이 완성되어 남송 대 이후 유행함,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중기에 들어와 조선시대 중기와 말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특히 말기에는 노안이 노년의 평안을 의미하는 노안(老安)과 발음이 같아서 많이 그려짐, 노안은 옛날 중국의 기러기들이 겨울을 나기 위하여 양자강 남쪽으로 날아왔다가 봄에 다시 날아갈 때, 살이 쪄서 높이 날지 못해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들자 기러기들이 갈대를 물고 날아 위기를 모면한데서 나온 것이다. 노안도는 노년의 평안 뿐만 아니라 보신책을 강구하고 신중히 처신한다는 뜻을 지니면서 구한말의 혼란기에 크게 유행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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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국가의 회화 - 한국학중앙연구원지음/돌베개]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문화총서 발행 사업 중 왕실의 미술 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물로서 궁중회화의 큰 틀을 이해하기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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