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03 11:56
이 책의 원제는 ‘어린아이의 눈물’이라고 한다. 확실히 어린아이는 눈물을 흘려야만 성장한다. 아기 때의 생리적인 욕구충족을 위해 우는 것이 지나서 최초로 숨을 죽이며 흘리는 서러운 눈물은 아이를 사람으로 만드는 통과의례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간에. 부끄러움의 눈물, 자기애의 눈물, 두려움의 눈물, 한이 담긴 통한의 눈물까지… 어린아이가 흘린 눈물은 곧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어떠어떠한 것을 맞닦뜨려야만 했는가에 대한 혼자만의 증언이기도 하다. 저자인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다. 양친은 배움이 없었지만 조선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자식이 책을 읽는 것은 끔찍히 좋아했고, 그래서 책값이 떨어질 날은 없었다고 한다. 약하고 내성적인 탓에 운동하고 노는 것 보다 책을 훨씬 좋아하기도 했고, 역시 독서가들이었던 형들의 영향으로 서경식의 독서는 어릴 때부터 꽤 조숙한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재일조선인이란 정체성이 주는 불안함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그늘을 드리웠고, 원하지 않았음에도 지워진 짐은 스스로에게 그런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독서가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주제의 책을 읽으면서도 문장의 단아함과 잘 짜인 구조가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다른 아이들의 독서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동도서의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며 애를 태우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은 아이들은 그게 하나의 습관처럼 돼서 세상을 볼 때도 책의 필터를 통해 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그 또한 사춘기의 민감하디 민감한 자기애를 다자이 오사무의 ‘얄미운’ 글을 통해서 확인했고, 형들이 득시글거렸던 집에서는 경멸의 대상에 속했던 시집들을 몰래 읽으며 억눌렸던 감수성을 성장시켜나갔다. 부침이 심한 집안사정에도 불구하고 큰 굴곡 없이 성장했던 그의 인생을 뒤흔든 사건은 역시 재일조선인이란 그와 그의 가족의 정체성 때문에 일어났다. 서경식의 양친도 현대사의 거대한 흙탕물과 함께 휩쓸려 결국 일본이란 타지에 정착하게 된 것이지만 그런 흙탕물은 서경식의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덮쳤다. 서경식의 형들이 20대에 접어든 무렵은 박정희의 한일협정과 귀국운동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그의 형들 또한 스스로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강하게 찾기 시작하면서 일련의 활동들에 동참하게 되고, 결국 모든 과오를 반공정책으로 덮으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그물에 걸려 간첩단이란 누명을 쓰고 구속된다. 구속된 두 형은 옥중서한과 인권운동으로 지금은 잘 알려진 서승과 서준식이다. 이 사건이 그의 가족에게 어떤 충격이었을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서준식의 옥중서한과 서경식의 이 책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쓰라렸으나 맑았던 소년의 눈물은 이제 한과 고통이 담긴 청년의 눈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주 언급되는 책은 루쉰의 저작들이다. 그것은 거의 습관과 도락처럼 읽었던 독서인생의 변화이기도 했다. 이제 책은 실존을 마주보는 시험장이 되었고, 읽지 않아도 될 책들로 인생을 보내는 것에 대한 자책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쯤에 막내형인 서준식이 보낸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안락하고 평범한 환경이 아닌 고문과 독서금지라는 징벌이 행해지던 감옥에서 온 이 편지는 서경식에게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소년세계와의 작별임과 동시에, 희망을 언급하지는 않으나 쉬지 않는 발자국만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살아가고 만들어야만 하는 성인의 시작이기도 했다. 명문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중학교 유일의 재일 조선인으로써 일본 이름이 아닌 조선 이름을 쓰기로 고집했던 소년은 이제 완전히 성장해서 루쉰의 편지에서 삶과 생활을 봤고, 독서의 시야는 조선시집과 프란츠 파농으로 확대된다. 일본인이 펴낸 조선시집은 그 수준은 인정되나 그 언어는 부정되는 형태로 서경식에게 소개되었다. 한참 후에 한글을 익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부정될 언어조차 배우지 못했던 서경식에게는 ‘일본어의 감옥’에 갖힌 재일 조선인의 자리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나는 보통 재일 동포나 재일 한국인이란 말은 잘 알았지만 재일 조선인이란 말은 낯설었었다. 재일조선인이란 말은 스스로를 북한 사람이라 느끼는 동포가 쓰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제3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한과 북한이라는 것이 우리처럼 정체성을 결정짓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는 한반도에서 살았었던 조선사람일 뿐이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기를 원한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친 전쟁들을 치루고, 한반도 또한 전쟁을 겪으며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멀어지며 이름으로까지 서로를 구별하는 와중에도 일본의 교토에서 한 소년은 책을 읽고 세상을 관찰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가 읽은 책들은 그가 겪었던 일들과 그가 흘린 눈물과 함께 한 인간을 만들었다. 이 책은 자기만의 생각과 삶에만 갇힌 나약한 사소설적 일기가 아닌, 경계인으로 태어났던 한 인간이 겪은 ‘영혼의 성장’과, 실존적인 삶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한 인간에 대?기록이다. 삶의 중요한 때와 함께 하고 그의 성장을 도우며, 강한 신념을 갖게 도와주는 독서. 너무 많이 말해져서 모든 가치가 상실된 것 같았던 ‘독서’란 말에 다시금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