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라는 동물은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책이나 영화에서 접해온 난폭한 이미지다. 실제 늑대를 본 것은 동물원에서의 경험이 전부다. 그 허상에 가려 숨쉬고 달리고 우우하고 울 진짜 늑대는 아득하기만 하다.
이 책 『울지 않는 늑대』는 멸종 위기에 처한 늑대의 진실을 밝힌 보고서이자, 인간의 탐욕에 의해 잃어버린 세계를 고발한 비판서이다. 로보를 죽이기 위해 블랑카의 피를 이용했다던 시튼 동물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극히 인간적인, 아니 동물적인 자세로 탐구에 임한 저자 덕분에 가짜 늑대 따위는 쓰러뜨리고 진정한 늑대를 만날 수 있었으니. 안타까운 것은 그 시점이 ‘이제야’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캐나다 연방 정부 소속 생물학자로서 늑대 프로젝트를 맡는다. 프로젝트의 목적은 사냥꾼과, 그와 연계된 정부 부처에 이익을 가져다줄 합법적 늑대 말살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그는 여느 과학자들과 다름없이 조작된 늑대의 이미지를 품고 온갖 장비로 무장한 채 캐나다 북극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에스키모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북극 늑대와 1년여 기간을 함께 보낸다.
하나 애초부터 동물에 대한 애정이 깊고 제도권 과학에 대한 신뢰는 얕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 늑대 가족을 연구 대상이자 벗으로 삼은 뒤부터 조련된 과학자의 허물을 벗어나간다. 늑대의 식생활 연구를 위해 쥐를 통째로 먹질 않나, 발가벗고 일광욕을 하던 중 늑대를 발견하고서 쌍안경만 집어든 채 쫓아가질 않나. 그가 해낸 작업들은 문명에 사육된 우리의 세련된 의식 구조에 수차례 강펀치를 날린다.
저자의 노력으로 재발견한 늑대, 그 실체는 이렇다. 일부일처주의의 통제된 생활을 한다. 독신 상태를 유지하거나 다른 종과 짝짓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 잃은 새끼를 입양하기도 한다. 가족 단위로 넓게 흩어져 사는데, 먹이와 개체수의 변화에 따라 가족계획을 감행한다.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상당수의 쥐를 섭취하여 번성하고 가족을 부양한다. 순록을 사냥할 경우 늙고 약한 놈을 고름으로써 순록의 무리를 단련시킨다. 생태계 보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류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늑대를 그저 잔인하고 야만적인 짐승으로 몰아붙이기에는 이성적인 인간과 너무 많이 닮았다. 저자는 터놓고 자신의 거울로 삼은 듯했다. 늑대를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닌 자연을 이루는 한 구성원이라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웃음을 자아내는 저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익살스러우면서도 뼈 있는 풍자였다. 그럼 그 풍자의 대상은 누구일까?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동물 학살을(다른 인간을 포함하여) 자행하는 때와 곳마다, 자기들이 죽이는 대상에 대하여 가장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종종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해왔다.”
“우리가 조화롭지 못한 역할을 선택하기 전, 한때는 우리의 것이었던 세계. 내가 얼핏 알아보고 거의 들어가기까지 했지만, 결국 내 스스로가 외면하고 만 세계.”
풍자 대상은 바로 인간 그리고 잃어버린 세계다. 그 절정은 사뭇 진지한 마지막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저자는 인간이 늑대를 상대로 벌인 전쟁의 참상을 밝히면서, 그 무서운 폭력 행사 끝에 인간이 어떻게 자신들의 만행을 발뺌했는지 들추어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었다고 생각한 늑대굴에 들어갔다가 숨어 있던 늑대 모자를 발견하고서 비이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총질을 하려고 한 자신의 모습과 맞닥뜨린다.
전자가 좀스럽기 이를 데 없는 뒤집어씌우기 습성이라면 후자는 애처로울 만큼 투철한 자기방어 본능이다. 모두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문제는 그러한 인간성이 지나치게 발휘된 나머지, 보다 순수하고 다채로운 벗들과 공존했던 세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늑대는 인간이 만든 사악한 신화에 갇혀 울 수 없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울지 않는 늑대. 자기도 모르는 가면에 옭매여 울 수 없게 된 늑대. 저자는 그 존재를 통해 우리가 잃어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끝내 잃어버린 세계가 얼마나 아득한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