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발행일 | 2016년 7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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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1997307 03810 |
면수 | 372쪽 |
판형 | 변형판 153x215, 소프트커버 |
가격 | 18,000원 |
아름다운 산, 잊혀진 물을 찾아 떠나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여행
조선 선비들은 현대인의 등산과는 다른 목적으로 산과 물을 찾았고, 다른 기록을 남겼다. 건강을 목적으로 산을 오른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인들에게 조선 선비의 산수유람 기록은 매우 비생산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글은 집 근처 가까운 산조차 찾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색다른 읽을거리와 인생의 지침서가 될 수 있다. 더운 여름,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집에서 산을 유람하는 여유를 이 책을 통해 느껴보자.
조선 선비들이 산수를 즐겨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 성현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고 말한 이래로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요즘의 중고등학생들까지 다 아는 유명한 말이 되었으며, “태산에 올라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登泰山而小天下)라는 말은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더불어 군자의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그러한 산수 체험 기록의 1차 독자는 물론 자기 자신이지만, 2차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지니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산수를 찾아가지 못하는 선비들을 상정할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은 독자에게 산수유람을 권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옛 시조에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 절로 水 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그 中에 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 하리라”라고 한 바와 같이 선비들은 산수유람을 통해 자연의 도(道)를 깨닫고 자연과 더불어 늙어가려는 자연관을 드러냈다. 이것은 자연 그대로 관찰하여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내 몸을 자연에 의탁함이다. 또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인간 속으로 끌어들여 관념화시키고 철학적인 자연을 읊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퇴계 이황 등 일군의 성리학자들을 꼽을 수 있다. 선비가 자연을 그대로 따라 하나가 되는 것이나 선비가 자연에게 배워서 하나가 되는 것 둘 다 자연과 내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같다고 하겠다.
산과 물이 삶에서 더욱 멀어진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사고, 그리고 이들이 남긴 글은 무척 이질적이다. 그렇다고, 누워서 산과 물을 누리는 방법, 즉 와유(臥遊)의 방법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식 건물 안에서 수석을 수집하고, 화초를 키우고 완상하며, 멋진 산수화를 방에 걸어두고 감상한다. 여기에 한 가지 방법을 더 보태자. 옛사람의 글을 통해 갈 수 없는 아름다운 땅뿐만 아니라 개발 등을 통해 이미 사라져버린 산과 물까지 함께 즐겨 보는 건 어떠한가?
방 안에 누워 명산을 유람하는 와유록(臥遊錄)의 전통
조선 시대에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또 사회적, 신분적 제약 등으로 마음먹은 대로 산을 유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금강산을 오르는 것이 평생소원이 될 정도로, 명산 유람은 소수 특권층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산수유기의 작자는 자연히 대부분 선비들이었고, 조선 중기 이후 문학 담당층이 확산되면서 여성의 산수유기가 있었지만 아주 드문 사례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산수유람 기록은 매우 소중한 독서물이었고, 직접 가보지 못하는 대신 다른 이의 유람록을 읽으며, 사랑채에 누워서 팔도강산의 이름난 산수를 유람했던 것이다. ‘와유록“’(臥遊錄)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대저 산수기는 반드시 그 땅을 밟고 그 모습을 보아서 마음으로 실체를 터득한 다음에야 붓을 잡고 쓸 수 있다. 높은 것은 높게, 낮은 것은 낮게, 깊은 것은 깊게, 얕은 것은 얕게, 그 변화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이 모두 속세의 먼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요 문장을 하는 선비들이므로 현명하고 재주 있음이 이와 같으니, 그가 직접 밟고 본 것과 마음으로 느낀 바를 적게 된다면, 세상에서 용과 매와 표범의 외모를 묘사하고 천리마를 그리더라도 고기를 그리고 가죽을 그리는 데 그치는 자들이나 고개지, 육탐미가 직접 가보지 못한 바를 그려낼 수 없는 것과 그 장단과 득실을 어찌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박세당이 남학명의 『와유록』 서문으로 쓴 글의 일부인데,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박세당은 표면만을 그리는 그림보다는 산수의 풍경을 보고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쓴 글 한 편이 더 낫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유행과 그 맥을 같이한다.
조선 중기 이후 산수유람의 기회와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 고경명(1533~1592)의 『유서석록』, 홍백창(1702~1742)의 『동유기실』은 하나의 산을 유람한 기록이 단행본으로 편집되어 널리 읽혔고, 홍인우(1515~1554)의 『관동일록』, 성해응 (1760~1839)의 『동국명산기』 등은 여러 산의 유래와 명승에 관한 인문 지리서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장서각이나 규장각에 소장된 『와유록』, 정원림(1731~1800)의 『동국산수기』처럼 여러 문인들의 유산기를 모아 편집한 선집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글자 그대로 사랑채에 누워서 팔도강산의 이름난 산수를 유람했던 것이다.
조선 팔도의 명산을 한 권의 책으로 여행하자!
사계절의 흐름을 따라 보는 20곳의 명산 여행
이 책은 정원림의 『동국산수기』 및 한국문집총간, 그리고 문집총간에 포함되지 않은 개인 문집을 저본으로 한다. 정원림의 『동국산수기』는 당대 여러 문인들의 유산기를 모아 편집한 선집이다. 이 책의 편역자인 전송열, 허경진 선생은 우선 정원림의 책을 완역하고, 아울러 다른 문집 속의 산수유기들을 검토한 뒤 수작 20편을 선정, 이 작품들을 사계절의 변화와 함께 산의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집필 시점을 기준으로 계절순으로 재배치했다. 각 편마다 말미에 작가 소개와 작품 해설을 수록했으며,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 영조 때 제작된 《해동지도》를 도판으로 사용했다.
# 지리산에 대한 탁월한 식견 _【두류산 ― 4천 리를 뻗어 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의 글 「유두류록」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유몽인이 중앙관직을 사임하고 남원의 수령으로 내려가 있던 1611년 봄 두류산을 유람하고서 쓴 기행문이다. 두류산은 지리산을 말한다. 두류산의 의미는 ‘백두대간[頭]이 흘러왔다[流]’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산 이름인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智] 달라진다[異]’는 의미이다. 유몽인은 두류산 곳곳의 경물을 눈에 보듯 실감나게 묘사했으며, 그 경물들을 통해 때로 자신만의 인생론을 펼치기도 한다. 또 용에 관한 이야기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당을 싫어하는 유자(儒者) 특유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한편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그곳 매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동정하기도 하여 치자로서 백성의 고통을 느껴 보고자 하는 마음도 드러나 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두류산에 대한 저자 나름의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 대목도 탁월한 식견이어서 볼만하다.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의 높낮이를 차례로 매겨본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 제일의 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 세상의 영화를 다 마다하고 영영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 두류산만이 은거하기에 좋을 것이다. 이제 돈과 곡식과 갑옷과 무기와 같은 세상 것들에 대해 깊이 알아 가는 것은 머리 허연 이 서생이 다룰 바는 아니리라. 조만간에 이 벼슬 끈을 풀어버리고 내가 생각한 애초의 일을 이룰 것이다. 만약에 물소리 조용하고 바람소리 한적한 곳에 작은 방 한 칸을 빌릴 수 있다면 어찌 고흥의 옛집에서만 나의 이 지리지(地理志)를 쓸 수 있겠는가!”
#조선 시대에도 매우 귀했던 한라산 기행문 _【한라산 ― 말, 곡식, 부처, 사람을 닮은 산】
최익현의 「유한라산기」를 번역하였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난 산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한라산을 가본 사람이 드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산을 갈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한라산이 너무 높아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고 구름도 많이 끼는 신령한 산이어서 그렇다고 하였으나 아마 제주도라는 섬에 위치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육지에 있는 산보다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자의 이 유람기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유람기의 뒷부분은 한라산을 왜 한라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또 한라산의 다름 이름에 대한 설명 및 한라산에 대한 총체적인 해설도 곁들이고 있어서 한라산의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한라산은 지리산이나 금강산처럼 단순히 볼거리만을 제공해 주는 산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각종 토산물도 공급해 준다는 점에서 여타의 산과 같이 놓고 말할 수 없다는 저자의 평가는 한라산을 바라보는 안목을 새롭게 해준다.
“산세가 굽었다 펴지고 높았다 낮아지면서 마치 내리달리는듯한 것은 말과 비슷하고, 높은 바위와 층층의 절벽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공손히 절하는 듯한 것은 부처와 같다. 평평하고 넓으며 멀리 흩어져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닮았고, 북쪽을 향해 곱게 껴안은 듯한 수려한 자태는 꼭 사람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말은 동쪽에서 나고, 절은 남쪽에 모여 있으며, 곡식은 서쪽에서 자라기에 적절하고, 뛰어난 사람은 북쪽에서 많이 나며 나라를 향한 충성심도 남다르다고 한다.”
#산과 물에서 자연의 도를 배우다 _【두타산 ― 골짜기가 깊고 수석이 기묘하여】
김효원의 「두타산일기」를 번역한 것이다. 두타산은 강원도 동해시와 삼척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이름인 ‘두타’(頭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를 닦는다는 뜻이다.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 글은 산행기이면서도 예법에 관한 자신의 논설이 들어 있기도 하고, 또 치자(治者)로서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기도 하며, 그 밖에 자신의 깊은 심회를 드러내기도 하고, 산에 대한 나름의 진중한 철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을 보고 산을 보면서 여러분은 또 얻은 것이 있었는가? 옛사람들은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거기에서 취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 다만 탐구하고 토론하는 것만을 우선으로 하지 않았네. 시냇물이 콸콸 흐르며 밤낮으로 쉬지 않는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가는 것은 가고 오는 것도 끊이지 않는 것은 천기(天機)의 운행이 참으로 이와 같기 때문이지. 만일 이것이 한 순간이라도 멈추어버린다면 그 맥이 끊어져서 시냇물이 말라버릴 것이라네. 오늘날의 공부하는 자들이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밤낮으로 삼가 그 행동을 조심하기를 한 순간이라도 멈추지 말아야만 할 것이네. 그렇지 않고 만일 오로지 애쓰던 그 공력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이어져온 그 공부의 힘이 금세 다 폐해지고 말 것이니, 이는 깊이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네. 산은 그 푸른빛을 받아들여 천고토록 없어지지 아니하듯, 군자도 그 산의 모습을 보고서 명예와 절조를 갈고 닦아 우뚝하게 홀로 선 자를 생각해야 하네. 또 산은 웅장하게 솟아올라 한 쪽에 버티고 서 있으니, 군자가 그러한 산의 위용을 보고 중후하여 쉬 옮겨가지 않아 모든 사물을 안정시키면서도 마치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하는 자를 생각해야 할 것이네. ‘산과 숲은 궂은 것을 감추어준다’는 도량에서 나의 가슴 넓힘을 배우고, 맑고 서늘한 기운에서 나의 누추함과 더러움을 씻어버릴 것을 배우게 하지. 또 게으름과 타락에 떨어지고, 경박함과 조급함으로 성을 발끈 내며 스스로를 작게 여기고, 애걸복걸하며 스스로를 구차하게 여기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산과 물의 도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일세. 나는 나와 동행하는 사람 중에 만일 산수의 이러한 면모를 본받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와 절교하고 북을 치면서 그를 비난할 것이요, 그가 스스로 그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난 뒤에라야 이를 그만 둘 것일세. 그러니 나의 이 말을 소홀히 듣지 말게.”
이 책의 저자(차례순)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김효원(金孝元, 1542~1590),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
정상(鄭祥, 1533~1609), 「월출산유산록」(月出山遊山錄)
안석경(安錫儆, 1718~1774), 「유치악대승암기」(遊雉岳大乘菴記)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
조호익(曺好益, 1545~1609), 「유묘향산록」(遊妙香山錄)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유서석록」(遊瑞石錄)
이황(李滉, 1501~1570),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심광세(沈光世, 1577~1624), 「유변산록」(遊邊山錄)
서명응(徐命膺, 1716~1787),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동유기」(東游記)
임훈(林薰, 1500~1584),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오대산기」(五臺山記)
이복(李馥, 1626~1688),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
정구(鄭逑, 1543~1620),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
이동항(李東沆, 1736~1804), 「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
두류산, 4천 리를 뻗어 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유몽인, ‘유두류산록’]
한라산, 말, 곡식, 부처, 사람을 닮은 산[최익현, ‘유한라산기’]
두타산, 골짜기가 깊고 수석이 기묘하여[김효원, ‘두타산일기’]
월출산, 옛사람들이 소금강이라 불렀으니[정상, ‘월출산유산록’]
치악산, 산은 깊고도 험준하고 암자는 높고도 고요하니[안석경, ‘유치악대승암기’]
관악산, 연주대가 구름과 하늘 사이로 우뚝 솟아[채제공, ‘유관악산기’]
묘향산, 산수의 즐거움은 마음에 있나니[조호익, ‘유묘향산록’]
청량산, 작은 산 중에서 신선과 같은 산[주세붕, ‘유청량산록’]
무등산, 최고봉은 푸른빛을 띤 채 우뚝 서 있고[고경명, ‘유서석록’]
소백산, 시냇물이 옥띠 두른 나그네를 비웃네[이황, ‘유소백산록’]
변산, 다 담을 수 없는 기묘한 광경들[심광세, ‘유변산록’]
백두산,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 이 땅에[서명응, ‘유백두산기’]
금강산, 백옥 같은 수천만 봉우리가[김창협, ‘동유기’]
덕유산, 맑고 높은 기운과 웅장한 경치[임훈, ‘등덕유산향적봉기’]
오대산, 중후하여 덕이 있는 군자와도 같으니[김창흡, ‘오대산기’]
금오산, 바람 타고 훨훨 신선 되기를 엿보노라[이복, ‘유금오산록’]
가야산, 신선이 산다고 할 만큼 빼어난 곳[정구, ‘유가야산록’]
삼각산, 흥겨운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고[이정구, ‘유삼각산기’]
속리산, 기이하고도 빼어나다 일컬어지니[이동항, ‘유속리산기’]
태백산, 산이 깊고 신비하여 세상에서 보기 힘든 곳[이인상, ‘유태백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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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 유몽인, 최익현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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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통 | 2017.2.28 |
조선 선비들의 명산 20곳 유람기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 인터뷰365
조선 선비들은 어떻게 휴가를 보냈을까 / 헤럴드경제
[신간]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 프라임경제
사랑채에 길게 누워 팔도강산 유람하세 / 한겨레
천년 고목에 금빛 갈대…조선 선비가 노래한 명산 / 헤럴드경제
[책]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최익현, 한라산에서 부처를 만나다 / 아시아경제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골짜기에 걸터앉은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어지러운 마음도 구름처럼 흘러가더라 / 서울경제
[신간│조선 선비의 산수기행] 사랑채에 누워 산수경개나 볼까나 / 내일신문
조선시대 선비들 문장으로 둘러본 우리 名山 20곳 / 매일경제
조선 선비는 왜 산에 올랐나… 명산 20곳 유람기 / 세계일보
조선 선비들 눈에 비친 팔도 명산 / 강원도민일보
와유록 옆에 끼고 누워 안방 유람 즐겨보세 / 조선일보
옛 선비들과 떠나는 팔도강산 피서 / 서울신문
팔도의 명산 유람, 방 안에 누워 감상하다 / 노컷뉴스
[언론이 주목한 책] 조선 선비들이 사랑한 우리 명산의 사계절 / BOOK DB
[책읽는 주말] 조선선비의 산수기행 / 스포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