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나 잡지, TV 등 매체에서 자주 접한 탓일까? 보통 ‘수원성’으로 부르는 ‘수원 화성’은 오랜 가족이나 친구처럼 친숙하다. 안양에 살다보니 오다가다 성문이나 성벽을 가까이에서 볼 경우도 종종 있었고.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수원 화성’에 대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정조’ 나 ‘정약용’ 또는 ‘거중기’ 등 파편같은 단어들 뿐이었다. 친숙하다고 느꼈지만 막상 아는 것이 없는 친구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내용을 보면 화성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계획과 시공과정, 정조의 행차, 용주사와 융건릉 등 관련 사항이 자세하지만 어렵지않게 서술되어 있어 흥미로웠지만, 내 자신이 건축기술자이어설까 그 중에서도 ‘수원 화성’의 축성 계획과 실제 축성 과정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부분은 ‘정약용’에 대한 것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속의 고등학교 국사책에선 정조의 명으로 정약용이 수원성을 축조하면서 거중기를 고안해 사용했는데 실학사상의 반영이었다라는 식의 저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난 정약용이 ‘수원 화성’ 축성에 있어 총감독 쯤 했겠구나 하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조가 화성 축조를 생각하던 1792년으로 치자면, 당시 정약용은 31세로 홍문관에 근무하던 신진 학자로 건설과는 별 인연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게 정조는 ‘고금도서집성’이라는 당시 최고의 백과사전을 던져주며, 엉뚱하게도 기존의 우리나라 성의 장단점 검토, 중국 성의 강점 연구, 서양 신기술(‘기기도설’의 내용 검토) 탐구를 명한 것이다.
읽어내려갈 수록 정조라는 왕의 사려깊음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다. 오랜 경험과 기술을 지닌 기술자와 조직이 기존에 있었지만 오히려 이 분야에 대해선 백지에 가까웠던 소장학자에게 계획을 지시함으로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편견과 아집을 제거하는 동시에 ‘다르게 사고하기’를 통한 참신한 제안을 수용코자 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실제 실행에 있어서는 경륜을 지닌 기술자들의 의견을 중시하여 신사고가 현실 사정과 잘 조화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정약용의 제안 중 현실 사정과 적용 가능성에 따라 취사선택이 이루어진 것이다.
상상으로 그려 본다. 정조 앞에 조아려 앉은 한편엔 정약용, 맞은 편엔 공조 소속 기술자들. 정약용이 말한다. 노동력을 절감하고 쉽게 쌓으려면 새로운 수레와 기계를 써야한다고. 기술자들이 말한다. 기존의 장비로도 충분하고 새로운 장치는 익숙치 않아 오히려 불편하다고. 불만이 있는 기술자들을 어루만지듯 미소를 띠며 정조가 거든다. 둘 다 일리있으니 잘들 상의해 보라고. 성은이 망극하다며 머리를 숙이는 일동. (성문 나서면서는 싸웠을까?)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달라도 잘되는 조직이나 프로젝트는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쉬운 점도 눈에 띄는데 실제 축성 중엔 정약용이 관여하지 않아서 ‘거중기’가 실제론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거나 ‘오성지’라는 장치가 의도와는 다르게 설치된 것을 들 수 있단다. 정조같이 현명한 왕도 ‘피드백(점검 및 조치)’까진 생각치 못한 모양이다.
또 하나, 장인을 아낀 정조라는 제목으로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대호궤도’를 설명한 부분. 요즘으로 치면 근로자의 날 기념사진 정도 되겠다. 과연 설명대로 정조는 장인을 아꼈을까? 더울 때는 환약, 추울 때는 털모자와 옷감, 때되면 위로의 음식과 상을 내렸다는 내용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장인을 위하는 차원을 떠나서 장인을 천시하던 시대에 왕이 그정도까지 챙겨주었다면 그 누구라도 이게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못 깨닫았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제목은 ‘일 시킬줄 아는 정조’라고 바꾸어야 하진 않을지…
그 밖에 효자였던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화성능행도’를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였다. 특히 ‘환어행렬도’라고 서울로 돌아오는 행차를 그린 그림을 보면 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이 길옆에 늘어앉아 있고, 그 사이를 엿인지 떡인지를 파는 상인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상식을 깨는 광경이라 놀라웠다. 왕이 지나가면 당연히 고개숙이고 무릎꿇는지 알고 있었는데 카 퍼레이드 보듯 하는 모습이란. 게다가 떡사세요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예전 영국 왕실의 결혼행렬을 볼 때 신부도 부러웠지만 자유분망하게 구경하던 군중도 인상깊었었는데 이 그림은 그 모습과 다를 바 없어 정조라는 왕에 대한 친근함과 애석함이 다시금 가슴에 와 닿았다.
책을 덮고 나자, 그냥 있을 수 없어 남편과 아이와 함께 ‘실사’에 나섰다. 창룡문에서 시작한 4시간 정도의 수원성 일주와 수원 행궁 견학에 이어 그 다음 휴무 토요일엔 수원대 부근에 있는 융건릉(사도세자와 정조의 능)과 용주사(능찰)까지 완주하고 말았다. 일종의 되새김질이라고나 할까? 오래된 보석함을 정리하다 잃어버린 반지를 찾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