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부제 : 시대를 담는 그릇
10년 전인 2006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출간한지 제법 된 책이고 그만큼 미리 찜해둔 책인데… 2012년 파주 책잔치에서 인연이 되어 책장에서 눈에 밟히다가… 급한 책들부터 읽다 보니 조금 늦게 손에 잡게 된 책.
내용을 열어보면 아직도 내용이 싱싱하고 신선한 내용들이 많다.
튼튼한 책은 언제 만나도 그대로인 듯, 콜로세움이나 석굴암이나, 석가탑과 같이 몇 천 년을 지나서도 많은 이야기를 정답게 해주는 유물처럼….
한국의 건축계는 손꼽을 만한 사람들이 몇 안되는데 그중 승효상 선생과 故정기용 선생들의 추천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책은 일정 선은 넘었다는 이야기이고…
아무튼 김봉렬 교수는 이쪽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저자.
이 책의 신선함은 건축학자의 눈에 비친 우리 문화유산이라는 점.
역사학자가 보는 우리 건축과, 건축학자가 보는 우리 건축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물론 미술사학자와 역사학자가 보는 문화유산에 대한 해석 또한 완전히 판이함은 여러 번 경험했다.
당연하게 역사학자들 개개인의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르는 것 또한 다양한 시선을 가진다.
우리 반만년 역사의 주인이 누군가에 따라서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에….
이렇듯 다양한 시각만이 상호 견제를 하면서 균형을 잡을 수 있고, 그래야 우리 역사에 대한 건강한 해석이 가능하며, 건강한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다들 긴장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사유가 되기에…
최근의 국정교과서 문제로 여기저기 잡음이 많은데…
분명한 것은 한 나라의 역사와 관련한 근간을 흔드는 국정교과서 제도를 찬성한 사람들, 그 논쟁의 태풍에서 개인의 운신을 위해서 한발 빼서 평가를 유보한 회색주의자들, 앞장서서 결사반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적어도 문사철과 관련한 서적을 탐닉하는 것을 취미로 하는 한 개인의 불매운동이나 소문 내기 등의 소심한 복수를 위해서라도….
아무튼 저자는 우리와 직결되는 한국 문화를 보는 두 가지 극단적인 편견의 함정에 유의하라고 한다.
그 하나가 원초적인 문화의 산물로 비하하는 태도, 그 다른 하나는 근거 없은 칭송과 조건반사적인 반사적인 감탄의 분위기, 근대화 시기에는 너무 폄하해서 문제가 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맹목적인 애정이 문제라는 것.
덕분에 김봉렬은 팩트를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고, 유홍준은 스토리에 유물을 넣어 엮어내는 특출난 장점을 가진 사람.
물론 스토리만을 위한 맹목적 추켜세움은 최근에는 다들 수위 조절을 하는 듯한 분위기인데… 김봉렬, 승효상 둘 다 같은 스탠스를 취한다.
물론 나도 그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아무튼 책은 월간지인 『이상건축』에 1995년 11월부터 연재해온 내용들을 다시 추스린 것으로 원래 26회의 계획으로 1997년까지 실린 내용이 예상보다 방대해서 총 3권의 책으로 묶었다.
첫째 권은 비교적 역사적 관점이 부각된 내용, 둘째 권은 다양한 용도와 목적의 건축들 속에 담겨 있는 생활과 생각들, 셋째 권은 주로 이론적인 내용을 다룬다고 한다.
일반인을 위한 건축 답사기인가, 아니면 건축인들을 위한 학술 서적인가의 경계선에 서있는 책으로 집필의 동기는 건축인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한국건축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게 하는 위함이 녹아 있다.
이 말은…
우리 문화와 건축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쉬운 책, 보물창고의 문턱을 넘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려운 책.
내게는… 아주 편안한 책
책속의 대부분의 역사적 유적지를 다 깊이 있게 돌아봐둔 발품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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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 임진왜란 후 중거 때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여건이었다고는 하지만, 별전과 관음전 등 1970년대 복원 때는 적어도 원래의 칸살잡이에 맞는 8세기 경의 구조법을 택했어야 마땅하다. 어차피 원형을 알 수 없는 복원이기 때문에 건물의 물리적 수명만을 위해서라도 하부구조에 맞는 건물을 세웠어야 한다. 구조적 결함 때문에 오래된 대웅전과 극락전은 물론, 1970년대에 복원된 건물들도 가운데 칸의 지붕과 평방 및 창방이 주저 않고 있다.
-최고의 신분이자 최고의 지식인이던 김대성이 중년 이후의 모든 생애를 바쳐야 할 만큼 두 절의 공사는 난관 투성이였다 규모로 치면 몇 십 배에 이를 조선 말의 경복궁이 3년 만에 완공된 것에 비한다면, 1,000년 전이라지만 그 작은 두 절을 만드는 데 40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공사 기간 자체보다는 계획과 설계에 장기간이 소요됐음을 의미한다. 석굴암의 수학적인 계획과 과학적인 시공은 물론이고, 불국사도 통일 이후 실험되어온 쌍탑식 가람의 새로운 전기로 엄격한 기하학적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만큼 두 절의 계획은 한국건축사 상의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 무더운 인도 지역에서 석굴이란 서늘하고 어두운 최상의 종교적 공간. 기원전 3세기부터 꾸준히 석굴사원이 조성, 특히 서부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1,000여 개소의 석굴들이 경영.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 운동은 지리적으로 9,000Km를 거쳐서, 시간적으로는 1,000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한반도의 동쪽 끝 경주 토암산에서 그 찬란한 마지막 꽃을 피웠다.
통일의 기념 정원 안압지
– 국력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최초의 통합국가로 등장한 역사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귀족들의 반란으로 왕권 유지조차 어려웠고, 백제의 공격으로 국토의 1/5을 빼앗겼던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실추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국가적 사업으로 벌인 황룡사 9층 탑 공사마저 기술과 재정의 부족으로 중단했다가 적국 백제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완성한 후진국이 아니었던가.
– 무엇보다도 신라는 철저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그럴듯하게 미화된 화랑제도는 어린 소년들을 모아서 폐쇄된 집단을 만들고 온갖 세뇌교육과 훈련을 통해 전쟁터의 독전대로 사용하기 위한 군사조직, 통일전쟁의 영웅 김유신은 망해버린 가야의 왕족, 가문의 부흥을 위해 기꺼이 전쟁에 임했고, 신라 정부는 전권을 위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군대를 통솔. 또 다른 영웅 김춘추는 약체 선덕여왕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차기 왕권을 노리는 한편 고구려, 백제, 당나라에 걸친 스파의 망을 사적으로 운용, 신라의 통일에 대한 염원은 결코 민족의 통합이나 번영을 위한 숭고한 이상이 아니었다.
– 안압지는 동맹군으로 믿었던 당나라 군이 한반도 정벌의 야욕을 드러내, 이제는 당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대당 전쟁은 676년에 가서야 당 군의 철수로 겨우 마무리된다. 그래서 아직 대당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674년 왕궁인 반월성 옆에 안압지를 만들고 전승 기념잔치를 대대적으로 벌렸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인 679년에는 안압지 경내에 동궁을 건설해 왕경 정비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16년간의 국제전을 치르면서 신라인들은 백제와 고구려뿐 아니라 최고 선진국 당의 왕궁과 도시를 샅샅이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적 미개성과 에술적 후진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새로 만들 안압지와 동궁이야말로 국제적 수준의 최고 건축과 정원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 안압지와 동궁의 유물들은 신라의 멸망과도 운명을 같이 했다. 동궁이 통일 직후 만들어진 최초의 건물이었다면, 멸망 직후에 불에 타고 파괴된 최초의 건물이기도 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을 임해전(동궁의 정전)에 초청하고 극진한 잔치를 베풀었다. 망해가는 국가의 추락된 왕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마지막 애걸이었다. 고려시대 기록에는 안압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출토된 유물도 고려시대 것은 없다. 고려의 점령군들이 구 왕국의 상징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왕궁 시절에 빠트린 것도 있지만, 불상류나 귀금속들은 안압지가 초토화되기 직전 보존을 위해 호수에 던져진 것들이다.
– 종묘
–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4대조까지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를 건설. 목조, 익조, 도조, 환조라는 앞선 왕계가 생긴 이유는 예기에 따르는 것 "천자는 6대조까지 자신을 포함하여 7묘제를, 제후는 4대조까지 자신을 포함해 5묘제를 택한다"라고 했다. 이 씨 조선왕조는 중국에 대하여 제후의 신분이었다. 그러면 5대가 지난 선왕의 위패는 어찌하는가? 일반 가정에서는 5대가 넘으면 위패를 태우고 1년에 한 번 합동으로 지내는 시제로 대신한다. 그러나 군왕의 위패는 태울 수가 없어 영구 보존해야 하므로 별도의 사당을 짓고 위패를 옮기게 된다.
– 정전 내부는 태조를 가장 서쪽 칸에 모시며 후세의 왕일수록 동쪽으로 모신다. 서쪽을 높은 위계로 치는 이른바 ‘서상西上’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서상西上의 원칙은 중국에서도 전한시대 이전의 것으로 고대의 예법이었다. 이후에는 좌측인 동쪽을 서쪽보다 높게 여기도록 방위 개념이 바뀌게 된다. 조선조에 종묘를 창건하면서 굳이 서상의 원칙을 따른 것은 얼마만큼 고대의 예법을 지키려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 증축의 결과 두 건물은 더욱 강한 방향성을 지니게 됐다. 정전은 서에서 동쪽으로 뻗아가는 방향성을, 영녕전은 양옆으로 뻗는 방향성을 가진다. 선형의 방향성을 갖는 건물들은 역시 선형의 길들과 조합되면서 강한 역동성을 얻는다. 일견 정숙하고 정지된 듯한 종묘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느끼게 되는 원인이다.
– 총 88명의 공신들이 봉안되어 있다. 대부분 국왕의 보위나 국가적 공헌을 한 신하에게 추증되는 명예였다. 대유학자 또는 절의의 성리학자로 인정돼 문묘에 배향된 유현 가운데 이이, 이황, 송시열만이 오르는 정도.
– 변형에 대한 예측 불확실성은 완성 후에 정확한 수직이나 수평을 보장하지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이라도 목질의 불균질성과 변형의 불확실성을 극복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목구조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목구조의 기법은 애초붜 불확실한 변형을 인정하는 범주에서 개발되어야 했다. 한국 목조건축에서 수직과 수평선은 공사의 기준일 뿐, 지켜야 할 형태적 규범이 아니다. 한옥의 처마는 시간이 갈수록 처짐이 일어나지만, 영원히 수평선을 이루지 않는다. 애초부터 수평선을 포기하고 위로 휘어 놓았기 때문에 처짐이 일어나도 항상 휘어진 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원리를 ‘시각적 안정성의 원리’라고 부르자. 두 점을 잇느 ㄴ선 가운데 직선은 단 하나지만, 곡선은 수없이 많다. 불가능한 하나에 어렵게 도달하기보다는 무한히 많은 가능성을 택하는 조형적 원리, 실은 구조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 한옥의 선은 그야말로 목수들 마음이다. 그러나 훈련된 장인들이라면 그 마음들의 편차가 그다지 크지 않고, 그들을 명장이라 부른다, 한옥의 선을 이해하려면 목수들의 마음과 장인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배흘림의 공식을 만들거나 지붕의 곡선을 수학화한답시고 12개 변수가 등장하는 함수식을 만드는 노력은 학위를 따기 위한 연구, 고통스러운 유희일 뿐이다.
– ‘한국건축의 자연미’라 부르는 ‘자연미’는 자연스럽게 얻어진 우연미가 아니다. 극히 계산되고 인공적인 기법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미’일 뿐이다.
– 수원화성은 한국 디자인 역사상 불가사의한 돌연변이로 여겨질 만하다. 도시계획 개념의 획기적 전환을 이뤘으며, 튼튼하고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그리고 군사 방어용 건축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의 건축물들을 만들어냈다. 건축이 가져야 할 고전적 덕목들인 아름다움, 쓰임새, 튼튼함의 여러 조건을 충족시켰으며, 동시에 새롭고 이상적인 건축도시관을 현실화시킨 당대의 명작이다. 이 모든 완성이 계획 1년, 시공 2년이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수원화성을 예비할 만한 수준의 다른 건축물들이 있어왔던 것도 아니다. 흔히 수원화성을 실학사상의 건축적 결실이라고 평가하지만, 당시의 실학이란 재야의 지식일 뿐 공공사업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수원화성이 최초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적어도 2세기 동안 이처럼 대규모의 건축을 건설해본 적이 없었고, 하나의 신도시를 계획하고 만들어본 경험은 더더욱 없었다.
– 수원화성 계획과 축성을 통해 축적된 건축론은 말련의 『목민심서』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우선 건축의 합리적인 수행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건축주가 건물을 세울 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절차로서 설계와 기술자 선정, 시공자 선택, 공사비 견적과 자재수급, 공사관리, 조경 공사 및 마무리를 들었다.
– 수원화성을 돌로 쌓을 것을 주장했던 그가 말년의 저작에서는 토성을 옹호하고 나선다. 벽돌성이 가장 우수하지만, 여전히 벽돌 굽는 법에 익숙하지 않아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또한 돌로 쌓은 석성은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오래 견디지도 못하며 적을 방어하기도 어렵다. 즉 겉만 단단하고 속은 물러서 실효가 없기 때문에, 효용과 비용 면에서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수원화성의 경험을 되새겨 자신의 축성론을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수원화성 계획에서 선보였던 보루와 치성, 곡성, 적대 등의 방어시설들은 여전히 필요성이 강조됐다.
– 1975년 이후 수원화성의 충실한 복원은 『화성성역의궤』덕분.
– 공심돈空心墩은 수원화성의 구조물 가운데 가장 독특하며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다. ‘돈’이란 원래 망을 본다는 뜻의 ‘후’侯와 함께 써서 ‘돈후’墩侯라고도 하는 독립 망루였다. 돈후에는 항시 소수의 군대가 머물면서 초소 역할을 한다. 공심돈은 돈대의 내부를 비워 여러 층으로 구성하고, 각 층마다 주변을 살피고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공사에 동원된 기술자와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급. 기존의 임금 지급방식은 업종별 구별 없이 한 달 기준의 정액 지급방식 이었지만, 수원화성 공사에서는 일종의 성과급 차등 지급방시긍 채택. 업종별 기술의 차이와 작업한 날짜를 따져서 임금을 주었기 때문에 예산을 절감, 작업의욕과 생산성을 높임. 계획의 개념과 방법부터 재료와 공법, 노무관리 등 건축의 모든 단계에 걸쳐서 합리성과 창의성으로 충만한 과정이었다.
– 옹성과 치성, 3,600보에서 4,600보로, 자생력을 가진 자족도시를 지향, 7만 평의 저수지, 대유둔 경영, 고용된 농가 2집마다 소 1마리를 대여 농사에 활용, 번식과 매매를 통해 소시장 활성화 전국 3대 소시장 덕분에 수원갈비, 서울대 농대가 있었던 유래가 됨. 수원갈비와 함께 2세기 전 정조의 야망이 변형된 흔적으로 남음.
– 읍성과 산성의 차이, 읍치와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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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1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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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는 건축인이며 건축 역사학자인 저자가 우리 건축의 흔적을 찾아 그 속에서 발견한 언어를 현재에 대입하여 새로운 건축을 마법과 같은 신비주의의 산물이 아닌 건축적 실체를 찾아 그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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