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계속되는 ‘조로’이야기

글쓴이 최준영 | 작성일 2005.6.23 | 목록
박홍규 지음
발행일 2005년 5월 18일 | 면수 300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2,000원

한 30년 전쯤이었을까. 당시 최고의 TV프로그램은 ‘타잔’과 ‘쾌걸 조로’, 그리고 ‘프로권투’였던 기억이다. ‘타잔’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문명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불러일으켰다면, ‘쾌걸 조로’는 통쾌함의 대명사였다. ‘프로권투’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꿈을 키워준 자극제 역할을 했던 듯하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운명은 확연히 달라졌다. ‘타잔’은 몇 차례 더 리메이크 됐지만 그전 만한 인기를 누리지 못했고, ‘프로권투’의 인기는 뚜렷한 하향세를 타고 있다. 반면 ‘쾌걸 조로’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 이름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세계의 도처에서 출몰하는 다양한 ‘조로’들의 활약상은 여전히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이고, 대체 ‘조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의문에 해답을 제시해 주는 책이 박홍규의 『의적, 정의를 훔치다』(돌베개)다. 법학자인 저자가 불법과 탈법의 화신인 ‘도적’을 미화하는 듯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자못 의아하지만 그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잘못 알려졌던 세계의 ‘조로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즐겁고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적이란 한마디로 ‘의로운 도적’이다. 영어로는 ‘Social Bandit’, 즉 ‘사회적 도적’으로 표기되는데 이 책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에릭 홉스봄의 『사회적 도적과 원초적 반란자들 Social Bandit and Primitive Rebels』에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홉스봄의 책을 단순 번역한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홉스봄의 저작에 저자의 역사의식을 가미하여 ‘의적’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에는 서구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 국의 의적들이 망라돼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간 우리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남미와 러시아 및 동구권 국가, 그리고 인도 등 제3세계를 대표하는(?) 의적들이다. 또한 육지의 의적들 못지 않게 서구 해양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해적’들에 대한 소개와 재평가 역시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서구 의적의 대명사는 단연 ‘로빈 후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의적의 대명사로 군림하게 된 것은 문학작품과 영화 등으로 끊임없이 재구성, 재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중세 이후 서구유럽의 사회상을 함축하는 이야기의 전형성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의적들도 – 어떤 의미에서는 러시아혁명의 진정한 희생자라고 할 수도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소수민족의 의적들 – 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의적은 러시아의 볼가 강을 따라 흐르는 카자크 반란의 전설 ‘스텐카 라진’과 그의 후예 ‘푸가초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의적 ‘네스토 마흐노’ 등이다. 특히 이들은 의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반란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저자는 특히 그들의 사상과 행보 속에 녹아있는 아나키즘적 징후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박홍규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이미 정평이 나있는 바다. 박홍규의 역서들과 각종 저서들을 눈 여겨 본 사람은 그의 아나키스트 기질을 도처에서 발견해 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역시 그의 아나키스트 성향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책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듯하다. 특히 이 책의 글들이 민주노동당의 기관지에 연재되었던 것들이라는 점에서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성향과 생디칼리즘(노동노합주의),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강령과의 상호 연결고리 혹은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 역시 또 다른 재미가 될 듯하다.

그 외 이미 잘 알려진 의적들의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서부 개척시대의 상징적 의적이며 미국 자본주의의 반항아들인 ‘제시 제임스와 빌리 더 키드’와 호주의 제시 제임스 ‘네드 켈리’. 그들의 이미지를 영화로 전화시킨 <내일을 향해 쏴라>와 그 외의 영화와 문학 속에 투영된 의적들의 이야기가 흥미를 돋우고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다양한 조로’들의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왜 의적들이 대중의 관심과 환호의 대상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역설적 대답이자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적에 대한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현실 권력의 벽은 그 보다 훨씬 강고하고 두텁기 만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적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환호는 오히려 위험하며 의적은 단지 복수의 화신일 뿐임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홉스봄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게 들린다.

“의적은 불의를 바로잡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복수를하는 사람, 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정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16쪽)

현실에서의 한계와 좌절, 그리고 되풀이되는 부조리와 모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인도 의적의 여왕 ‘풀란 데비’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멕시코 혁명의 영웅 ‘판초 비야’, 시칠리아 민중의 대부 ‘살바토레 줄리아노’, 브라질의 캉가세이루 ‘안토니오 실비노’ 등 역시 의적과 혁명아라는 이중의 이미지를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쓸쓸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고 있다. 조선 민초들의 꿈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있었으나 현실세계에서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조선의 3대 의적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의 얘기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법하다. 결국 모든 의적들의 무용담은 소수 권력자들이 구축한 현실세계의 벽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한 셈이다.

끝으로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의적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름은 ‘홍길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함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게 바로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들은 늘 의적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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