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 – 박세길 지음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1.7 | 목록
박세길 지음
발행일 1988년 11월 15일 | 면수 304쪽 | 판형 국판 148x210mm

초판이 나온 것이 1988년 11월 10일이고 나와 인연이 된 날이 1988년 12월 2일이다.

1986년 8월 매우 어지럽던 시절 대학을 휴학하고 군입대한 후 동부전선 강원도의 이름 모를(알지만 사정상) GP와 DMZ에서 근무를 서고 비무장지대에서 수색과 매복을 밥 먹듯이 하다가 1988년 11월 중순에 전역을 하고 처음 산 책이다.

읽은 기억이 전혀 안 나지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던 기억만은 아직 새록새록 하다.

1953년 휴전 이후 한 세대가 채 쓰러지기 전인 것은 물론 생생한 증언자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었던 전후 30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군대 생활 중 대부분의 일들이 DMZ 수색과 매복인 덕분에 눈은 매복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늘 같았던 기억이 새롭다.

매복지 한켠에 놓인 소총에는 롱탄창이 꽃혀있었고, 그 탄창 안에는 25발의 탄이 언제든지 방아쇠만 당기면 나갈 수 있는 상태, 말 그대로 커그 온더 피스톨…..

그 총을 만지작 거리면서…

"왜 우리 민족은 이렇게 남북으로 나뉘었으며 언제까지 마주 보고 총구를 겨누며 살아야 하나?"

"누구를 위한 분단이고 누구를 위한 전쟁(휴전 중이니) 인가?" 라는 생각에 자주 잠겼었다.

그렇게 전역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학교로 돌아가기 위한 시동을 걸던 시점에 만났던 책이다.

이후 2권으로 곧장 이어졌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1988년 12월 이후 2015년 12월인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와는 상당한 인연이 된 책이다.

무려 약 3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수많은 이사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책장에서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일 만큼 적쟎은 울림을 준 책이라서 그런듯 하다.

1,2권만 보고 3권이 언제 나왔는지, 구입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1,2권만 인연이 되다가 우연하게 최근 3권을 만나게 되어 다시 책장 속의 1권을 꺼내 다시 읽어본 책 되겠다.

지금은 대부분 많은 내용들이 정보공개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회자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이긴 하나, 그에 못지않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책 속의 내용을 전혀 모르거나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덕분에 한국 현대사의 가치는 더 중요해지고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잊고 싶은 아픈 과거는 잊어야 할 내용들도 있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내용들도 제법 있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으려 하거나 진실 코드에 접근하려는 수고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그 1권에서는 해방과 정부 수립의 과정, 그리고 곧장 이어진 한국전쟁까지의 스토리를 다룬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 줄로 설명이 되지만 조금 내용을 들여다보자면 민감한 부분이 제법 나온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해방이 가지는 의미, 해방으로의 우리가 얻은 것은 점령 주체의 변경이었고, 이는 곧 일본이 가진 지위를 어떻게 미국이 그대로 가지고 가는지의 점령지 정책 운영의 줄기(아직도 일부는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르는)를 엿볼 수 있고, 동북아의 냉전체제의 희생양으로서 반공 이데올로기의 디딤돌이 필요한 전략적 설계도에 의한 한국 정부의 수립과 한국 전쟁이 38선에서 어떻게 빵! 하고 터지느냐가 아닌 동북아에 미국 중심으로 재무장을 하면서 군비를 확충하는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하게 됨은 물론, 반공을 국시로 이승만 정권이 북진을 주장하고 미국은 오히려 그를 말리는 입장이었던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38선에서 Gun Smoke… 둘 중 한 사람의 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 장면에 누가 먼저 쏜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하튼 그렇게 한반도는 전면전에 휩싸인다.

한국전쟁의 발발이 도대체 언제가 시작이고 어떻게 흘러가서 어떤 사연으로 지리멸렬하게 끌다가 그 많은 젊은 청춘들을 남북이 희생하는 아무 의미 없는 현 교전지를 군사분계선으로 만들자는 말도 안 되는 피의 전선을 만들어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로 현재의 휴전이 그어지는 시점에 남과 북, 미와 소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금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 알아본다.

지금은 많은 자료들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아무도 다가서고 열어보려 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려서 참여와 연대를 기본으로 대의정치라고 하는 유권자의 이해관계를 성실하게 대변하는 정치라는 구조가 상실되고, 부정과 부패를 가리기 위해서 상대방을 종북,좌파,친북으로 매도하는 현상이 만연해지고 있다.

이는 5~60년 전과 무었이 달라지고 무었이 좋아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권자 모두가 건전하고 수준높은 시각과 판단력을 가지는 길 밖에는 없다고 보는데…
도저히 내 주위에는 공부를 하려고 드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보여 안타까울 뿐이고….

견제와 균형이라는 자정기능을 상실해서 윗물이고 아랫물이고 동시에 상해 가는 현상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지금….

친미, 반미, 친중, 반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패와의 전쟁, 전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일이 급선무일 듯 한데….

다들 민주화와 세계화를 부르짖지만, 내가 보기에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의원 자리 하나 노리고 한몫 잡으려 덤비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안타까울뿐이고….ㅠ.ㅠ

아무튼….

이 책이 나오는 시점만 해도 이런 해방공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재해석 등에 관한부분과 현정권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모임도 문제시 삼던 어두운 터널을 막 끝나려는 시점에는 한줄기 햇살과도, 한 컵의 청량음료와 같은 책이기도 했었다.

덕분에 30년을 나와 함께 걸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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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 침공을 개시 1932년 괴뢰 만주국을 수립, 1937년 본격적인 중국 대륙 침공을 알리는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일본은 중국 민중으로부터 의외의 완강한 저항을 받자 실패의 주 요인을 미국이 장개석 정부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라 오판,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전쟁을 태평양으로 확대

– 김일성 부대의 지도자로 알려진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현재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한 인물일지는 여전히 논란거리. 남한 정부에 의해 옹호되고 있는 입장은 김일성은 항일 투쟁의 전설적 인물인 김일성의 이름을 사칭한 가짜 김일성이라는 것, 커밍스 등 일부 한국사 전문학자들은 항일 투쟁 시기의 김일성과 현재 북한의 김일성이 동일 인물임을 인정하고 있다.

– 미, 소 두 강대국은 한결같이 조선의 통일정부 수립보다는 한반도 내에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었다.

–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을 때의 모습은 해방자라기보다는 정복자의 태도. 적진을 점령하듯 남한을 점령하고 하나의 전리품으로 손에 넣었다. 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 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활용했다. 친일 경력이 분명한 자들이 미 군정의 주위에 포진하였고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 관계는 근본적 개혁 없이 계속 온존되었으며 억압적 식민통치 체계 역시 그 완고한 생명력을 유지해나갔다.

– 미 군정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인 신한공사로 귀속한 재산 등으로 과거 일본 총독부를 능가하는 거대 지주, 거대 자본가로서 남한 땅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렇게 압수한 광범위한 재산을 기초로 통치 비용을 조달하고 남한 내 동조세력을 규합했으며 나아가 미국의 영구적인 상품 시장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 예나 지금이나 압제자들은 민중을 아무런 이성적 판단도 하지 못하고 주체성도 없이 휩쓸려 다니는 우매한 집단으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정의로운 투쟁도 압제자의 눈에는 언제나 겁 없이 날뛰는 무분별한 폭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와 함께 해방 후 몇 달 동안에 걸쳐 공식적인 미 국무성 자료가 불만스럽게 인정하듯이 ‘거의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 출신’으로 구성되는 새로운 계층이 통치기관의 요소요소를 장악해 들어갔다. 이들은 ㅘ거에는 사회의 최하층부를 구성했던 부분으로서 남한의 미 군정이 보기엔 새로운 잡것들이 판을 치는 것과도 같이 여겨졌을 것이다. 여하튼 북한에서는 해방과 동시에 일제시대의 식민지 통치 기구를 구성했던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신속히 제거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5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 땅은 모두 몰수되어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농민에게 가족 수에 따라 무상으로 배분되었다. 지주라 하더라도 과거 항일 독립운동에 공헌한 경우에는 특별한 혜택이 부여되었고 토지개혁에 우호적으로 스스로 땅을 포기하는 지주에 대해서는 가옥과 일정한 토지를 소유한 채 고향에서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반항하는 지주들에 대해서는 규정에 따라 가차 없이 토지를 몰수하고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 한 나라의 독립은 그 나라 민중의 자주적인 투쟁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강대국에 의해서도 선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었다.

– 4.3 제주 항쟁은 가혹한 미 군정의 학정과 그것의 영속화를 의미하는 단선단정의 추진이라는 상황 하에서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서 감행됐다.

–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분명해져가고 있던 1949년 상반기에 이미 미국의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중국 본토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됐다. 이로부터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각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라는 전략 방침이 수립되었다.

– 일본의 재무장,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군사기지 설치를 둘러싼 미국과 아시아 민족 간의 끊임없는 충돌 등은 미국에 의해 연출되는 장기간에 걸친 대형 드라마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인해서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개개의 사건들은 실은 하나의 의도와 논리에 의해 서로 밀접히 얽혀 있는 셈이다.

– 기록상으로 볼 때 한국전쟁은 말할 필요도 없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마치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치듯이 갑자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 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치러진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 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25일 본격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한 군대 간의 대소 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화염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불길이 지펴지고 있었다 하겠다. 한국 전쟁의 기원에 관련된 문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쟁이 전면화되고 국제화되는 계기 및 원인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누가 타오르는 불길 위에 기름을 부었는가 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공군의 98% 이상,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가 미군으로 구성된 이른바 국제연합군이 창설되었다. 이리하여 미국 군대는 유엔의 깃발을 손에 들고 유엔의 모자를 쓴 채 한국전쟁에 전면 개입하게 되었다. 또한 유엔은 한국전쟁에서 교전 당사자가 됨으로써 스스로 국제분쟁의 공평한 해결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다.

– 때맞추어 전 한국군을 미군의 단일한 지휘체계에 편입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승만은 "한국군의 지휘권을 귀하에게 양도한다"라고 통고와 명령은 조약이나 협정 없이 1950년 7월 17일 실시되어 오늘에 이른다. 작전권의 이양과 함께 주한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이루어진다. 1. 미국 군법회의가 주한 미군과 그 구성원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행사한다. 2, 한국인이 미군 및 그 구성원에 가해 행위를 범하였을 때는 그 한국인을 미군이 구속한다. 3. 주한 미군은 미군 이외의 어떠한 기관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미국의 요구는 한국 정부에 의해 간단히 수락, 한국전쟁은 초반부터 미국과 북한의 정면 대결이라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보다 적극성을 발휘한 것은 5만에 달하는 경찰들이었다. 북한과 남한의 좌익세력에 대해 경찰은 극단적인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던 데 반하여 하급 장교와 일반 사병들은 종종 우호적이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어진 셈이 되었다.

–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국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불과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국가를 세운 중국은 아직 장개석 국민당의 잔당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고, 수 십 년의 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제를 건설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 대만 문제 등이 있었고, 장개석의 반격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불안한 요소. 즉 중국으로서는 결코 원치 않은 시기에 원하지 않는 형태로 발생한 셈.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자국 방위에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 1950년 11월 3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의 패배를 시인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 중이고 그 원한이 맥아더에게 주어졌다."라고 말했다. 여론의 심각한 반대로 실현 불가능. 유일하게 이승만 정부를 제외하고는 세계 모든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이 한결같이 미국의 원자탄 사용에 대해 반대.

– 개전 직후부터 1950년 9월 말까지만 보더라도 미 공군은 한반도 위에 도합 9만 7,000톤의 폭탄과 780만 갤런의 네이팜탄을 투여한 바 있다. 이는 미국이 지난날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빈틈없는 폭탄 세례에 의한 완벽한 파괴로 인해 1951년 10월 경부터는 출격 명령ㅇ르 받은 미 공군기들이 더 이상 폭격 대상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 1951년 휴전협정 당시 북한측은 38선 중심으로 각각 10Km 후퇴 전쟁 포로의 교환을 미군 대표는 휴전을 위한 군사경계선은 현재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맞섬. 덕분에 양쪽 군대가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하여 계속 혈투를 벌이게끔 강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하루빨리 평화를 회복시키자고 하는 의사가 있다면 전쟁 이전으로의 원상복귀라는 원칙 하에 38도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못 박고 출발해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투가 계속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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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박세길지음/돌베개] 한국의 현대사 중 매우 주요한 두 가지 사안이었던 해방과 분단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다양한 자료를 열어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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