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라일락(White Lilacs), 캐럴린 마이어

글쓴이 흑구 | 작성일 2015.2.14 | 목록
분류 절판도서
발행일 2013년 2월 28일 | 면수 272쪽 | 판형 변형판 140x210 | 가격 10,000원

하얀 라일락(White Lilacs), 캐럴린 마이어(Carolyn Meyer)

책 표지에는 무너진 벽돌 사이로 체크 무늬 원피스를 입은 흑인 여자아이가 보인다. 책허리를 감고 있는 띠지에는 "2009년 용산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권합니다"라고 적혀져있다. 눈치가 빠른 독자는 이 소설이 인종갈등에 대한 이야기며, 그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캐럴린 마이어가 쓴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 텍사스 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한다. 백인 마을에서 청소, 정원지기, 빨래 등 허드렛일을 하며 사는 흑인들의 마을, 프리덤 타운은 백인에 의해 공원 용지로 결정된다. 버젓이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지만, 백인들은 그들에게 생활환경이 훨씬 열악한 플래츠나 도그타운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한다. 주인공인 12살 소녀 로즈 리는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마을사람들은 대책을 강구하지만 결국 하나둘씩 마을을 떠난다.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프리덤 타운은 로즈 리의 할아버지가 가꾼 에덴 동산과 교회, 빈 집만을 남겨둔 채 버려진 마을이 된다.

절망 속에서 ‘패배가 약속된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

용산 참사의 결과를 아는 이라면 이 마을 사람들이 결국 쫓겨날 것임을 소설 초반부터 예상할 수 있다. ‘스포일러’에 가까운 홍보 문구인 셈인데, 이 소설은 결국 패배할 것이 뻔한 이들이 어떻게 이 사건을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으레 흑인 이야기라고 하면, 우리와 혹은 나와 동떨어진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인종 차별은 당연히 나쁜거’라는 식의 진부한(모든 역사적 비극은 진부하다. 비극이 반복되면서 발생하는 그 진부함이 그 비극의 핵심일 뿐 )이야기라고들 생각한다.(그래서 이 전 소설 <어느 뜨거웠던 날들> 책벗 모임에서 편집자 분이 그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하셨던 것으로 기억) 그런데 이 100년 전 흑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과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난 용산 참사를 나란히 비교해보면,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종갈등’의 문제에서 더 깊이 들어가 ‘폭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다. 20세기와 21세기, 인종 억압과 계급 억압. 시대도, 표면적 갈등도 다르지만, 두 사건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은 소름끼칠 정도로 유사하다.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 가진 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사람들의 삶터를 송두리째 빼앗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일인지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동시에 프리덤 타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2009년 용산 참사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가진 자들의 결정으로 멀쩡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물을 부숴버리고, 그 곳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 중 다섯이나 죽었다는 사실이 새삼 더 무겁게 다가온다.

용산참사의 고인들과 다르게 프리덤 타운의 주민들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났다. 작가의 말에 나와있듯이 흑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 횡행하던 시기라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큐 클럭스 클랜이 보이는 대로 흑인을 때리고,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질러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던 끔찍했던 시절.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건 로즈 리의 오빠 헨리가 느낀 분노도 아니요, 엄마가 느낀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절망’이었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억울하고 분해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암흑같은 절망. 그 깊은 절망 속에서 날 때부터 패배자였던 그들은, 묵묵히 또 다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일을 하고, 교회를 짓기 위해 돈을 모은다. 로즈 리는 하수구 악취가 나는 플래츠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수재나 고모는 교과서도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할아버지는 에덴동산에서 꽃과 나무들을 가져와 다시 정원을 일구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패배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열두살 소녀 로즈 리의 작은 손으로 프리덤 타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그들이 살았던 마을과 그 마을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자, 유일한 무기였을 것이다. 쉽게 삶이 희망이고, 신은 이겨낼 수 있는 절망만은 준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들을 그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냈고, 그 이후 시대에 수많은 저항을 이어갔다. 사실, 그들에게 산다는 것만큼의 저항이 어딨을까.(난 그 시대에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못살았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도 저항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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