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곧 사람의 이야기이다

글쓴이 이연경 | 작성일 2005.2.2 | 목록
발행일 2003년 12월 1일 | 면수 500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7,000원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1 .2. 3.
– 인간에 대한 탐구와 사례 연구로서의 열전(列傳)

윌슨은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생물학’ 이라는 식으로 정의한 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열전(列傳)은 한 개별적인 생물에 대한 연구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독서가 잡독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나마 비중있게 보는 것은 역시 인문학과 역사, 사회과학, 철학, 문학 분야에 집중되는데, 그 책들을 대상으로 정의해보자면 역시 그 핵심은 ‘인간을 다룬, 인간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역시 잡독할 수밖에). 윌슨의 정의를 빌자면 내 주된 연구대상은 인간이란 것인데, 그렇다고 거창하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한 인간, 인간마다의 특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편이다. 이런 방식의 독서에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살았던 시대와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 그 한 인간이 그 시대를 살아가며 처신한 삶의 흔적들을 조용히 되밟아 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인간의 뒤를 밟는 탐정이자, 동시에 우리들의 생태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기본 탐독서가 된다.

우리에게 흔히 “열전(列傳) “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서 “사기(史記)” 중에서도 그 고갱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고대사 인물 열전을 상상하게 된다. 그만큼 사마천의 사기 열전은 탁월하다. 그런데 정작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 본 이들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에 감동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사마천의 “사기”가 기전체(紀傳體)로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기열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많은 이들이 감동을 표하곤 한다. 사마천은 중국 전통의 사서인 “춘추”의 세계관을 계승하여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는 사마천이 제후나 왕을 중심으로 기술한 세가(世家) 30편 중 상갓집 개로 불리었던 공자를 집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자는 변변한 벼슬 한 번 올라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사마천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열전에 별도로 5명의 자객(조말, 전제, 예양, 섭정, 형가)을 다룬 “자객열전(刺客列傳)”을 통해 이들 협객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으며 역시 정사(正史)에서는 흔히 다루지 않을 인물들을 “유협열전(游俠列傳)”을 통해 다루고 있다. 사마천에게 있어 ‘협(俠)’이란 ‘무(武)’를 바탕으로 하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해관계에 따르지 않은 의인(義人)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사서로 언급되는 까닭은 필경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국적 열전의 탄생을 바라보며….

이 책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은 오랫동안 서울대 사학과 교수로 봉직해온 한영우 선생(현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의 정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료, 제자 학자 63인이 고조선 시대 이래 우리 역사 속 인물 63인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종종 정년 퇴임하는 교수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책들은 보기 보다 실속없는 것들이 많은데, 이 책의 경우는 그런 사례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 책의 머리글에는 “역사 연구는 기본적으로 인물에 관한 연구라 할 수 있다”며 인물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간 우리 역사학계의 인물사 연구는 열전이라기 보다는 나열식 인물사전, 조선시대 인물들과 같이 사료를 구하기 쉬운 대상, 분단 문제로 인해 고대사 인물이라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남한 출신 인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를 알고 있지 못했다. 걔중에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위인들도 있었고,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글을 처음 읽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제1권에서는 위만, 대흠무, 김헌창, 송유인(드라마 “무인시대”를 본 사람들은 아마 기억하실 수 있을 듯), 정서, 최해, 조준, 이문건 등이 그렇고, 제2권에서는 유희춘, 한교, 강후진, 신경준, 서명웅, 체제공(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등장), 홍양호, 서호수, 이서구, 유신환 등이 그렇다. 제3권에서는 김병욱, 박주종, 김백선, 한상룡, 김진구, 손진태, 이종률이 또한 그렇다. 이 중에는 우리 고조선 시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는 장대한 인물 열전 계보에 그 이름을 상재시킬 만한 존재인가 의아해지는 인물들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번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기만 되풀이해서 읽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인물 선정에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전혀 없다.

다만, 이 책을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비교해볼 때 몇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물론 고대의 제왕은 모두 정치가이자 동시에 정복자, 군인이었으므로 특별히 무인(武人)을 홀대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인물인 송유인과 김방경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 민족의 무장(武將)들이 거의 대부분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엄밀히 말해 송유인의 경우는 무장이라기 보다는 무인정권에 빌붙은 권세지향의 정치가라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단순히 구색맞추기 차원이 아니라도 한 시대를 대표할만한 인물들에 대한 고려가 좀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사마천이 고대 중국사로 한정되는 인물을 다루기 위해 “사기” 130편 중 70편을 인물열전에 할애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보다 훨씬 긴 시간대의 역사를 다루면서 사기열전보다 적은 인물 열전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우기 앞서 말한 대로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역사 인물들에 대한 도서로는 사실상 최초로 대중의 시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높아보인다.

그간 역사적으로 소외되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이 책의 장점은 더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기초자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학자들이라는 신뢰성에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이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하여 집필되었음에도 기존의 역사학계 일반의 시각과 다소 다른 관점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 서평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토정 이지함의 저서로 인정되어 오던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 아닐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던지, 실학의 선구자로 의미를 재부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시도들은 이 책이 한영우 선생의 정년을 기념하여 저술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영우 선생은 “다시 찾는 우리 역사(경세원)” 등을 통해 우리 고대사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고자 노력해온 사학자이며, 그간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폄하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재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그간 고조선을 복속시킨 왕으로만 기억되던 위만을 ‘고조선을 고대의 정복국가로 중흥시킨 왕’으로 재조명하거나 그간 사대주의자로 인식되던 김부식을 합리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로 격상시키고, 송시열에 대한 평가도 다시 내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자면 싫으나 좋으나 우리 역사이고, 우리의 인물들을 구태여 우리들 자신이 폄하하고 훼손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의미도 되겠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해석 가능한 인물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런 평가는 도전적인 평가이자 동시에 매우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지닌 미덕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이 지닌 미덕과 비교적 일치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패배한 인물의 전기를 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옥균의 열렬한 숭배자였고, 훗날 친일파가 된 김진구, 한상륭 등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다루고 있는데,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등에 대한 글들이 그러하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느낌 소감은 기획서들이 모두 그러하듯 다루고 있는 각 인물의 저자들에 따라 글쓰기 방식이 고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중의 수준을 의식했다는 머리글이 있음에도 일부 글들은 전형적인 논문투 글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경향신문” 조운찬 기자의 평가(“사기” 열전에서 보이는 생생한 인물묘사를 찾아볼 수 있는 글은 63편 중 ‘강홍립’과 ‘우장춘’)처럼 생생한 인물묘사가 돋보이는 몇 편의 글들은 읽는 내내 새로운 감동에 젖어들게 했다.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에 따라 역사 속 인물들은 민중 혹은 사림 등과 같은 집단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계급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개인 혹은 영웅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 대상을 어떻게 보던지 우리는 역사가 곧 사람의 이야기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바라는 것은 역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앞으로도 이런 기획이 계속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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