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 심재우,한형주,양민혁,신명호,박용만,이순구 지음 / 돌베개
조선의 왕족 시리즈 3편 중의 최고위 계급인 왕의 일생을 다룬다.
왕족 시리즈 세 권은 바로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 그리고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에서 추진한 ‘왕실문화총서’ 발행 사업의 예산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 과제의 그 결과물을 책으로 내기로 하고 연구와 집필에 들어가서 연구하고 풀어내어 책으로 엮었다.
역사 속의 특정 귀족계층을 지목하여 그 계급의 역사 속의 위치와 살아가는 과정들을 통찰하는 책은 이 시리즈 이외에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읽은 특정 계층에 관한 책들은….
왕의 화가들/돌베개, 조선 전문가의 일생/글항아리,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역사비평사, 옛 그림 속 양반의 한평생/돌베개, 조선 왕을 말하다/위즈덤하우스, 조선시대 조선 사람들/가람기획 정도…
조선시대 왕의 위상과 권위 그리고 역할을 중심으로 왕의 업무와 사생활, 학문적 수준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왕은 어떤 질병에 시달리고 어떻게 건강을 관리했는가에 대해서도 다룬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일상과 업무를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적 그림으로 비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사극은 그런 권력을 중심으로 배신과 음모, 사랑과 치정, 충성과 배신의 극적이면서도 대립각을 세우는 그림으로 클라이맥스로 끌어가서 반정 혹은 반정의 극복 아니면 전란의 폐해를 딛고 성군으로 일어서는 뭐 이런 구조.(당연히 이 그림에 애정라인이 빠지면 안 되는 불문율도 있다.)
하지만 왕의 실상을 열어보면, 끊임없이 명, 청으로부터 견제와 왕권에 대한 불신임 혹은 교체에 대한 무언의 압력 등을 받았거나, 왜 와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서 몽진을 해야 하거나, 역성혁명의 시도를 비롯하여 숱한 반정의 시도를 제압해야 했으며, 곳곳에서 발생한 민란도 문제였었고…. 외척의 득세에 대한 견제와 성리학적 기조에 의해서 왕에 대해서 기어오르는 것처럼 비치는 것도 모자라서 왕명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으면서 개기는 신하들의 신권 확보 태도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여야 하고, 사림과 훈구, 붕당의 균형을 맞추면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정치적 지원과 견제구를 수시로 날려야 하는 엄청난 압박의 대상이었던 왕이다.
당연히 적장자가 왕권을 대부분 상속받았으리라 생각들을 하지만 27대 동안 왕위를 넘겨주고 받고 하면서 왕과 왕비의 장남이 정권을 물려받은 경우는 7번에 불과하다.
덕분에 왕은 구중궁궐에서 최고이고 나라의 근본이며 하늘과 동급의 인물인가? 아니면 장수하면서 수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우수한 발전을 이끌었던 몇몇 왕들을 제외하고는 혹시 왕궁에 갇혀서 신하들과 쿠데타 세력들과 대항하며 자신의 위치를 매일 확인하며 지키려 했던 존재인가?라는 물음도 생긴다.
왕에 대해 다가가려면 최소한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있으며, 이보다 더 축약된 내용을 모으기도 힘들어 보이는 작지만 무거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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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에 따르면 원래 우리나라에서 ‘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고유한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예컨대 신라의 경우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에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이중 ‘이사금’은 ‘치아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를 뜻한다고 하며, 이것이 오늘날 ‘임금’으로 변화했다.
–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시대에 왕권은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통치 체계와 각종 법규를 모아놓은 조선의 대표적인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왕의 법 집행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절차 등을 명시했지만, 직접적으로 왕의 권한이나 역할을 명확히 제시한 조항을 찾기 어렵다. 이는 왕의 권한이 작아서라기보다 왕권이 워낙 넓은 범위에 걸쳐 있어 법으로 제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음을 의미한다.
– 조선의 27명의 왕 중에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만 묘호에 ‘조’자를 썼다. 임진왜란 이후 묘호를 ‘종’에서 ‘조’로 고친 사례가 네 차례. 즉 선조, 영조, 정조, 순조의 묘호를 개종. 그러므로 임란 이전에 ‘조’를 쓴 왕은 태조, 세조, 인조. 몽골 간섭기에는 충렬왕, 충선왕 등의 몽골 황제에 충성한다는 충자가 왕의 칭호에 붙었을 뿐 아니라 조나 종이 아닌 ‘왕’자를 썼다.
– 조선왕조는 중앙집권화된 관료제를 특징으로 하였으며, 국가의 소유자이자 관리자인 왕은 관료제와 권력 구조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관료 기구를 직접 움직이는 주체로서 막강한 권한이 왕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왕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독단적,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 탕평책은 당파를 조정하려던 것이라기보다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운영하려던 정책.
– 조선시대 27대 국왕 가운데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단 7명.
-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재위하였던 국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7세였는데, 이들의 즉위 당시 평균 연령은 24세이며,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9년이었다. 평균 재위 기간을 고려와 비교할 때 5년 정도 긴 것이어서 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음을 나타낸다.
– 현재의 대통령의 취임식과 달리 축제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슬픔을 억누르고 엄숙함을 유지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선왕은 즉위 후 ‘효’를 내세워 선왕을 높이고 중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승인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
– 양위로 넘겨준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예종, 순종. 사위로 넘겨준 적장자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은 아이러니하게 왕권을 강력하게 행사한 왕이 없다. 둘째 이하이거나 후궁의 소생인 경우는 광해군, 효종, 영조 등이고 선왕과 부자(조손) 관계가 아닌 경우도 성종, 명종, 선조, 철종, 고종 등의 다섯 사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부족하여 이를 무리하게 진행될 경우 광해군의 경우와 같이 반정으로 쫓겨나기도 함.
– 중종반정 시 정현왕후 윤 씨는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요청한 것에 대해 사양하는 시늉, 인조반정 시 능양군이 김자겸, 이귀 등과 반정시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정전으로 납시도록 요청했으나 대비는 거절. 능양군이 광해군을 끌고 경운궁에 와서 정전 앞마당에 엎드림. 대비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으나 대비는 거절. 대비는 대보를 달라고 요청하여 가지고 있으면서 정전으로 나가서 대보를 능양군에 전해주지 않고 밤늦게까지 소지함. 능양군은 정전에 엎드려 대기하다. 반정 세력의 압박으로 겨우 넘겨줌.
– 즉위식 이후 교린국(일본과 유구)에 즉위 사실 알리고 양국 간의 우호를 다지며 중국에 알림. 이는 교린국과 달리 통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건국 직후 명나라와 외교를 사대로 규정하고 이에 걸맞은 행동을 취함. 사대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천자로부터 제후로 임명 받는 것이다. 원칙상 제후는 천자의 궁궐로 가서(이것을 입조라고 한다) 정식으로 책봉례를 거쳐야만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중국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천자가 사신을 보내 왕의 임명장인 고명을 내려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 환구제는 천하에서 단 1명 천자만이 시행할 수 있는 유교 제사. 고대에 다양한 형태의 하늘 제사는 있었지만 유교적인 환구제는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시대 유교가 치국의 이념으로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환구제가 시행되었다. 당시에는 자신들의 국가를 황제국으로 인식. 무신정권을 거쳐 몽골의 간섭을 받으며 위신이 떨어졌고 사회, 경제적 혼란이 커졌으며, 환구제 역시 시행되지 못함.
– 왕의 궁 밖 출입을 신하들은 대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왕이 움직일 경우 그 준비가 만만치 않고 특히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좁은 행동반경으로 왕들은 답답함을 느꼈고, 한편으로 일반 백성들과의 접촉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 여진 정벌은 여진족을 포획, 사살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끔씩 조선의 힘을 보여주어 침략적 야욕을 분쇄하고 아울러 징벌을 주도한 왕권의 강력함을 내외에 과시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대규모 정벌은 성종 대 이후 한차례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비록 효종 대에 ‘북벌론’의 기치 아래 중앙군의 병력 확대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수도와 왕성을 수비하는 정도.
– 선농제와 선잠제는 제사 이후에 왕이 동교의 적전에서 다섯 번 가레질, 왕비가 채상단에서 뽕잎을 다섯 가지를 따고, 이후 내외명부의 1품이 일곱 가지, 2품과 3품이 아홉 가지를 차례대로 땄다. 이후 왕비가 궁으로 돌아가고 내외명부가 잠실에서 뽕잎을 누에에게 뿌리면 의식이 마무리됨. 이렇게 농사의 시범을 보였다. 적전은 여기서 나온 소출로 국가의 각종 제사의 비용으로 쓰던 농지. 서적전에서는 5천 석이 넘게 소출이 남.
– 왕의 기상시간은 5시, 경연의 강의 내용은 철저하게 이데올로기 주입식.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주석에 따라 읽고 시경에 나오는 소박한 서정시는 엄숙한 윤리적 교훈으로 해석. 시경 국풍과 비유하여 반대를 비판. 국풍은 시경의 편명. 경연 교제는 경과 사를 위주로 하고 자와 집은 철저히 배제.
– 왕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관리에게 질문하는 세 가지는, 출신과 이전 관직 그리고 지방관이 해야 하는 주요한 임무는 무엇인가와 부임하게 될 지역이 안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무엇인가 임.
– 주자가례에는 "군자가 장차 궁실을 지을 때에는 먼저 사당을 정침의 동쪽에 세운다."라고 하여 궁실보다 사당을 먼저 건립하도록 하였다.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예제 건축 기준에 의한 좌묘우사를 우선적으로 건립하고 궁궐 내에는 국왕의 4대조를 모신 사당인 원묘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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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한국학중앙연구원 지음/돌베개] 조선시대의 초월적 존재이자 왕실을 대표하는 존재인 ‘국왕’이 되는 과정, 즉위식과 그 이후의 삶 속의 위상과 역할, 통치행위와 관련된 내용 그리고 생활문화사적 시각의 여가와 독서, 건강 관리 등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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