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글쓴이 동주아빠 손병목 | 작성일 2005.1.27 | 목록
신영복 지음
발행일 2004년 12월 13일 | 면수 516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8,000원

일전에 아는 분이 제게 작년에 읽은 책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력이 평균 이하인 저는 작년에 읽은 책들이 무엇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선뜻 그 답을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만약 올해가 지나가고 다시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번에는 단연코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 일주일을 이 책과 씨름하며 지냈습니다. 평일의 온전한 시간을 모두 바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영복 선생의 이 책은 책 읽는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대개 이틀 간격으로 책을 읽고 정리해왔는데 이 책은 도무지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겨우겨우 책을 덮고 난 지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시경,서경,초사,주역,논어,맹자, 노자,장자,묵자,순자,한비자,대학,중용,불교와 신유학 등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실로 광범위한데다, 신영복 선생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독법讀法에 감탄하여 혀만 내두를 뿐 감히 무엇을 옮겨 적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부터 다시 정독을 한 다음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으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월등히 더 나아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삶이 아직 그만한 무게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젊은 날에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며 위안해야겠습니다.

선생께서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미 서론에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인데, 고전 독법은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전의 예시문은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별한 것들입니다. 또한 고전을 강독함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하는데, 그것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해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말이 어려운 듯 느껴지나 책을 읽다보면 선생이 말하는 그 관계론이 무엇인지 ‘느끼게’ 됩니다. 주체로서의 인간과 대상으로서의 자연, 본질과 현상, 물질과 의식을 나누어 생각했던 사고방식의 모순을 알게 되고, 그런 철학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현대의 주류 담론인 초국적 신자유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한 반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관점이 바로 신영복 선생의 고전 독법의 시작 – 바로 참여점(entry point)입니다.

책 속의 많은 말들을 옮기고 싶으나, 전후 문맥을 충분히 설명치 아니하고 그 부분만 떼어내는 것은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 같고, 전후 문맥을 설명하자니 그것은 또한 이 책을 그대로 옮기는 행위에 다름 아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리뷰를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출근 시간이 코 앞이라 황망히 일어나야 할 때이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눈이 따라가고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암기하고 싶게 됩니다. 이 책은 그런 문장들로 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는 하지만 두고두고 간직하며 곱씹어볼 수 있는 책이니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7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