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2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7.12 | 목록
김봉렬 지음
발행일 2006년 3월 31일 | 면수 416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25,000원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2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부제 : 앎과 삶의 공간

건축학과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문화재 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우리 건축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쓴 책.

어쩌다가 건축학도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됐을까… 하는 게 더 궁금할 정도로 이 책은 한국 건축에 역사를 담아냈다.

먼저 보이는 시각적인 건축, 산과 계곡 속에 녹아 있는 건물과 건축주의 사상, 시대적 배경 등을 통해 한국건축에 숨어있는 일종의 암호를 해독해서 현존하는 건물이 어떻게 구상되어 구축되고 지금에 이르는지의 史的 스토리를 추리한다.

초판이 나온 지 10년이 지나서 나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인연이 된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시리즈 3권은 어느 좋은 날 여유시간을 한 일주일 정도 잡고 한국을 찬찬히 여행할 시기가 오면 내 조그만 행낭에 아무리 빈칸이 없어도 세 권은 반드시 넣고 돌아볼 작정이다.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의 1,3권을 먼저 보고 2권으로 넘어왔는데, 이 시리즈를 찬찬히 읽어가면서 느낀 점을 2권 마지막에 수록된 발문에서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내심 부끄럽기도 하다.

그 발문은 시인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인 황지우 시인의 글, 그 어떤 서평보다도 잘 지어진 그 글의 일부를 따와서 책의 감상에 가름한다.

사람들은 권력을 잡거나 돈벼락을 맞았을 때 그 잉여로 큰 집을 집기도 하지만 어떤 좌절이나 절대적 결핍에서도 터무니없는 집을 짓기도 하는 것 같다. 대저 집이란 사나이들에게 욕망의, 바로 맞은편에 놓여 있는 유혹하는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봉렬은 집 한 채에 사회, 경제적인 축, 정신사적인 축, 건축 공간의 이상 수학적인 분석이라는 축을 집어넣어 이 땅의 후미진 곳에 버려지다시피 한 이른바 ‘역사적 건축’에 대한 입방체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또렷하게 그려내 보여준다.

"적극적 은둔", "무표정한 담장", 인간의 집을 ‘자연 속의 한 점’으로 인식,

무조건적으로 호평만 늘어놓지 않고 가혹할 정도로 혹평 받는 집도 있다.

그간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었던 ‘미륵대원’, ‘소쇄원’, ‘광한루원’, ‘선암사’에 대해서 죄스러움을 느낀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서 그 틀림을 바름으로 바꾸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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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해가는 신라의 마지막 왕세자인 마의태자, 그의 아버지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최고의 귀족으로 여생을 편안히 보냈지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그는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망국의 한을 대신하였다. 역사상 가장 슬픈 비운의 주인공으로 묘사된 그가 금강산으로 향한 통로는 바로 하늘제

– 삼국시대부터 하늘재와 지릅재를 관장한 이 요충지에 사찰이나 객원이 경영, 그러다가 후삼국 시기에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점령한 궁예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고려가 건국된 후 충주 유씨 세력들이 왕건의 지원을 받아 석국을 쌓고 여러 시설들을 조성하여 대대적인 사원으로 확장, 창건했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사건의 역사가 될 것이다.

– 인도에서 발생한 석굴사원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했고 경주를 종착점으로 삼았다. 화강암은 너무 단단해 인공적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고, 애써 파내도 결을 따라 붕괴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굴이나 지형을 찾아 석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목조 지붕을 얹은 마애불로 만족하던가. 그러나 원초적인 석굴에 대한 동경은 너무나 강해 돌을 쌓아 석실을 만드는 이른바 축조 석굴들이 만들어졌다.

– 이 석굴의 잔재 앞에서 지리적으로는 4,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거리와, 시간적으로는 1,000년을 넘는 장구한 세월의 축적을 읽는다.

– 별서란 생활 근거지와 휴양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별장. 보통의 경우, 자신의 시골집 인근에 원림을 조성하고 정자 건물을 세우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정자 건물은 가운데 방을 두고 주변에 마루를 개방한 형식을 취했다. 온돌 방과 마루가 공존함으로써 기숙과 휴양을 같이 할 수 있는 일상생활터가 될 수 있었다.

– 탑의 층수를 찬찬히 세어보면 모두 13층이지만, 6층 이상은 휴먼스케일 human scale을 초과하므로 그냥 ‘다층석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 사람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크기나 수량을 의미한다. 사람의 인식은 ‘몸’이라는 감각기관의 크기를 기준으로 사물을 인식한다. 건물의 층수를 예를 들면 5층까지는 쉽게 그 층수를 알아볼 수 있지만 7층 이상이 되면 세어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 신영훈 선생은 낙동강 동쪽의 안동문화권과 비교해 상주의 살림집들은 개방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상류 주택의 경우 ㅁ자형 뜰집을 기본으로 하는 폐쇄적인 안동형에 대해, 상주의 집들은 ㅡ자, ㄱ자, ㄷ자 등으로 개방적인 안마당을 가지며 개방된 대청과 툇마루들이 발달했다. 안동과 상주의 건축 문화적 차이를 역사적 전통에서 찾기도 한다. 안동은 고구려의 옛 영토였고, 후삼국 왕건의 거점이었기에 북방 문화권에 속한다. 반면 상주는 가야 계통의 사벌국沙伐國의 고토였고, 견훤의 고향이었으며 따라서 남방 문화권에 속한다.

– 광한루의 역사는 1419년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지으면서 시작한 1581년까지의 첫째 시기에 황희에 의해 건립됐지만, 역대 남원 부사들이 중수하고 단청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누각의 경영을 지방관청에서 담당하며, 일종의 객사 누각으로 쓰였던 것 같다. 중간에 정인지에 의해 광한루로 누대명이 개명되면서 의미상 중대한 변화 즉 객사 누각에서 천상의 궁전으로 격상되어 이후에 수많은 설화와 창작의 무대의 배경이 됨.

1582년부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두 번째 단계, 광한루 앞에 커다란 호수가 조성되고 오작교가 놓이면서 3개의 섬 즉 삼신도가 축조되어 본격적인 원림으로 경영. 당대의 최고의 문인이자 풍류가였던 정철이 발의하고, 당시 남원부사였던 장의국이 실무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작교가 놓이면서 광한루는 월궁이 되고 월궁 앞의 호수는 당연히 은하수가 되며, 은하수에는 견우와 직녀가 없을 수 없으니 오작교의 완성으로 완전한 천상의 설화 세계를 재현할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황폐해지고, 1626년 본격적 재건을 함.

20세기에 들어서 광한루원은 기능이 급변, 1909년부터 1928년까지는 일제 남원재판소와 헌병분견대(감옥)로 사용되었으며, 이때의 흔적이 누각의 초석과 기둥들에 패인 흠자국으로 남아있다. 일제 후반기부터는 춘향을 앞세운 관광지로 탈바꿈되기 시작한다. 1931년 춘향사春香祠의 건립을 시작으로 방장정方丈亭의 축조, 그리고 1971년의 경역 확장과 완월정玩月亭의 신축 등, 현재와 같은 독립된 관광지로 조성되었다.

– 현재 전해지는 누원의 창건 연기들은 다분히 환상적이며 낭만적이나, 광한루원은 남원부의 중요한 도시 시설로 경영되었으며, 실용적 목적(유사시 군사 지휘소 역할을 함. 중종반정 때 광한루는 군사 집결소로 사용, 또한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송대빈의 시에도 전란 중에 광한루가 주요 군사시설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이 매우 큰 구조물이었다고 판단된다.

– 누각과 정자는 경관을 담고 모으는 취경聚景 건축물이다. 따라서 비어 있어야 담을 수 있따. 또한 누정에서는 많은 경관을 볼 수 있거나(多景), 자연 경관을 둘러 있게 해야 한다. 따라서 누정은 단순하고 허해야 한다.

– 삼신산 또는 삼신도는 원래 5개, 뿌리가 없어 흔들리는 신산을 천제는 해신인 우강을 시켜 열다섯 마리의 거대한 거북을 보내 다섯 개의 신산을 등에 지도록 함. 용백국의 거인이 장난삼아 낚시로 거북이 여섯 마리를 낚아버려서 대여산과 원교산은 북극으로 떠내려가 바닷속에 침몰하고 발해에는 영주, 봉래, 방장산의 3신산만 남게 되었고, 이곳은 아직도 신선들의 불로장생의 세계. 중국과 한국 정원은 이 신선의 세계를 이상형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동쪽, 발해만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에 삼신산이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한라산을 영주산,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으로 여겼고, 한반도 전체가 신선의 세계가 되기를 원했다.

– "제일 좋은 절은 어디죠?" 약간은 황당하고 느닷없는 이런 질문에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야 선암사죠"라고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비 불교도들은 ‘한국불교’하면 얼른 조계종을 연상하지만, 현대 한국 불교는 무려 20여 개 종에 달하는 종파로 나뉘어 있다. 그 가운데 종세가 가장 큰 곳은 물론 조계종이며, 다음으로 태고종을 꼽을 수 있다. 그 나머지는 거의 몇 개 절 중심의 군소 종파라 해도 무방하다. 남한에 있는 사찰 가운데 19세기 이전에 조성된 사찰은 대략 1,000여 개소로 추정하고 이들을 보통 ‘고찰古刹’이라 부른다. 1,000개 고찰 가운데 99%는 조계종 산하의 사찰이고, 제2종단이 태고종은 단 두 개소의 고찰만을 가지고 있다. 본산인 서울 신촌의 봉원사와 순천의 선암사. 그나마 선암사의 법적 주최인은 조계종이기 때문에 봉원사만이 태고종의 유일한 고찰이다.

– 선암사에 거주하는 이들은 태고종 승려들이고, 태고종 종정 스님의 주석처이기도 하다. 법적인 주인은 조계종이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태고종인 이중적인 소유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더 묘한 것은 현재의 재산 관리인은 두 종단 어디도 아닌 순천시장이라는 점이다. 조계와 태고 두 종단의 소유권 소송이 아직도 법원에 계류 중이고, 최종 선고가 날 때까지 관할 지방관인 순천시가 임시 관리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그런 지가 30년이 지났다.

– 선암사의 소유를 둘러싸고 벌어진 두 종단의 갈등은 급기야 살인사건으로까지 확대돼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비극의 씨앗은 1950년대에 뿌려졌다. 1954년 대통령 이승만은 이른바 ‘사철 정화 유시’를 불쑥 발표했다.
"재래의 가정을 가진 승려는 친일승이니 모든 사찰에서 물러나라."
이른바 비구(수행승)와 대처(교화승)의 대립을 조장하는 명령이었고, 해방 후 불교계 최대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교화승은 7,000명이었고 비구측의 수행승은 3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수였던 수행승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과 사회적 여론에 힘입어, 때로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단 3년 만에 전국 대부분의 고찰을 손에 넣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선암사를 위시한 극소수의 사찰만이 교화승들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비구와 대처 승단은 급기야 종단을 달리하기 시작했고, 비구 측의 조계종 창종에 맞서 대처 측은 태고종을 창종 하기에 이르렀고, 선암사는 봉원사와 함께 태고종의 중요한 사찰로 자리매김되었다.

– 선암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을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창했다는 설이 있고, 아예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선암사의 삼층석탑이 11세기경에 중수된 것으로 보아 도선이 활약하던 10세기경에 창건됐을 가능성이 높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암자 규모였을 것이고, 실질적인 중창은 11세기 말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서다.

–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11대 왕 문종의 넷째 아들. 고려조는 각 지역의 여러 세력들이 연합하여 집권한 정권. 건국 과정에서 신라 귀족들의 종교였던 교종과 지방 호족들의 다양한 불교 종파들이 발흥할 수 있었고, 건국 후에는 서로 간의 갈등과 대립이 증폭. 특히 법상종과 화엄종을 중심으로 양분되다시피한 불교계의 대립은 정치권의 대립을 조장하는 폐해까지 끼쳐 불교계의 통합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의천은 우선 교학에 바탕을 두고 선불교를 통합하려는 교관겸수를 주장했다. 그가 개창한 천태종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포괄하려는 일치 운동이었다.

– 의천의 일치 운동은 당시 뜻있는 지식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어 성공하는 듯했지만, 외척인 인주 이씨 세력과 결탁한 법상종의 견제에 밀려 1094~1995년 이태 동안 전라도 지방을 전전하게 된다. 이때 선암사 대암각에 머물면서 오도한 후 개성으로 올라가 천태종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 의천 이후 1세기는 고려 중기의 모순과 혼란이 극대화한 시기. 무신들은 기존의 문벌 귀족ㅇ르 깡그리 숙청했고, 귀족들의 편에 섰던 기존의 불교 세력들도 극심한 탄압을 받음. 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한 불교계는 1182년 보제사에서 담선법회를 개최, 이 법회는 군부 정권에 의해 강요된 일종의 불교계 자정대회와 같은 성격을 띠었고, 참석한 교계 지도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라는 말법적 좌절파와 ‘이제라도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불교계가 살아날 방법을 찾자’라는 정종분리파로 양분. 결론을 못 보고 설왕설래하는 와중에 보조국사 지눌이 사자후를 토하면서 타락하고 부패한 불교계의 세속화를 벗어나 본연의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순수한 종교적 선언은 결과적으로 세속 정치 불참여론으로 연결돼 최씨 정권의 호감을 사게 됨. 1200년 일단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조계산의 서록, 천태종의 중요 사찰 선암사가 있는 반대편에 송광사의 전신인 수선사를 창건하면서 새로운 종파 조계종을 개창.

– 18세기 후반, 때마침 정조 임금은 아들이 없어서 선암사의 눌암선사에게 축원을 하교했다. 눌암은 원통전의 관음보살에게 세자 탄생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올렸고, 이에 부응하듯 훗날 순조 임금이 된 세자가 탄생. 순조가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자마자 마치 탄생의 은덕을 갚듯이 선암사에 친필 현판과 많은 토지를 하사했고, 선암사는 본격적인 왕실 원당으로 위상을 갖추게 됐다.

– 원당 혹은 원찰로 지정되면 많은 혜택이 따름. 우선 지방관이나 유생들의 경제적 수탈과 인격적 횡포에서 해방. 조선시대 사찰에는 관에서 필요한 종이나 미투리 등 필수품 생산을 강제로 떠맡거나, 산성이나 저수지 건설 등 힘든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게 다반사. 민간 유생들은 유생들대로, 절에 무단으로 들어와 음식 접대 강요 등 수탈을 일삼았다. 일단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되면, 이런 무례와 수탈은 왕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돼 일어날 수 없었다. 왕실 원당이 설치되면, 임금의 친필이나 보물들과 아울러 토지와 노비 등의 재산이 하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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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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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건물들 속에서 앎과 삶의 공간에 숨겨진 역사적, 사상적, 건축학적, 생활사적 사실과 비밀들 분석하고 찾아 들어가 집주인이 이루고자 했던 사상적 완성과 건축학적 목적을 추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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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선암사 시설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건물은 바로 ‘대변소’다. ‘깐뒤'(뒷간)라는 오래된 표기법으로 씌어진 현판이 이색적인 이 T자형 화장실을 보고, 돌아가신 김수근 선생은 "한국에서 가장 멋진 화장실’이라 극찬한 적이 있다. 또 임진왜란의 전화에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이라 전한다. 그렇다면 선암사의 현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최고의 문화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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