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지음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9.7 | 목록
이구열 지음
발행일 2013년 12월 10일 | 면수 424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8,000원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지음 / 돌베개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민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한일보 기자신분으로 있다가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문화광광부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 등 문화재 관련한 일로서 평생을 지내는 저자.

이 저자가 1972년 5월 22일부터 11월 7일까지 1백 회에 걸쳐 『서울신문』의 특별기획으로 연재했던 「문화재 비화」를 묶어서 1973년 초판 발행한 『문화재 비화』라는 책이 그 모본이고, 이후 이 책은 1975년 일본어 일간신문 통일일보가 이 책을 일본어로 완역하여 6개월간 113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한 글.

그 뒤 1993년에는 일본에서 저자의 동의 없는 일본어판 『잃어버린 조선문화』라는 책까지 나오기에 이르렀고……

근 20년이 지난 1996년 ‘돌베개’ 출판사가 『한국문화재비화』를 내용을 새로 수정 보완하여 개정판으로 낼 것을 의뢰했으나 저자는 내용의 정리 보다는 몇 가지 자료(경천사 십층석탑 수난 관련 보도, ‘일본인의 고려자기 도굴 등 문화재 약탈’사건 판결문 번역정리, 문화재보호법 해설 등)를 더해서 책으로 낸 것.

1972년 첫 삽을 떴으니 첫 삽을 뜨고 난 이후로 치면 44년만에 나와 만나는 인연이 된 책.

내용이 튼튼한 책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힘을 발하는 듯.

지금 별 첨삭 없이 읽어도 생생하게 우리 문화재가 지난 100여 년 동안 겪었던 온갖 영욕과 오욕, 수난의 비화들을 여러 증언과 사료 등을 합해서 알려준다.

전국에 걸쳐서 숱하게 행해지던 우리 문화재의 수난사를 읽는 장면에선 정말 화가 많이 나기도 했지만 그나마 의식 있는 관리들과 백성들에 의해서 챙겨지고 ‘한국문화재보호협회’의 창립과 ‘문화재보호법’의 입법 등으로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서둘러 만들어서 관리를 했다는 점에선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1972년에 처음 원고를 쓴 이후 1996년 개정판을 지나 2013년 새로운 편집을 더해 최근 10쇄를 지나고 있다.

크게 선각의 인맥, 일제하의 수난, 서양인의 수집, 8.15해방 직후, 한국전쟁과 잃어버린 국보, 매장문화재, 도굴, 도난, 위조품 순으로 글을 이어가고 마지막 부록으로 경천사 십층석탑 수난 전말, 일본인 고려자기 도굴범 형사처벌 판결문, 광복 직후의 문화재 사건들, 문화재보호법 해설을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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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1월 10일, ‘보호법’을 처음으로 제정·공포하면서, 과거의 국보·고적이라는 분류적인 말 대신 종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문화재’ 라는 새로운 용어를 처음 사용.

– 1972발족한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운동지침은 ‘알기’·’찾기’·’가꾸기’, 곧 문화재 보호를 위한 국민계몽과 그들의 협조 및 참여 호소 및 ‘문화재 애호사상의 생활화’를 목표.

– 두 차례에 걸쳐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판독한 추사는 비석 측면에 굳이 새겨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자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는 병자년(1816년) 7월에 김정희·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년) 6월 8일에는 김정희·조인영 같이 와서 읽을 수 있는 68자를 심정 했다." 오늘 같으면 문화재의 현상 변경으로 법에 저촉되는 행위.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인 고유섭은 2년 후 조수로 임명. 그 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개성박물관 고유섭은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장기 연재물 집필.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 민속학 분야미술사의 위창 오세창처럼 조선 말엽에 눈떴던 존경할 만한 선각자는 상현 이능화

– 일본인 약탈자로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고려자기의 최대의 장물아비였고 고분 도굴의 공공연한 조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한국 통치의 첫 단계로 소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인 1906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정부의 고관이 하나 있었다. 다나카 당시 궁내대신(장관)이었다. 그는 이토가 한국 침탈의 기초작업을 완전히 다져놓은 한반도를 유유히 찾아온 기회에 사적인 야욕의 치밀한 해적행위를 저질렀다. 문화재 약탈이었다.

– 인근 주민의 저항과 관할 군수의 항거를 묵살하며 석탑을 마구 해체·포장해서 수십 대의 달구지로 야밤에 개성역으로 빼돌렸다가 기차로 인천까지 운반했고, 다시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의 반출 범행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다나카 궁내대신의 이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은 금세 소문이 크게 나면서 양식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시타케이 반환요구.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계속적인 반환요구에 굴복 반환. 탑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복원 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다.

– 석굴암이 하마터면 모조리 해체되어 서울로 운반될 뻔. 소네 통감이 불편과 험난을 무릅쓰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의 놀라운 구조와 감동적인 불상조각들을 구경하고 오층소탑까지 빼돌린 후, 세키노가 현지를 학술적으로 조사하여 그 역사적ㆍ예술적 가치를 최고로 평가. 그때의 결론이 석굴암의 불상 전부와 불국사의 철불을 서울로 운반.

그러나 그것은 당시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아 흐지부지 취소. 그때의 계획으로는, 해체한 석굴암의 석불과 기타 모든 석재를 토함산에서 약 40리 내려온 동해안의 감포를 통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의 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탑·석등·부도가 인천·부산·군산·목포 기타 여러 항구에서 일본 본토로 실려 나갔지만 1966년의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따른 협정) 후의 반환문화재 가운데 석탑류는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 개인 소유로 돼 있다는 이유로 일본정부는 그것들을 제외시켰다.

–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각 도경찰부장에게 지시·명령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패색에 휩싸이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애려고 든 것이다. ‘

임진왜란 때의 최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 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혹은 왜군 격파기념비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도록 비밀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으나, 파괴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 후 지방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져 갔다. ‘명량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데라우치도 만 6년 동안의 총독 재임기간 중 이 땅의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무수히 혹은 진상 받아 일본으로 빼돌린 후, 자기 고향에 ‘조선관’ 이라는 개인 수집품 진열관까지 세웠었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진열관 건물 자체가 서울의 경복궁에서 계획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가 얼마나 이중적인 식민지 통치자였던가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이조실록 같은 귀중본만은 잘 보조시켰던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그런대로 수습이 잘되어 규장각 장서들과 함께 전체가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돼 있지만, 총독부가 저들 마음대로 본국의 동경제국대학 부설도서관에 실어 보내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 했던 오대산 사고본은 10년 후에 데라우치 총독의 한일합방 선물로서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에 도쿄 일원을 불바다로 만든 관동대지진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책은 교수들이 밖으로 대출해 갔던 20여 책에 불과했다.

-당시 침략적인 대륙진출의 연구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의 이른바 ‘백산흑수문고'(우리의 오대산 사고본도 이 속에 들어갔었다)의 ‘백산흑수’ 는 ‘백두산-흑룡강’ 쪽을 목표로 한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들의 귀한 물건이란 금불이 패물과 이 땅에서 약탈 혹은 수집해 가지고 있던 역사유물과 미술품들이었다.

9월 들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해 와서 일제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서 미군정장관에 취임한 아놀드 소장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1인당 고리짝 2개씩 허용한다고 1차 군정령을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작은 불상이라든지 고려자기 같은 것들은 꽤 숨겨 갖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처음의 군정령은 "육색 1개 이상 안 된다"로 변경되었고, 미술품 수장자와 공동상이었던 일본인들의 속셈은 좌절되었다.

-8.15 해방 후 한국인 조사 연구팀에 의한 최초의 문화재 조사 발굴은 1946년 5월에 경주 노서리의 파괴된 고분. 이 고분은 ‘은령총’

– 1952년 3월엔 경주 금척리의 신라고분 발굴, 이것은 경주-대구간 도로확장공사로 파괴 노출된 2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 발굴

– 1962년 1월 10일자로 공포된 전문 7장 73조, 부칙 3조의 이 문화재보호법은 처음으로 문화재의 개념과 종류를 설정하고( 1)유형,무형문화재 2)기념물 3)민속자료), 정부 자문기구로 전문적인 문화재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했다. 이 문화재보호법은 또 매장문화재의 처리 규정과 발견 혹은 신고자에 대한 표창(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도둑이나 임의의 취득자, 그밖에 문화재의 불법적인 국외반출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도 규정.

– 흔히 말하는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크게 나뉘어 진다.

– 한국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유명한 기록은 1927년 11월 10일 밤에 경주박물관에서 발생한 금관총 출토유물의 도난사건이다. 도난 사실이 밝혀진 것은 11일 아침이었다. 범인은 유물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금관을 제외한 나머지 순금제 유물인 과대·요패·귀고리·팔찌·반지 등을 몽땅 싸 갖고 사라졌다.

황금유물만 노린 도둑이었다.

차마 금관까지는 손댈 수 없었는지 아니면 싸 갖고 가기가 거추장스러워서였는지 어쨌든 그것만 무사.

– 한국 정부의 문화재청이 2004년 9월말 현재 조사 파악하고 있는 국외유출 한국문화재의 총 윤곽은 세계 20개국의 공공 박물관과 미술관, 도서관 및 공개된 유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7만여 점이다. 그중 도쿄 워크숍의 주제였던 ‘일본 안의 한국 문화재’는 국립 도쿄박물관에 1,849점,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1,501점, 그밖에 오구라 다케노스케 컬렉션의 1,296점을 비롯한 총 3만 4,52점으로 공식 집계되어 있다.

그러나 하야시 교수는 "그 공개된 숫자는 전체의 1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정설이며, 그렇다면 일본의 개인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문화재는 실로 30만 점 가량이라는 말이 된다"고 주제 발표에서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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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지음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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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신문에 연제 기사 「문화재 비화」를 묶어서 1973년 초판 발행 후 1996년 다시 보완해서 낸 우리나라 문화재들이 지난 100여년간 겪었던 수난의 비화를 여러 증언과 자료들을 모아서 만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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