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탄생

연구자의 탄생

김성익, 김신식, 김정환, 배주연 외 6인 지음

발행일 2022년 1월 21일
ISBN 9791191438482 03300
면수 292쪽
판형 변형판 127x200
가격 15,000원
한 줄 소개
2000년대 이후 학술장에 들어온 동시대 젊은 연구자들이 말하는 삶, 사회, 연구의 관계에 대하여
주요 내용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가?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가?

젊은 인문사회 연구자 10명의 지적 좌표와 궤적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가? 이에 대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연구자의 삶과 시대에 대한 진단이 어떻게 연구와 글쓰기로 이어지는가? 문화연구·사회학·국문학·여성학·인류학·영문학 등 비판적 사회연구의 전통에 속하는 다양한 전공, 작가·평론가·국내외 박사과정 대학원생과 교수 등 다양한 위치의 연구자 10명이 개인적 경험과 연구 경험을 엮어서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그려내며, 인문사회 연구를 한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 2000년대 이후 ‘분과학문’ 또는 ‘학계’ 안팎을 오가며 연구자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와 시민들과의 연결을 놓지 않는 지식 생산이 어떻게 가능한지 되묻는다.

 

책 소개

인문학의 위기가 기본값인 시대

연구에 관한 사적이고도 공적인 이야기

『연구자의 탄생: 포스트-포스트 시대의 지식 생산과 글쓰기』는 40여 년 전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져 학술운동의 일부이기도 했던 한 인문사회 출판사의 편집자로서,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오랜 독자이자 한 명의 시민으로서 품었던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인문사회 출판의 역할 중 하나가 학계에서 생산된 지식을 일반 시민들과 연결하고 사회적 담론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때, 연구자들의 이야기는 왜 과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 여전히 좋은 연구자들이 존재하지만, 왜 기존에 인문·사회과학의 일이었던 것은 문학과 에세이의 몫처럼 보일까? 왜 문학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고, 에세이로부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을까? 인문·사회과학의 언어, 학계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출판시장에서) 매력적일 수 있을까? 물론 부정적인 대답이라면, 여기에는 ‘인문학의 위기’나 ‘학문공동체의 붕괴’, ‘연구자의 전문화’, ‘학문 후속세대의 재생산 실패’, ‘논문 중심 글쓰기’, ‘성과주의·계량화’ 등 학술장의 변화를 지적하는 말들이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기본값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단하고도 예민하게 ‘사회’와 (활동으로서의) ‘글쓰기’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2000년대 이후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해온 동시대 젊은 연구자들이 있고, 그들의 가장 날것의 이야기를, 동료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학계 바깥의 시민들도 경청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었다.

비판적 사회연구의 전통에 속할 다양한 전공의, 문학평론가와 비평가, 독립연구자, 박사과정 중인 국내외 대학원생과 교수까지 다양한 위치의 인문사회 연구자 열 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지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왜 그 문제가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문제의식은 어떤 개인(사)적·시대적 경험을 통해, 어떤 궤적을 거치며 형성된 것인가요?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규명 또는 해결하기 위해 어떤 연구(글쓰기)를 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작업을 통해 어떤 지적 또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희망하시는지요?’ 다시 말해, 어떤 경험과 문제의식이 이들을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기를 바랐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200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와 지식 생산이 맺는 관계에 관해 풍부한 영감과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연구자의 탄생』은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가?’에 관한 연구자의 사적이고도 공적인 기록을 통해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에 이를 수 있는 책으로 기획되었다.

 

분과학문학계안팎을 가로지르며

연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연구자’는 일반적으로,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와 교수를 아우르며 ‘학계’에서 연구를 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이들을 칭한다. 하지만 연구자라는 말의 쓰임은 지난 20여 년간 변화한 학계와 사회의 조건을 정확히 반영한다. 이 말은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강조하는 대신, 다른 분야나 학계 외부, 즉 시민과 사회와의 단절을 의도치 않게 장려한다. 따라서 이러한 진단이 가능하다. 2000년대 이후 학술장에 진입한 인문사회 연구자들은 “광활하고도 혹독한 지식/교육‘시장’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채로 “가까스로 ‘연구자’인지 ‘콘텐츠 제공자’인지 ‘덕후’인지 모를 무언가가 되고 있는 중이다.”(79쪽) 문학평론가 오혜진에 따르면, “‘지적 분기점’이라고 합의할 만한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 도출되지 않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별 시차 없이 접한, 이른바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의 지식노동자’라고 호명되곤 하는 동시대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의 지적 좌표와 궤적을 묻는 질문 앞에서 때때로 불안해진다.”(73~74쪽)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에 연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연구자들이 자신의 지적 좌표와 궤적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연구자의 탄생』은 동시대 젊은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연구란 무엇인지 묻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와 ‘연구자’를 재정의해보려는 책이 되었다. 문화연구, 국문학, 사회학, 여성학, 인류학, 영문학 등 다양한 전공과 관심사를 가진 연구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에 대한 답변과 새로운 질문들을 들려주었다. 이 책은 2000년대 이후 ‘분과학문’ 또는 ‘학계’ 안팎을 오가며 연구자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와 시민들과의 연결을 놓지 않는 지식 생산이 어떻게 가능한지 되묻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연구자이자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인 천주희의 「나는 내일도 연구자이고 싶다」는 이 책의 서문 역할을 한다. “한 명의 연구자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제적 자원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청년연구자이자 프리랜서 연구자로 활동한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사례로 제시하며 연구자들이 직면한 물적 조건을 살핀다. 암묵지인 동시에 민감한 주제인 대학원생과 연구자의 재생산 문제를 제기하면서, 연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연구란 무엇인가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식을 생산하는 주요 장이라고 여겨지는 언론계, 출판계, 학계를 기자, 작가, 유학생으로 경험한 안은별은 「이동 중에, 글쓰기의 자리에 대한 생각들」에서 자신의 연구 주제인 ‘이동’을 키워드로, 일본에서 공부한다는 것, 학계에 속한 지식 생산자로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앞의 두 편이 작가-연구자의 이야기라면, 다음 두 편은 비평가-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2010년대의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 오혜진은 「불투명한 언어로 말하기」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 학술장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개괄하며, 소수자정치에 관한 자신의 비평적 문제의식이 어떻게 벼리어졌는지를 들려준다. 한편, 비평가이자 한국사회의 감정을 사회적 맥락과 엮어 고찰하는 감정사회학 연구자인 김신식은 「그것: 감정사회학, 내 삶의 가망이 되다」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 글은 자기 자신의 문제, 특히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경험과 연결해 연구의 여정을 서술한다.

코로나19가 강화시킨 디지털 환경 속에서,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으로도 활동 중인 윤보라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이자 시네-미디어 기억 연구자인 배주연의 글은 각각 디지털 공간과 페미니즘 연구, 그리고 영화와 페미니즘·기억 연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톺아본다. 윤보라의 「몸 없는 공간의 젠더를 연구하기 위해」가 1990년대의 시대적 공기에 예민했던 십대가 인터넷과 페미니즘을 두 축으로 삼아 촛불집회와 온라인 외모관리 커뮤니티, 스마트폰, 일베·메갈리아, n번방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그것들을 연구 과제로 삼아 추적해온 과정을 담아냈다면, 배주연의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는 학생운동을 하며 소설을 쓰던 수학과 대학생이 어떻게 영화이론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그동안 영화를 둘러싼 매체·문화 환경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와 겹쳐놓는다.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인 이승철과 하와이대 사회학과 교수인 양명지의 글은 각각 인류학·경제학·사회학, 정치학·역사학·사회학을 오가며 한국사회를 분석해온 두 “사회과학자”들의 작업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이승철의 「무너지는 사물, 부유하는 말」은 현재 한국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좌표와 분석틀의 부재”, “말과 사물의 위기에서 촉발된 혼란스러움”을 지적하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기획으로서 사회적 경제와 사회혁신, 금융화와 투자자 주체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양명지의 「박정희 시대의 유산으로부터」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현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로서 중산층의 형성과 태극기부대의 극우정치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해외에서 한국사회를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를 덧붙인다.

한편, 미국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문학에 접근하는 김성익은 「언어의 감옥 내 수감자와 탈옥수」에서 자연과학이 생산해내는 지식이 지배적인 시대에 인문학의 자리를 묻는다.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자연과학이 인문학의 공백을 채웠는지, 왜 미국 학계와 달리 한국에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분리되어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이론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하는 김정환의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기, 보는 나를 보기」는 이 책을 닫는 글 역할을 한다. 지방 교대에서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쳤던 경험에서 출발하는 이 글은 왜 그토록 공론장에서 많은 말들, 심지어 “선의”와 “이상적인 지론”이 오가지만 사회는 변하지 않는지 되물으며, 지식 생산은 ‘연구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학생과 일반 시민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고, 그것은 “곧 자기변환의 실천”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언어와 관점의 발명, 그리고 자기변환의 실천까지

다시, 인문사회 연구란 무엇인가

다양한 위치와 전공의 연구자들이 쓴 책이지만, 『연구자의 탄생』은 자연스럽게 2000년대 이후의 풍경을 펼쳐놓으며, 지난 20여 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를 그려낸다. 학술장의 문제는 물론, 청년운동, 독립출판, 여행(이동), 페미니즘, 소수자정치, ‘감정’의 부상, 종교, 힐링, 스마트폰, 인터넷, n번방, 영화, 기억정치, 사회적 경제, 사회혁신, 금융화와 투자자, 중산층, 태극기부대, 여러 번의 촛불집회, 과학의 대중화, 비판담론의 포화 상태와 변하지 않는 세계 등 새롭게 등장한 과제들과 여전히 해묵은 문제들, 그리고 다른 모색과 실천의 시도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토록 다양한 연구자들은, 연구란 무엇이며 왜 연구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놀랍게도 비슷한 대답을 들려준다. “공부란, 내 주변에 산재한 죽음과 불평등과 배제, 소외, 부조리함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바꿔나가야 할지 삶과 생존을 위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하는 매개”(12쪽)이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언어와 관점을 찾는 것이었다. 불안정하고 기이한 삶에서 시작된 궁금증과 질문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던 마음이 매일 켜켜이 쌓여서 나는 공부하고 책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13쪽)라는 천주희의 이야기는 “모든 사태를 ‘퇴행’, ‘백래시’, ‘반지성주의’ 같은 말로 일축하는 것은 손쉬운 현실도피이자 연구자의 직무유기 아닐까”, “지금 긴요한 것은, 내가 속한 ‘현재’를 이미 규범화·질서화된 가치를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문제계로서 새롭게 구성·재현하기 위한 관점과 언어다”(82~83쪽)라는 오혜진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시 “부유하는 원한과 분노는 언젠가 자신의 언어와 대상을 찾아내기 마련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찾아내는 언어와 이름이 극우 포퓰리즘이나 종교 근본주의, 금융시장의 니힐리즘이 아닌 새로운 급진적 보편성의 정치가 될 수 있을까요?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는 대안적 언어와 장치들을 벼리는 작업을 해낼 수 있을까요?”(207쪽)라는 이승철의 이야기와 공명한다. 이들은 인문·사회과학을 한다는 것이 새로운 관점, 언어, 담론을 생산하는 작업임을 강조한다. 동시에,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계몽하려는 의지들”에 그쳐서는 안 되고, “사회에 대해 말하거나 사회에 대해 쓰기를 멈추고서 나를 봄으로써 동시에 사회를 보는 것”(286쪽)이기를 바라는 김정환의 이야기는 앎과 실천이라는 해묵은 말들을 새롭게 갱신해내는데, 사실상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의 숨은 전제일 것이다.

물론 『연구자의 탄생』은 한계가 뚜렷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연구자들은 ‘나’의 자리로부터 동시대를 사유하고 세상을 정확히, 또는 다르게 읽어내는 언어와 관점을 모색하고 있지만, 당연히 이들이 인문사회 연구 생태계를 대표할 순 없다. 철학, 역사학, 심리학 분야, 또는 서울 아닌 곳의 대학원생이나 유럽 대학의 유학생처럼 누락된 이야기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바로 그렇기에 이 책은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공동의 이야기들을 촉발해내는 일종의 발제문이자,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인문사회 연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 장을 여는 초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책이 되기를 희망한다.

 

책 속에서

이 글이 연구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과 동료 연구자들 그리고 연구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민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나의 이야기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오늘날 연구 영역이 풀어야 할 과제와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는 자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문제일 수도 있다. 모든 연구자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연구 주제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처한 문제나 환경을 외면하거나 직면하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이지 않겠는가. 긴 시간 많은 자원을 들이고 또 공부하며 연구하는 이 지난한 삶을 오늘도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왜 연구자가 되려고 했고, 왜 이 일을 하고 싶었는지, 당신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_천주희, 14쪽.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 지금 좀 더 한국의 출판시장 쪽으로 기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책도 써야겠다는 얘기도 아니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연구자가 아닌 나’를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늦게 참여했기에 그 룰을 더욱 존중하고 준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된, 그래서 절대화되기 쉬운 지식 생산의 장을 내부에서 상대화할 수 있는 긴장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그걸 하는 나’를 의식하고 관찰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또한 보다 중요하게는, 학술장에서 쓰는 논문 또한 자신에 대한 성찰을 수반하는 하나의 ‘작품’이어야 한다는 의견이기도 하다. _안은별, 68~69쪽.

이런 현상들을 단지 ‘퇴행’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역사를 선형적이고 발전론적인 방식으로만 상상하던 관성을 지속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한 이를 ‘반지성주의의 득세’라고 보는 입장도 ‘지성’을 사회적·역사적 경합과 협상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지위와 위상을 점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가치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간 관철돼온 앎의 위계를 반복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지금 긴요한 것은, 내가 속한 ‘현재’를 이미 규범화·질서화된 가치를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문제계로서 새롭게 구성·재현하기 위한 관점과 언어다. _오혜진, 82~83쪽.

감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연인이 사랑을 나눈 뒤 어질러진 각자의 옷가지와 같다. 왜냐하면 감정 자체가 사랑을 나눈 후 보이는 뒤엉킨 옷가지 같기 때문이다. 물론 몇 잔째 마시고부터 필름이 끊겼는지, 왜 내 허벅지에 연붉은 멍이 들었는지 연인이 서로 다른 기억의 편린을 조합해보는 일을 감정 해석의 한 과정으로 비유해볼 수 있으리라. 허나 내가 지금까지 감정의 고찰을 놓지 않았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감정의 발생에 대한 자초지종을 서둘러 따져 묻고 확정하지 않으려는 경계심에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확고했던 어떤 감정이 다시 ‘그것’이 될 때 묘한 쾌감과 약동하는 의지를 느낀다. _김신식, 131~132쪽.

페미니즘의 언어는 여성들의 눈부신 저항력과 문화 능력을 밝혀내는 것으로만 그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 망명자를 내쫓고 도착자(倒錯者)에게 침을 뱉으며 ‘해부학이라는 숙명’을 수성하고자 애를 쓰는 여성들의 행위 또한 페미니즘이 설명해야 한다. 지금 디지털 곳곳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소음이 이 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밑천으로 전환되기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가 이곳을 완전히 떠나서 살 수 없다면 말이다. _윤보라, 160쪽.

나는 아시아영화들이, 그리고 여성영화들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말을 모으고 드러내고 다시 건네는 방식에서 연대의 가능성과 현재를 마주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영화이론이란 이런 영화들의 발화장에 기꺼이 뛰어들어 ‘이론’(理論)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대로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작업일 것이다. _배주연, 181쪽.

하지만 사회과학자로서 제가 느끼는 혼돈은 단순히 변화의 속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현기증은 객관적 속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진행 중인 변화를 설명할 좌표와 분석틀의 부재가 가져온 방향 상실의 결과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 충돌하는 말들을 보건대, 익숙했던 사물들은 무너지고 먼지처럼 떠오른 말들은 부유하는데 이 변화를 이해할—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면 이념 혹은 성좌(constellation)라 불렀을— 적절한 좌표는 부재한 지금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는 건 저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_이승철, 188~189쪽.

그렇다면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서, 나는 왜 보수우파 정치를 연구하며, 이 연구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집단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필요하다고 본다. 극단적이고 비민주적인 생각과 행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고 그 동의의 기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는, 다양성과 관용을 저해하는 요소를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_양명지, 232~233쪽.

최근 과학적 세계 이해는 기존에 철학 및 문학 등 인문학이 제시했던 세계 이해를 대체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제 사람들이 심지어는 물리학자에게 철학적 질문마저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한 예다. (…) 과학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전유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전통적 인문학은 인간의 감정이나 심리와 같은 국지적 문제를 다루는 방법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물질에 대한 사유를 잃어버린 인문학이 상류화(domestication)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과학을 하는 철학이 인문학의 원래 모습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_김성익, 243쪽.

그렇다면 사회 속에서 흔들리며 사는 내가 나를 흔들고 있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까? 눈앞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몰두하면서도 그런 나를 관찰하고 바꿔내기까지 하는 지식이 가능할까? 지식의 생산이 곧 자기변환의 실천이 되며, 나를 보는 것이 결국 사회를 보는 것이 되는 이런 시선은 어떻게 가능할까? _김정환, 282~283쪽.

차례

나는 내일도 연구자이고 싶다 _천주희
이동 중에, 글쓰기의 자리에 대한 생각들 _안은별
불투명한 언어로 말하기: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의 소수자정치와 재현 _오혜진
그것: 감정사회학, 내 삶의 가망이 되다 _김신식
몸 없는 공간의 젠더를 연구하기 위해 _윤보라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_배주연
무너지는 사물, 부유하는 말 _이승철
박정희 시대의 유산으로부터: 해외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정치사회학자의 소고 _양명지
언어의 감옥 내 수감자와 탈옥수: 곰, 호랑이, 인간, 그리고 자동기계 _김성익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기, 보는 나를 보기 _김정환

지은이·옮긴이

김성익 지음

미국 위스콘신대학교(매디슨) 영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세기 영국소설 속 인물과 수number의 관계를 살피는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영문학 연구자로서 최근 관심은 19세기 문학의 영역에서 소설 형식이 인간에 대한 규정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비인문적 관점, 예컨대 자연과학적 기계성의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다.

김신식 지음

감정사회학 연구를 재료 삼아 글말을 나누는 작가. 한국사회의 감정문화와 시각문화에 대한 비평 및 강의를 수행 중이다.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 문예지 『문학과사회』, 사진잡지 『보스토크』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2020년 첫 개인 저서인 『다소 곤란한 감정』을 냈고 이 책은 같은 해 세종도서 교양 부문 우수도서에 선정됐다. 인스타그램에 종종 풀 죽은 문화예술 작업자를 독려하는 기록을 올린다. @shakshak01

김정환 지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 분야는 사회이론과 문화사회학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방송통신대, 서울시립대, 청주교대에서 강의를 했다. 「문화사회학과 실천의 문제」, 「사회학의 소설적 전통」 등의 논문을 썼고,『사회론: 구조, 연대, 창조』를 옮겼으며,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을 함께 썼다. 한국 민주주의의 상상계와 민(民)의 신체 이미지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집필 중이다.

배주연 지음

시네-미디어 기억 연구자,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 정치학, 영화이론, 영화사, 문화영상미디어학을 공부하였다. 현재는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관해 연구하며, 아시아영화들이 표상하는 국가 폭력과 식민의 기억, 포스트메모리와 젠더, 기억의 정치 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안은별 지음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했고,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국제팀·서평팀 기자로 일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며 도쿄대학교 학제정보학부 박사과정에서 일본 전후의 철도 관광 모빌리티를 상상과 상연이라는 모델로 분석하는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다양한 지면에 일본사회에 대한 글을 쓰고, 일본에서는 관광학 저널에 논문을 쓰며 고등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친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동 경험에 관여하는 지리적·사회적 상상력과 사물의 매개, 그것이 다시 어떤 사회상을 창출하게 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쓴 책으로 『IMF 키즈의 생애』, 『확장도시 인천』(공저) 등이 있다.

양명지 지음

미국 하와이대학교(마노아) 사회학과 부교수. 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구 분야는 사회 불평등,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비교역사사회학, 사회운동, 동아시아와 한국, 질적 연구 방법론 등이다. 최근 출간한 저서 『기적에서 신기루로』From Miracle to Mirage: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Korean Middle Class, 1960-2015는 20세기 후반 한국 중산층 형성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한다.

오혜진 지음

문학평론가.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근현대 문학·문화론을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저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에서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심문하고, 새 세대가 선보이는 서사실험의 성격과 민주주의적 상상력을 분석했다. 『원본 없는 판타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그런 남자는 없다』, 『을들의 당나귀 귀』, 『민주주의, 증언, 인문학』, 『저수하의 시간, 염상섭을 읽다』 등의 책을 함께 썼고, 『한겨레신문』과 『씨네21』, 웹진 『핀치』 등에 칼럼을 연재했다.

윤보라 지음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수료. 온라인 문화 생태계와 젠더 변동에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일베와 여성혐오: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등을 썼고, 함께 쓴 책으로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그럼에도, 페미니즘』이 있다.

이승철 지음

비판사회과학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미국 미시시피대학교에서 인류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 몸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를 일상의 경험을 통해 아래로부터 비판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이론적 관점과 방법론에 대해 고민 중이다. 『푸코의 맑스』, 『관용』, 『푸코 효과』(공역) 등을 번역했고,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경제, 일상의 금융화에 대한 다수의 논문들을 써왔다.

천주희 지음

문화연구자 겸 작가. 20대를 대학생과 대학원생으로 보냈다. 그리고 30대 중반, 다시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대학원생이 되었다. 신문방송학, 사회학, 문화연구, 여성학을 가로지르며 공부하고, 그곳에서 사회를 보는 다양한 방법을 배웠다. 몇 년 동안 주로 청년, 여성, 예술가, 연구자의 삶에 관심을 보이며, 이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둘러싼 이슈들을 고민하고 연구해왔다. 대표 저서로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와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가 있다. 현재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이자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연구와 저술 외에도 다양한 예술활동으로 삶을 가꿔가는 중이다.

독자 의견
서평 쓰기 등록된 서평이 없습니다.
관련 자료 받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