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로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을 정사로 하는 사행단에 군관자제(개인수행원)자격으로 장장 5개월에 걸쳐 중원대륙을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기행기이다. 당시 연암과 교류를 가졌던 일명 연암사단인 박제가, 홍대용등은 연암보다 먼저 청제국을 다녀온 상태에서 연암의 이번 기행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오히려 연륜으로나 학문으로 정체성이 확립된 시점에서의 중국기행은 그의 안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 왔고 이런 기회를 연암은 열하일기라는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후대에 우리에게 왜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라 칭하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상은 기행문의 일종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은 가히 당시 조선을 경천지동하게 할 정도의 위력이 담겨져 있다. 오죽했으면 정조의 문체반정의 시범 케이스에 걸려 금서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책이 간행되기도 전에 여러 선비들의 입소문으로 필사본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 결국 열하일기는 연암의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하물며 그의 손자인 박규수가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도 세인의 두려움으로 간행 되지 못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핵폭탄같은 위력을 담고 있는 저서이었다.
연암은 당시 계급상승의 지름길격인 과거를 거부했고 아직까지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못하고 소중화로 자부하던 당시 주류양반들의 사상적 연대참여에 철저히 거부한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생을 살아갔다. 북학이라는 실용학문의 거두로써 이용후생적인 삶을 지향했던 그는 유언으로 그저 자기 “몸 하나 깨끗히 씯어달라”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당시 여타의 선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다. 비록 말년에 강권에 의해 몇차례의 지방직에 출사하지만 그의 관직생활 역시 일반민중들과의 소통에 거의 전부를 보내게 되고 <과농소초>라는 불후의 농경학서를 남기기도 한다.
이처럼 연암은 당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청나라에 대해서 오랑캐가 아닌 진정한 제국으로 인식했다. 열하일기가 당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사용치 않고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하므로써 시작부터 직격탄을 받게 되지만 연암의 생각은 이들과 달리했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하에 여행을 하면서 청제국의 문물과 제도, 문화, 과학,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표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론격인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수레제도, 벽돌제조과정, 난방방식, 말타기, 의복에 대한 그의 견해는 날까로운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사대부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선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또한 도강록에서 보여주는 역사인식은 연암으로부터 230여년이 지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상고사에 대한 왜곡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하고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해석하고 있는 현 주류사학자들에게는 더욱더 일침을 가한다. 연암은 심양(성경)에 도달하면서 여기가 바로 고조선,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라는 명칭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표명하는데 이 논지는 지금 학자들 사이에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열하일기는 이처럼 역사,경제,문화,정치등의 다방면에 두루두루 걸친 백과사전이자 연암의 지식의 보고인 셈이다. 그럼 왜 우리는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 칭할까. 열하일기를 이런 백과사전으로 본다면 왠지 딱딱한 학문적인 뉘양스만 풍길테지만 사실 그 비밀의 열쇠는 다른곳에 있지 않고 열하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암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이자 노마드였다. 연암이 강을 건면서 던지 화두에서 그의 노마드적인 삶을 추측할 수 있다. 언덕과 물 사이에서 ‘사이’의 정의를 두 견해 사이의 중간이나 평균을 뜻하지 않고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형이라고 해석하므로서 하나의 고정된 가치나 방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고 삶의 현실속에서 구체적이고 매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초지일관 지속되었던 사상이고 사행길에서 부딛치는 사물과 인물들의 만남에서도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이 인간적인 연암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북경에 도착하여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북경에서 하인 장복과와 이별하는 모습에서 마치 절친한 지인과의 이별에서나 느끼는 애절함과 마두인 창대와 열하로 떠나는 여정에서 창대의 예기치 못한 발병을 간호해주는 모습은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휴먼니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암의 노마디즘과 휴머니즘보다 더 강력하게 열하일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철촌살인같은 그의 웃음 즉 유머러스하고 나이브한 철학이 담긴 위트일 것이다. 사행중 갑자스럽게 들런 상가집에서의 문상장면, 그리고 흉악하고 덩치큰 무뢰배를 만나 슬그머니 뒤걸음치는 장면, 가게점포의 현판을 곡해해서 생기는 해프닝, 한밤중에 고북구를 나오면서 성벽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술을 사용하는 장면, 정진사를 비롯한 사행단에게 중간 중간 날리는 맨트를 그야말로 왜 우리가 열하일기에 열광하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칫 기행문이 백과사전 내지는 철학서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듯이 연암은 군데 군데 적절하게 이런 나이브한 웃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천하의 문장가인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이런 나이브한 웃음도 호질(범의 꾸중)에 이르면 씁슬한 맛을 느끼게 한다. 비록 중국 이야기라고 운을 떼지만 이는 필시 조선양반사회를 실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급에 대한 비판은 비단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연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渡江錄(압록강을 건너며) –> 盛京雜識(심양의 이모저모) –> 馹迅隨筆(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關內程史(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漠北行程錄(북경에서 북으로 열하을 향해)
이처럼 한양를 출발하여 심양을 거쳐 산해관을 통과하여 마침내 수도 북경에 도달하게 된 사행단 일행은 갑작스런 황제의 통보로 부랴부랴 열하(승덕)으로 급히 출발하게 되고 수많은 난관을 무릎쓰고 열하의 태학관에 도달하게 된다.
▣ 눈여겨 볼 만한 각론은 일신수필의 장대기, 관내정사의 이제묘기와 호질등이 있다. 장대기는 산해관 만리장성의 장대를 오르면서 느낀 감회로 무릇 인간이란 높은데 오를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내려올때는 그 높이에 질려 혼비백산하듯이 이는 관직이 높을수록 그 나락의 충격도 크다는데 비유해서 관직생활의 청렴함과 덧없음을 시사한다.
▣ 이제묘기에서는 또 한번 연암의 나이브한 넋두리가 보인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만으로 살았다지만 정작 자신은 고사리를 먹고 속이 불편했다면서 고사리는 어느 땅에서 난 것이냐며 에둘러 백이,숙제에게 한방 날리는 풍경은 연암이 이율배반적인 중화사상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가한 일갈인 것이다.
연암과 함께 하는 18세기말의 중국기행은 다름아닌 연암이라는 불세출의 문장가이자 노마드, 휴머니스트 그리고 재치있는 위트가 있어 여행의 끝은 지루하지 않고 마냥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