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는 책방 나들이다.
2주 전인가? 반쪽 영업을 하던 진솔문고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좋아하던 서점이었는데 아쉽다.
오프라인 서점에 들러 시간 가는줄 모르고 책구경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온라인 서점을 돌아 다니며 독자리뷰도 읽고 흘러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근무시간에 잠시 쉬고 싶을 때,
여유가 생겼을 때,
나를 제외한 우리팀 사람들은
인터넷 신문, 주식, 아파트 시세를 본다.
그런데 나는….
온라인 서점을 헤엄쳐 다니고 있다.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은 알라딘을 헤엄치다 만난 책이다.
예전 부터 한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던 책인데,
마일리지까지 30% 주기에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이 책, 너무……재.미.있.다.
이 책은 16세기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치열한 삶을 살다간 14명의 여성을 잊혀진 역사 속에서 불러온다.
신사임당,송덕봉,허난설헌,이옥봉,안동 장씨,
김호연재,임윤지당.김만덕,김삼의당,풍양 조씨,
강정일당,김금원,바우덕이,윤희순
현모양처의 대명사,
체 게바라가 면 티셔츠 모델로 추락하듯이
가구 브랜드 이름으로 전락한 신사임당.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천재 허난설헌.
이렇게 피상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외에 눈에 익은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안동 장씨.
많이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난다구?
97년, 이문열 아저씨가 허접한 소설 한 권으로 세상을 시끌시끌하게 했던 <선택>, 바로 그 <선택>의 주인공이다.
<선택>을 읽고 이문열 아저씨한테 말하고 싶었다.
” 아저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신문에 쓰세요. 아저씨 그런거 좋아하쟎아요. 역사 속 인물까지 불러 와서 이런 소설 쓰시지 말구요!”
세 명의 저자 중 안동 장씨편을 쓴 조혜란.
글의 시작 부분에서 조혜란의 고민이 물씬 묻어난다.
혹여 죽은 자가 말이 없다고 하여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임의대로 빌려오고 싶어졌다면 더욱 조심할 일이다.죽어 말 못하는 존재를 빌려 누군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한다면 이는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정부인 안동 장씨의 삶에 대해 쓰려고 마음먹으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죽은 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17세기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살았던 한 여성으로서 안동 장씨가 밟았을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다.안동 장씨 부인은 일반인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쏟아내면서 그녀의 이름은 인구에 회자되었다.(p122)
이문열 같은 어마어마한 문화권력이 비틀어 놓은
안동 장씨의 삶의 궤적을 바로 펴는 일, 복원 시키는 일,
명예를 찾아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문열 아저씨!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신문에 쓰세요!)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도 비범했던>을 쓴
세명의 저자들은, 잊혀졌거나 또는 왜곡된 이미지로 고정된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의 궤적을 꼼꼼히 쫓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문열에 의해 엄하게 형상화된 안동 장씨.
조혜란이 복원한 안동 장씨는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안동 장씨는 친정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친정 식구들을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안동 장씨는 이렇게 친정 식구들을 데려다 집을 지어주고 살 도리를 마련해주었으며,친정 조상들의 신주도 옮겨 모셔다가 봄가을로 정성스레 제사를 올렸다.그 뿐만 아니라 시집 장가 보내는 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모두 챙겨주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요즘에도 시집간 여성이 친정 새어머니와 더불어 동생 넷을 데려다가 함께 길러주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 다 보내고 하는 일에 남편이나 시댁의 동의를 얻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그런데 장씨 부인은 이 일을 해냈다.한두 해에 끝날 일들이 아니었으니,분명한 의지와 주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p131)
우리가 “현모양처”, “이율곡의 어머니”라고만 알고 있는
신사임당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다.
신사임당은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신의 의사나 의지가 없이 남편만을 따르는
그런 순종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동계만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했다.
제가 죽은 뒤에도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우리에게는 이미 칠남매나 있습니다.그러니 또 무슨 자식을 더 두겠다고 <예기>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겠습니까?
…..(중략)
사임당이 어진 아내의 전형이라면, 그 어진 아내란 자신의 판단대로 말하고 행동할 줄 알고 필요하다면 때로는 남편에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 수도 있는 여성인 셈이다.(p31)
또한 신사임당을 “이이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천재적인 “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신사임당은 그녀 혼자만으로도 입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굳이 아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정서적 감응력이 풍부한,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현실적인 구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추구할 줄 알았던,예민하면서도 다정다감했던,그림에 있어서 천재를 발휘했던 그녀를 그녀로 존재하게 하라.
조선 여성들의 삶의 실상을 밝히는 고전 여성문학을 공부하고,
이런 책을 써서 잊혀지고 왜곡된 먼저간 이들의 삶을 복원시키는 세명의 저자 박무영,김경미,조혜란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제 이 책을 한 선배에게 선물했다.
그 선배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만나길,
그래서 신사임당을 가구 이름이 아닌,
말 없는 현모양처가 아닌,
그저 이이의 어머니가 아닌,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낸 한 주체적인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길,
무엇 보다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신선한 시선의 역사 text에서 만나는 엄.청.난 즐거움을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