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울함이 짙다.
기록 되어야 하고 내가 그 역사를 알아야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똑바로 서 있을 자신이 없기에 늘 피하고만 싶었다.
이 책도 그러한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다.
내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만 싶은 책.
그러나 그럴 수록 끌림은 나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했다.
내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있자니 읽을 용기가 생기질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케테 콜비츠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연상케 하는 겉표지의 이상한 형태의 사람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접근을 더디게 만들었고 어떠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몰라 무던히도 한숨을 쉬게 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작가의 프로필을 보게 된 나는 의아했다.
그 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이러한 책을 썼으면서 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단 말인가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보게 될 것을 잘못 상상하고 있었다.
잔인함,처철함,우울함을 잔뜩 기대하며 겁을 먹고 있었지만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증언을 할 뿐이라고 했다.
그랬기에 아우슈비츠와 저자의 자살을 나는 터무니 없이 연결 짓고 있었던 것이다.
아유슈비츠와 자살은 극이였다. 강제와 선택이라는 것 하나만 떠올려도 나의 연결은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있다.
저자의 증언은 조금은 색달랐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내가 생각했던 자극적인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저자의 글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오로지 증언만이 바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안에는 인간을 통한 철학적 사고, 끊임없이 인간이고 싶은 저자의 갈망이 짙어지고 있었다. 통계나 수많은 자료들을 똑같이 읊어대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 인해 독일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 철저한 고증적인 서술이였다.
그래서 나는 문학적인 면을 볼 수 있었고 인간임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 또한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기도 했다.
너무나 태연히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을 그대로 흘려보내면서 비참한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이라는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는 내가 우스워 보이기도 하였지만 나 또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였고 알려지고 알아야 할 역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와 비슷했던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서러움을 접목시켜서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를 알아가야 할터인데 우리는 무한한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진 않았는가.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에선 희망이 피어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에선 미래의 두려움만이 번져가고 있다.
사고를 가진 인간이 동물보다 더한 처사를 당하고 있었음에도 그 안에서 우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안도감이나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을까.
잠시 내 자리가 부끄러워 지면서 한줌의 재로도 변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끄러움은 잠시 잠깐인 걸 알기에 당당히 밝히지 못할 것임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그래도,그렇기에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당신은 인간이였고 그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노라고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록하였기에 당신은 위대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그러한 색다른 증언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 생각이 났다.(저자도 ‘죽음의 집의 기록’을 언급하였다.)
수용소와 감옥이라는 조금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인간이 갇혀있으며 내 의지와 상관없는 노동과 삶을 꾸려간다는 것에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기에 수용소에서의 욕구 충족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의 존재감 또한 쉽게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인간이기에 그 인간임을 지켜가는건 쉽지 않다.
그 인간임의 참된 모습이 무어라고 정의할순 없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임을 드러낼때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그러한 인간에 철처지 초점을 맞추었고 그랬기에 인간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인간됨은 씁쓸하고 처절하고 외로웠지만 그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되는 시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