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 천제셴지음/홍순도옮김/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5.3.23 | 목록
천제셴 지음 | 홍순도 옮김
분류 절판도서
발행일 2015년 1월 26일 | 면수 388쪽 | 판형 신국판 152x225mm | 장정 소프트커버 | 가격 18,000원

부제가 청 제국의 건설자

세상의 그 어떤 가소로운 나라들이라도 비 오는 날 가로등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벽돌로 뒤통수를 맞아 한방에 물에 젖은 낙엽이 바람에 떨어져 쓰러지듯 넘어지는 나라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까이 고려, 조선이 그랬고, 이웃 중국의 명, 청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금만 열어보면 왕조와 국가 또한 출생, 성장, 노화, 멸망의 순서대로 흘러갈 뿐이며 그 속도의 차이에 따라서 그리고 그 높이와 넓이에 따라서 가라앉는 시기와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

이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나 가정이나… 대부분의 유기체는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본다.

자체적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팽팽하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긴장하고 서로 건전한 비판을 주고받으며 건강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미래가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명과 청의 사이에는 그런 건전한 경쟁은 없었고, 한쪽은 기름진 배를 두드리며 안주하였고 한쪽은 굶주린 배를 채우려 퀭한 눈을 번득이며 칼을 갈면서 때를 노리고 있었던 것.

생태계나 인간계나 한쪽이 부패하면 한쪽이 득세하여 종의 균형은 무너진다는 공식대로 움직이는데… 그 다양한 득세 세력 중에는 꼭 우열을 가릴 필요도 없이 뛰어난 종이 하나 생기기 마련인데 훗날 중원의 주인공이 된 누르하치가 그 주인공.

명을 위해 전쟁에 나섰다가 아버지와 조부까지 잃은 20대에 쌓은 원한을 포함한 칠대한(七大恨)을 1618년 자신이 59세가 되던 해에 명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하면서 하늘에 고하고 명을 치는 첫 깃발을 올린다.

그는 1626년 9월 67세를 일기로 중국 통일과 청의 개국을 보지를 못한 체 사망하고 그의 8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나라의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어 개국하고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기 전 후방을 정리한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홍타이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순치제가 뒤를 잇고 그를 보좌하던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순치제의 삼촌)으로 왕좌가 넘어오면서 중국 통일 전쟁이 완료되면서 여진족은 없어지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건국된다.

이 장대한 중국 통일 전쟁, 중원의 주인을 바꾸는 통일 전쟁(명뿐만 아니라 조선을 포함한 주변 민족까지-누르하치 생전에 조선 정벌을 하지는 않았다)의 선봉장 누르하치의 거칠고 숨차며 피도 눈물도 없었던 냉혹한 장수가 걸었던 길을 꼼꼼하게 열어본다.

책 읽으면서 편안하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누르하치의 행보를 따라가는 내가 숨이 찰 정도로 박진감 있으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청의 흥은, 명의 망을 뜻한다. 그런 명을 조선은 분위기 파악도 잘 못하고 몇백 년 동안을, 심지어는 망하고 난 다음에도 오랫동안(청이 망하기 직전까지…. ㅠ.ㅠ)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었고… 명/청 교체에 자유로울 수 없는 조공이라는 명분으로 교역을 하던 우리의 입장에서는 외교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에 광해군이라는 지혜로운 군주가 있었음에도 인조에 의해서 쿠데타가 성공하게 됨으로써 다시 등을 지게 되고 또 이는 병자호란을 부르게 된다.

여기까지만…

더 가면 조선과 누르하치의 관계에 대한 책이 한 권 새로 탄생할 터이니… 아무튼 책의 후반부에 조선과 누르하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나온다.

다시 말해서 명/청 정권교체기는 일본이 개항을 하고 유럽이 동진하여 동양 쪽을 향하기 직전 혹은 출범 시점… 또다시 말해서 지금의 지구촌은 대항해 시절 이후 줄곧 내리막을 걷는 유럽, 세계의 보안관 노릇을 하던 미국, 한때 동아시아에 온갖 나쁜 짓을 거침없이 행하던 일본이 지고 중국이 다시 떠오르면서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는 또 다른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냐 중국 중심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냐를 놓고 고민을 하는 모양새인 지금….

나는 우리가 주권국으로 두 개의 꽃놀이패를 가지고 두 나라를 약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을 하는데…

너무도 쉽게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쉽게 내보이는 것은 아닌지… 명/청 정권교체기의 맹목적인 조선의 입장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아무튼 광해군, 강홍립과 같은 노련한 정치가가 참으로 아쉬운 동북아 정세, 남북관계, 한일관계, 한미관계라 생각한다.

누가 봐도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노선은 명/청을 바라보던 조선의 입장과는 분명히 발전한 시각과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절대 아픈 과거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정확한 시선과 사상을 가지고 가야 할 듯.

"무조건적인 사대와 무조건적인 반목과 대립만이 한반도의 미래에 안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보다 더 탄력적인 사상과 태도로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 대해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서 떳떳한 우리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며,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독도 영유권 문제의 종식 그리고 일본의 재무장 시도에 대해서는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힘을 합해서 대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나라들도 남의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나라는 없다."라는 냉엄한 논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무 멀리 왔나…..

다시 책으로…

아무튼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서 명을 무너뜨리고 청제국의 기틀을 다진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이다.

뭐 명/청 정권의 교체와 관련한 중국 주변국과의 관계나 전쟁의 진행 및 기타 사항은 검색엔진이나 무슨 무슨 백과사전 등을 참고하시고, 책에 나온 주목할만한 간단한 사안들을 옮겨올까 한다.

매번 이야기하지만, 검색엔진에 나오는 얕은 지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민감한 시기를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의 평전을 읽어보면 그를 중심으로 한 전후좌우와 아래위와 겉과 속이 보인다.

"어디가 망하고 누가 무엇을 세웠다."라는 한 줄만 외워서 시험지 중 한 개의 지문을 찍는 방법은 이제는 사라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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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실의 성은 ‘각라’였다. 또 일반 여진 부족처럼 조상이 거주한 지역에서 성을 따왔다. 그러다 나중에 누르하치의 조상과 부모 세대는 명나라에서 작은 지방을 관리했다. 이들은 벼슬을 받자 바로 한족의 ‘동’이라는 성을 차용해 스스로의 신분을 높이고 명 조정에 글을 오리기도 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 이르러 세력이 강성해진 후로는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한족의 동이라는 성을 버리고 자기 집안 원래의 옛 성 ‘각라’를 되찾았다. 또 그 앞에 ‘애신’을 더해 자신이 금나라의 후예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렸다. 이 성은 여진 민족을 끌어모으고 단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누르하치의 선조 중 역사적으로 존재를 믿을 만한 인물은 각창안과 탑극세뿐이었다. 이 두 명은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친 큰 인물은 아니지만 사서에 종종 이름이 등장하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여진족 사회는 각 부족이 봉기하는 와중에 형제 사이에도 서로 해치고 공격하는 형국이었고, 곳곳이 혼란한 상황이었다.

선조 때에 사신 신충일은 누르하치를 만났다. 누르하치는 선조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 아주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는 조선의 국왕이 자신에 대해 명나라에 좋은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품은 반역의 야심을 조선의 입을 빌려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당시 요동의 상황을 돌아볼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정의 정치 부패가 극심했다. 여기에 수년 동안의 흉작과 몽고의 침입도 당장 눈앞에 닥친 큰일이었다. 더구나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합달 부족의 왕태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의 실력을 키워 서쪽으로는 몽고를 막고 동쪽으로는 건주를 격리해서 요동의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좋게 보고 있었다. 그는 명나라에 아주 공손하고 온순한 태도를 보였다. 명나라로서는 무력으로 버릇을 고쳐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에 따라 누르하치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조선 사람은 대체로 여진족을 두려워했고 여진족이 강력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실만 있으면 바로 여진족을 토벌하려 했다. 이는 분할 통치 전략을 추진하던 명나라에도 나쁠 것이 없었다.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해 여진 부족의 힘을 약화할 경우 자기의 힘을 쓰지 않고도 남이 얻은 성과를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주 여진이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된 계기는 의외로 명나라와 조선 군대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침략을 막기에 여념이 없어지면서 비로소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누르하치는 심지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짓밟았을 때 자신이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함.

만력 23년 누르하치는 상호 교류와 우호 관계 수립을 바라는 글을 보내왔으나 조선 정부는 사적 교류는 ‘명나라에서 금지하는 바’라면서 건주와의 왕래를 거절했다.

누르하치는 팔기 세력이 너무 팽창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팔기 수뇌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에 의해서 계속적인 전쟁을 선택

명나라와 금나라의 살이호산 전투에는 조선의 부대 1만 명도 동로군 소속으로 참전. 명나라의 협박에 가까운 권고를 받아 마지못해 출병. 군량미의 부족으로 전쟁이 불가하다는 핑계와 군량미의 조속한 확충 노력도 하지 않음, 강홍립은 수차례 조정에 사직을 희망했으나 조정에서는 반려함. 같이 전쟁을 치르는 명나라 유정은 경고를 하였으나 속임수에 넘어가 전투 중 사망. 강홍립은 참전을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병력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오래지 않아 부하 수천 명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

기록상으로 강홍립이 미리부터 후금과 ‘내통’했으며 투항은 ‘이미 정해진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홍립은 나중에 혁도아랍으로 가서 누르하치와 만날 때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계단 동쪽에 의자를 배치하고 붉은색 양탄자가 깔렸으며 심지어 기녀도 주었다. 이런 예우는 강홍립이 미리 후금과 연락을 해 투항한 것이 아니라면 받지 못 했을 것이다.

팔기군은 성을 함락한 후 약탈을 자행하다 저항을 받으면 포로로 잡힌 병사나 장정을 모두 학살하는 것을 불문율로 정해놓고 있었다. 이후 심양을 공략한 후 조금씩 바뀜. 포로로 잡힌 한족을 죽이지 않는 것이 인구 및 병력 자원, 재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 이후 팔기군은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주이지 않는다고 선포함.

다시 말해 새로 얻은 땅과 수많은 한족을 통치하려면 한족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인식. 금나라 칸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의사 표시의 기준은 삭발, 즉 머리를 박박 깎는 것. 한족의 존엄성을 모독해 저항의 의지를 원천봉쇄하자는 이유가 있었다.

한족의 정항 운동은 누르하치가 막을 수 없는 일. 그럼에도 그는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하여 더욱 직접적이고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썼다. 바로 강제 이주와 학살이었다.

누르하치의 오랜 문제는 조선.

금이 칸국을 건립한 다음에 강 하나를 사이데 두고 한족과 여진족이 누르하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조선으로 도망. 이 ‘도망자’들의 문제는 쌍방 간의 현안으로 언제나 말썽. 도망자의 수는 천명 6년 이후 진강 등지의 요동 주민이 연이어 조선으로 도주하면서 무려 10만여 명에 이르게 됐다. 여진족은 포로를 재산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민의 도주는 재산을 잃는 것과 같았으므로 갖은 방법을 강구해 도망자를 데려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은 상국의 주민을 마음대로 넘겨줄 뜻이 별로 없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홍립과 수천 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고 사신을 보내 조선과 무역 재개를 주장. 후금의 생필품 조달이 목적. 조선의 반응은 극도로 싸늘함. 국왕의 편지에 대해서 평안도 지방관인 감사 명의의 편지로 회답. 분노한 누르하치는 조약 체결과 신속한 회답을 요구했다. 질질 끌면서 회답을 미루자 누르하치는 포로로 잡힌 모든 양반을 살해한다.

누르하치는 절대 조선이 주도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후금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 다만 부원수 김경서를 살해해 조선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본분을 지켜 양측 간의 평화를 깨는 경거 망동은 하지 말라는 메시지. 주전파인 황태극이 영원 공격 실패에 뒤이은 누르하치의 병사로 칸 자리에 오르자마자 조선 출병을 단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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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 천제셴지음/홍순도옮김/돌베개] 오랑캐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일으켜 명과 몽골 티베트에 이르는 청을 세워 중국과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노련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이자 전쟁광인 오랑캐가 아닌 누르하치의 일화와 생애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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