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 한홍구 지음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8.3 | 목록
한홍구 지음
발행일 2016년 3월 21일 | 면수 443쪽 | 판형 신국판 152x225mm | 장정 소프트커버 | 가격 20,000원

부제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지구 상 거의 모든 나라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그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백성들이 위임한 자들이 사법부에 임명한다.

하지만… 법과 가까운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은 법망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고, 빠져나가게 해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 법을 모르고 멀리하던 사람은 작은 기준에도 곤욕을 치르곤 하는게 이 지구라는 나라의 현실.

그 법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들을 법조인이라 부른다.

물론 과거 선출직과 임명직 시절도 있었고 일정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오를 수 있고, 최근 이 시험은 흙수저를 금수저로 바꾸는 유일한 천국을 향하는 문이었던 시절도 마감해가는 듯 하고…

여하튼 특정 법조인의 자리는 임기를 보장하면서 소신있는 드라이브와 의사결정을 요구하는 시스템(시스템으로만 존재하는 시절이 지금까지 이른다고 봐야하나?)을 만들어둔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처럼 정기적 임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 것(원래 취지는)은 자리를 보전하게 하여 외압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만의 올곧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소신을 갖고 법을 수호하고, 엄정 집행을 하라고 보장해주는 자리인 것.

그 권한을 엄정하게 집행한 조직원도 있고, 권력의 하녀로서 사법 자판기, 거수기가 되어버린 자들도 제법 있고, 심지어는 평검사라는 놈이 대통령을 물어 뜻은 강아지 노릇을 한 넘도 있었다.

과거 애초에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정체성을 지키다가 법복을 벗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더니 최근 명예를 버리고 정권의 창출에 일조하고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더니 이제는 부의 축척을 향하는것 같아 씁쓸한 지금이다.

해방 이후 어두웠던 시절을 지나 지금에 이르는 동안 사법부가 걸어왔던 길들 중 특히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및 정권에 의해서 휘둘린 아픈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근대사(아직도 진행중인가?)에서 ‘국가정보원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있을 때 수집하고 조사하고 경험한 내용들을 책으로 나온 것.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출발점은 2004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부터 3년간의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으로 국정원 내부 기밀문서들을 직접 접하면서 그간의 풍문들과 당시의 증거들을 결합하여 『한겨레』에 2009년 5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했던 내용들이 쌓였고, 그 내용들을 합하여 가다듬고 그 후 6년여 세월이 흘러 책으로 냈다.

덕분에 보고서 형식을 띈다.

“회한과 오욕의 역사”라는 말은 전두환에게 쫓겨나는 이영섭 대법원장의 퇴임사에서 토해낸 말. 이 10자도 안되는 한마디의 말이 우리 법조계의 어두웠던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생각한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분리하고 입법부에서 만든 법률의 엄정한 집행을 기대하며 맡긴 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집권 연장이라는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 그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정치 검사, 정치 판사 들에 의해 희생을 다했던가…

책에서 저자는 그 司法府가 司法部로 전락하였다고 슬퍼했던 한 법조인의 이야기를 끌어오면서 최근 판결들이 보수주의적으로 기울어가면서 다시 司法部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고 있다.

수많은 희한한 사건과 사고들을 최종 정의하여 잘,잘못을 따지는 곳인 사법부의 굴직한 사건들을 이승만 정권부터 최근까지 시대순으로 사건이 흘러갔던 사법 절차의 타당성과 판결 내용이 어떠했는지 등을 되짚어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의감에 불타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판결문으로 웅변하는 법조인이 적지 않다는 것에 기대를 건다. 하지만 파워 인텔리들이 말도 안되는 말들을 특정 포털에 글을 올리고, 일탈을 조장하고 행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도 있다.

거기까지 가면 너무 멀리가니….. 다시 사법부로 돌아가자

물론 책을 읽다 보면 “우리 법관들도 판결로 말해야 했을 때 침묵했고, 판결로 말해서 안 되는 것을 말하기도 했으며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에 등을 돌리기도 했다” 라는 어느 법조인의 양심선언에 가깝게 자신들의 행동을 자책한 주인공의 이름도 알게 된다.

물론, 바른 노선을 걷다가 다른 노선을 걷는 사람들도 제법 나오고…

법조인들이 임관 당시 맹세한 그 법적, 정치적 양심을 은퇴하는 시점까지 정확하게 지킬 수는 없는 것일까?

다시 또 머리에 뱅글뱅글 도는…..

법위에 잠자는 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부릅 뜨고 잘 지켜볼 일이다.

****

– 전두환에게 쫓겨나는 이영섭 대법원장이 퇴임사에서 토해낸 “회한과 오욕”이란 말을 연제의 제목으로 삼은 것도 기본적으로 이 보고서에서 사법부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거듭 확인하게 되겠지만, 국민과의 관계를 놓고 본다면 사법부는 가해자였다.

– 사법부 보고서를 다 쓰고 난 뒤에 든 절망적인 느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는 중앙정보부-안기부가 30년 동안 단 한 명의 판사도, 단 한 명의 검사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협박한 일이 없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그런데도 사법부와 검찰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 사법부 차원에서는 잘못된 과거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재심 재판부가 피해자들을 위로하면 다 되는 것일까

–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재판소의 판사는 250명이었고 검사는 138명이었는데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변호사는 모두 420명으로 그중 한국인은 250명이었으며 38도선 이남에는 단지 150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인력 부족을 이유로 미군정은 친일 법조인을 걸러내기는커녕 무자격자들에게도 마구 변호사 자격을 부여했다. 이때 변호사 자격을 움켜쥔 자들 중에는 일제 때의 법원 서기나 수완 좋은 미군정 통역관이 많았다. 일제하의 마지막 변호사 시험은 1945년 8월 14일에 시작하여 민법, 형법, 상법 세 과목만 치르고 해방으로 중단되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관련 서류를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응시자들은 집단으로 합격을 요구했다. 응시자 200명 중 남쪽에 연락이 된 106명이 변호사 시험 합격 증서를 교부 받고 판검사로 임명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 이승만 정권

– 헌법에 규정된 법권의 임기 10년, 최초 의도는 제헌헌법에 법권의 임기 규정 사연은 단순치 않다. 해방된 조국의 사법부를 일제와 무관한 깨끗한 법조인으로 채울 수 없던 탓에 10년쯤 지나 새 나라가 젊은 법조인들을 키워낸다면 일제 시기의 별로 깨끗하지 못한 경력을 가진 자들을 충분히 교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헌환 교수는 일제 치하의 법관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도입된 임기제와 연임 규정이 나중에 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사법권 억압에 이용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승만은 1958년과 59년에 걸쳐 20여 명 법권의 연임을 거부, 전체 대상자의 1/4 이상을 탈락시킨 것.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법관의 신변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

– 현재 우리는 어떤 법률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할 떄 헌법재판소로 가져가 위헌 여부를 물어본다. 그런데 군인 등은 헌법에 떡하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제아무리 유능한 변호사가 수십 명 붙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 군대 가서 죽으면 개값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 유신에 맞선 기독교인들, 유신정권은 반독재운동에 나선 청년 학생들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좌익 사상을 신봉하는 좌경용공으로 몰았지만 종교인들 마저 빨갱이로 몰기는 곤란했다. 그래서 유신반대 운동의 핵심들에게 횡령죄를 적용하여 파렴치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했다.

– 긴급조치로 중앙정보부는 반정부 인사를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해 구속기간 제한을 받지 않고 수사하는 것이 가능. 긴급조치는 처벌하고 싶은 행위의 구성요건과 형량을 대통령이 정할 뿐 아니라 재판하는 기관까지 대통령 마음대로 정할 수 있도록 한 것. 헌법의 구성 원리를 깡그리 무시한 유신’헌법’은 긴급조치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하여 위헌 시비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했다.

– 긴급조치 1호의 첫 번째 위반자 장준하와 백기완 두 피고에 대한 재판은 기소에서 선고까지 겨우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이 모두 203명인데, 사형과 무기징역은 빼고 유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의 형량만 합쳐도 1,800년이 넘는다. 3.1운동 주모자 손병희가 일제 법정에서 받은 형량이 징역 3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엄청난 형량이 아닐 수 없다.

– 2006년 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문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낼 때 법조계 일각에서는 판사 이름을 절대로 공개해서는 안 되다고 아우성친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었다. 이 시절 법원 주변에서는 장차 대법원장감으로 거론되는 인재들의 경력 관리를 위해 일부러 서울 형사지법으로 보내지 않는 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 전두환 정권 초기 당시의 병역법은 6개월 이상 복역한 사실이 있으면 현역 입영은 물론 방위소집까지 면제, 군복무를 마쳐야 하는 운동권 남학생들은 어차피 군대 가서 3년을 ‘썩느니’ 시위를 주동하고 1년 가량 옥살이를 하면 군대 문제도 자연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이 시위를 주동하면 병역기피 목적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이들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들의 형량을 군 복무 기간보다 늘리면 학생들의 데모가 줄어드리라 본 것. 그러나 개별 사건에서 형량을 결정하는 권한은 사법부에 있었기 때문에 안기부로서는 ‘조정’이라는 이름의 과정이 필요했다.

결국 안기부의 ‘조정’으로 단순 교내 시위에 대한 형량이 두 배 가량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 중형 선고 원칙을 준수, 법원에 대해서는 계속 통제 조정을 해야 한다고 보았고, 구속자 누증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은 ‘각하의 특별조치’로 ‘탄력성’있게 대처한다는 처방. 부담은 계속 사법부에 지워 그들로 하여금 중형을 선고하도록 하고 나중에 생색은 ‘각하’가 내면서 풀어주겠다는 것. 안기부의 중형 선고 방침에 따라 충실히 중형을 선고한 판사들만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안기부가 단기적 목적은 달성했을지 모르지만 당국의 엄벌주의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서슬 푸른 안기부의 ‘조정’과 ‘협조’요청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법원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신성해야 할 법정 위로 고무신짝이 날아다니고 피고인들이 오히려 법관을 심판하겠다고 소리쳤다.

– 군사독재정권 시절 검찰은 지금의 기세등등한 검찰과는 달리 안기부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 각지의 신민당 현판식은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세력도 적극 참여, 그런데 급진적인 민중운동 세력과 신민당 간에 묘한 균열이 발생, 전두환은 4월 30일 신민당 총재 이민우와 회담을 갖고 여야가 합의하면 임기 중에 개헌을 할 수 있다면서 신민당이 재야나 민중운동 세력과 선을 긋기를 요구 이민우 역시 과격한 좌익 학생운동은 단호히 다스려줄 것을 주문하며 이에 화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3일 인천지부 현판식은 그 이전의 현판식과는 다른 분위기. 학생들은 ‘신민당은 각성하라’ 등의 구호도 함께 외쳤고, 지금은 멀리 가버린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단군이래 가장 많은 화염병이 허공을 가른 5.3사태의 핵심 지도부였다.

****

사법부 – 한홍구 지음 / 돌베개
———-
해방 이후 이 땅의 법을 지배한 자들이 어떻게 그 권한을 행사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본다. 판결로 말해야 할 때 침묵하거나 말해선 안될 말을 했었고,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었던 회한과 오욕의 司法部를 돌아본다.
———-

6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