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시대가 담겨 있다는 명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대개의 문학이란 오늘,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게 마련이다. 혹시 과거나 미래를 다루더라도 시선은 여전히 오늘, 여기의 시선일 뿐이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드러나고, 때로는 저절로 스며나오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소설 16편을 다시 보게 됐다. 당연히 홍길동전과 춘향전이 포함돼 있다. 흥부전이나 배비장전도 빠지면 서러울 작품들이고. 언뜻 제목이 생소하기로는 설공찬전, 은애전, 옹고집전 정도? 나머지는 익히 제목과 줄거리는 알고 있는 책들이다. (한중록을 소설로 분류한다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일단 제쳐놓고)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는 임진록이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박씨전에서 되도 않는 도술이 난무하며 조선의 대역전극이 펼쳐지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요새도 ‘대안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가끔씩 치는 장난질이다. 그야말로 시대의 반영이랄까.
하지만 진짜 재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언뜻 묻어나는 시대의 흔적이다. 배비장전에 등장하는 신참 관료의 신고식. 지금도 대학 신입생들이 힘겹게 하는 사발식도 알고 보면 역사와 전통이 있다. 하다 못해 율곡 이이조차도 신고식 때문에 더러워서 관료 생활 못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나중에 동인, 특히 남인 계열의 태두로 대접받는 퇴계 이황과 서인 계열의 태두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이 신고식을 둘러싸고도 의견이 엇갈렸다. 퇴계는 율곡을 이렇게 위로했단다. “그런 신고식 모르고 과거 시험 본 것도 아니면서 뭘 그러냐.” 하지만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던 율곡은 그 수모를 결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꼰지르고 말았다. 원리원칙만 따지는 서인과 현실적 융통성이 있던 동인 계열의 차이가 확연하다.
심청전을 보면서 조선시대 맹인들의 삶에 대해 엿보는 것도 재미있다. 흥부전을 통해서 조선 후기 들어서 장자 상속제도가 낳은 폐단을 살피는 것도 흥미롭고.
그러고 보면 역사상 최고의 히트작 춘향전은 정작 역사적 배경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의 과거라는 것이 이도령처럼 1년 만에 덜커덕, 그것도 장원급제로 붙을 수 있는 것도 아니려니와, 암행어사로 자기 연고 지역으로 가는 일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남원부사 변학도는 사형을 확정하고 집행할 권한이 없었으니 춘향이 목숨이 경각에 달릴 일도 없다.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있다지만, 그 삶은 몽룡이와는 너무도 달랐다. 아버지 따라 남원에 왔다가 기생과 눈이 맞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는 데에는 20년이 걸렸고, 남원에 돌아온 것은 꼬부랑 할배가 되어서였다. 그리고 회한에 젖어 글 한 편 남긴다. ‘내가 옛날에 여기서 연애 한번 씨게 했었는데…’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시대가 허락한 것은 그만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