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혼례식 풍경 – 신병주, 박례경, 송지원, 이은주 지음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9.6 | 목록
발행일 2013년 1월 14일 | 면수 268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22,000원

왕실의 혼례식 풍경 – 신병주, 박례경, 송지원, 이은주 지음 – 돌베개

왕실의 혼례식은 최고의 경사스러운 행사였으며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온다.

얼핏 들여다보면 왕의 즉위식이 가장 화려할 것 같지만 왕의 즉위식은 선왕의 죽음과 이어져서 축제라기보다는 선왕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왕의 즉위라는 장엄함이 공존하는 행사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선왕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현과 새로운 왕의 탄생의 준엄함이 공존하는 장엄하다는 표현이 어울렸을 것이다.

우리 왕실의 혼례식 풍경은 우리 역사에서 뗄려야 뗄 수 없는 이웃인 중국의 여러 의례와 관련된 규범들이 들어왔고 그 다양한 사료를 통해서 들어오고 행해짐을 따라가볼 수 있다. 덕분에 현재 행해지고 있는 우리의 혼례 의식의 절차 연원은 매우 오래된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 나름대로 변해온 과정도 찾아 볼 수 있다.

함진아비가 사주단자를 짊어지고 함 사라고 외치는 일, 사주단자에는 무엇들이 어떻게 적혀있었고 왜 들고 갔는지, 신랑이 신부 집에서 살았는지, 신부를 신랑이 가서 둘러업고 왔는지, 폐백은 왜, 언제부터 올렸는지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왜 신부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신혼집으로 오는지 등등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들려준다.

물론 현재의 격식에 대한 질문에 직접적인 질문과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단지 여기서 유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번득 번득 들 정도로 근접하고 아하… 싶은 대목도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오랜 과거와 최근 그리고 현재까지의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무튼~

왕, 왕세자, 왕세손 등의 지위에 따라서 격을 달리하는 혼례식이 있었고, 그를 준비하는 준비 기구 또한 가례도감, 가례청 등으로 등급을 달리해서 행하는 다양한 법도가 존재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호화롭고 찬란하게만 흐를 수 있는 혼례식은 아니었으며 엄격한 제도와 규정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영조의 경우에는 국정 철학에 따라 사치를 방지할 것을 다짐하는 대목도 여러 번 나온다.

최근 이벤트화되고 가족 간의 잔치가 아니라 신랑, 신부 간의 상호 간의 잔치, 친구들 위주의 연예인이나 축가를 딸랑 불러주고 장난스러운 행사 위주의 한 시간 때우기 결혼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에 비해서 당시에는 두 남녀의 결합이라는 측면보다 이를 통해 왕통을 이어주어 그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더 컸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가례도감 20종 – 왕 9건, 왕세자 9건, 왕세손 1건, 황태자 1건)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는 왕실 혼례식 과정을 정리한 가례도감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다양한 사료들을 통해서 혼례의 연원과 의미, 중국과 고려, 조선 등의 왕실 혼례식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 혼례 의장과 음악 부분 그리고 혼례의 복식까지 다룬다.

***

– 전통적인 국가의 의례는 오례로 분류. 나라의 여러 신을 섬겨 상서로운 복을 받는 길례, 나라의 흉한 근심사들을 애도하는 흉례, 무용의 위의를 통해 나라를 균평하게 다스리는 군례, 빈객을 맞이하여 국가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빈례, 아름다운 의식으로써 만민을 친목하게 하는 가례. 혼례는 그 가운데 가례에 속함. 오례의 출발점이 되는 의례로 중시하여 애초에는 조상신을 모신 양가의 사당에서 경건하게 시행

– "의례"는 주대 말엽에 성립된 책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의례서. 진시황 분서갱유로 인해 망실되었다가. 한 초에 와서야 고당생이라는 학자가 암송으로 기억해 오던 것을 한대의 예서체 글씨로 받아써서 복원한 것이 "의례’ 금문본. 오늘날 전하는 의례는 동한 말엽의 학자인 정현이 고문본과 금문본을 모두 참고하여 주석을 달고 정리한 것을 당대의 학자들이 다시 소를 달아 해석한 것.

– 의례 총 17편 가운데 두 번째 편인 ‘사혼례’는 당시 사士 계층의 혼례 의식을 기록한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 의 육례 및 친영 이후의 의식 절차와 혼례에 사용되는 예물과 기물, 그리고 언사 등이 기록되어 있어 한대 이후 왕실과 민간 혼례 의식의 규범을 정하는 데 준칙으로 활용되었다.

– 『의례』「사혼례」의 주요 의식 절차와 상징적 의미

– 납채 : 남자 집에서 여자 집에 신부를 채택하는 예를 드리는(혼인을 청하는) 의식 절차

– 문명 : 신랑 집에서 혼인의 길흉을 점치기 위해 결혼할 여자의 성씨를 묻는 의식 절차, 이미 알고 있는 여자의 성씨를, 정식으로 묻고 답하는 의례 절차를 거쳐서 확인하는 것. 신랑측 사자를 위해서 자리를 마련하여 술과 간단한 안주를 대접

– 납길 : 신랑 집에서 점을 쳐서 얻은 길조를 신부 집에 알리는 의식 절차, 기러기를 예물로 사용하여 이를 통하여 양가의 혼사가 결정

– 납징 :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폐백을 드림으로써 혼례를 성립시키는 의식 절차, 징은 성의 의미로 혼례가 성립되었다는 듯.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검은색과 옅은 진홍색 비단 10단과 사슴가죽 2장의 예물을 혼인 성립의 징표로 드리는 납징의 의식을 거행. 신부 집에서 납징의 예를 받고 나면, 신부가 시집갈 것을 허락한 것이 된다.

– 청기 : 신랑 집에서 정한 혼인날을 신부 집에 알리는 의식 절차.

– 친영 : 신랑 될 사람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 될 사람을 맞이하여 신랑 집으로 데려오는 의식 절차. 오늘날의 결혼식에 해당

– 동뢰연 : 신랑 집에 도착한 부부가 희생고기를 같은 그릇에 먹는 동뢰연 의식 절차.

– 고려시대 혼례식은 왕비나 세자빈의 혼례식이 있을 때 조선시대처럼 나라 전체에 금혼령을 내리고 대대적으로 간택하지 않고, 적당한 인물을 물색해 결정.

– 고려도경에는 ‘귀인이나 벼슬아치 집안에서 혼인을 할 때는 예물을 쓰지만, 백성들은 단지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 또 부유한 집안에서는 아내를 3~4인이나 맞이하는데 조금만 맞지 않아도 헤어진다.’라고 하여 고려시대 혼례에서 납폐를 행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 고려 충렬왕이 혼인을 한 해부터 몽고는 고려의 수많은 민녀를 몽고인과의 혼인 상대로 요청하였다. 원나라에 바칠 공녀 차출이 시작되면서 충선왕 때의 사대부가에서는 어린 딸을 숨기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를 피하기 위하여 조혼이 성행하였다.

– 고려의 혼인 풍속이 남귀여가(혼인 후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로 처가에서 혼례식을 올리므로 친영 절차가 필요 없었음. 남귀여가혼은 혼인날 저녁 사위가 처가에 도착해 별 의식을 치르지 않고 신부와 동침한다. 둘째 날 처가의 친척들과 신랑 친구 및 기타 많은 하객에 대한 잔치를 벌인다. 셋째 날 신랑과 신부를 위해 유밀과상을 차려 연향하는데 음식의 높이가 거의 방장에 이르렀다. 신랑과 신부는 이때 비로소 상견지례를 하고 함께 환합주를 마시는 합근례 및 함께 음식을 드는 동뢰연을 베푼다. 신랑 신부가 연향을 마치고 남은 음식은 시가에 싸 보내며, 이후 신부는 시부모를 찾아뵙는다.

– 고려시대에 친영례가 단지 왕실혼에만 국한되고 사서인층은 여전히 남귀여가혼을 했던 원인은 고려 친족제도의 특성 때문. 즉 고려는 중국과 달리 부계 단계 사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상속도 남녀균분.

– 처녀단자에는 첫 줄에 모도 모읍, 둘째 줄에 처녀의 성명과 생년월일시 및 사조의 이름을, 셋째 줄에는 중국 연호와 월일을 쓰고 그 아래에 부친의 이름을 쓰고 서명했다.

– 삼간택 이후 가례 날까지 별궁에 머물며 장래 국모 수업을 함. 별궁은 태평관, 어의궁, 운현궁 세 곳이 가례도감에 나옴.

– 조선시대 왕실 혼인에서 준수된 여섯 가지 예법 즉 육례는 국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인 납채,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납폐), 책비와 친영의 날짜를 잡는 고기,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신부를 모셔오는 의식인 친영, 국왕과 왕비가 함께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였다. 친영은 이 육례 중에서도 최고의 행사로 오늘날 예식장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에 해당한다.

– 초간택시 후보 처자들은 분은 발라도 좋으나 얼굴에 붉은색을 칠하지 말라는 분부에 따라 가볍게 화장하고 간택에 임했다. 처녀들의 피부, 요즈음으로 치면 쌩얼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예전의 왕조의 계보를 잇는 혼인은 현세대의 가족을 구성하는 첫 출발점과 같다.

지금은 많이 단순화되고 간소화된 결혼식 풍경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나로서는 여러 절차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고민하던 부분들이 중국의 『예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거 왕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고, 내부의 적들과 싸우면서 정권을 유지하여야 하며 왕실의 법통을 이을 적장자를 생산하여 또다른 적장자를 생산해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결혼과 자녀 양육을 포기하는 사람들까지 나오는 각박한 세상…. 혼례식에 대해 알아보는 의미가 퇴색되는 느낌이 온다….

미래에 대한 기대, 현재의 행복을 후대까지 잇겠다는 발전적 생각이 결혼을 앞당기고, 화려하게 하고, 자녀를 다산하는 것으로 이어질진대… 혼인율이 낮고, 출산율이 낮은 단순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대책을 내놓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아무튼, 미래의 적장자를 생산해서 왕조의 적통을 이어야 하는 막중한 행사인 혼례식에 대해서 알아봤다.

그 혼인식에 대해서 영조 시절부터 검소하게 하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시간 남짓의 이벤트로 마무리되는 지금의 혼례식을 좀 더 의미 있게 거행하면서 보다 더 검소하게(적은 비용으로) 치르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
[왕실의 혼례식 풍경-신병주 외 3명 지음/돌베개] 왕조의 계보를 잇는 왕실의 혼례의 유래와 변천사 그리고 절차 등을 알아보고 혼례 속에 들어있는 집권층의 권력과의 상관관계 및 혼례 절차의 의미 그리고 계급별 혼례 절차와 복식까지 다룬 책.
—————

p.s

2014년 10월에 들었다가, 다른 책을 먼저 보게 되어 1년 정도를 책장에서 나를 기다려준 책.

책 속의 좋은 자료들을 옮겨왔지만… 조선시대 혼례식에서 음악은 울리지 않았다…. 악대들이 정복을 하고 악기들을 진설하고 대기는 하였으나… 음악이 울려 퍼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참고해야 할 듯.

8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