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 리처드 로빈스 지음 / 김병순 번역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4.11 | 목록
발행일 2014년 3월 10일 | 면수 812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40,000원

부제 : 생산, 소비, 노동, 국가의 인류학

역사학자, 경제학자 또는 정치인이 아닌 인류학자가 바라본 자본주의 문화가 번져 감으로서 발생하는 다양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에 대해서 논한다.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리처드 로빈스가 바라보는 자본주의 세상이 지구에서 세를 넓혀가면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사실들이? 폐해들이?? – 예를 들면 인구증가, 기아, 빈곤, 환경, 테러, 종교 등의 팩트 – 왜 발생하는지의 문제)에 주목하고 객관적으로 이런 현상이 왜, 어떤 이면이 숨어서 발생하고 지금에 이르는 등을 그렸다.

대학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폭넓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짠 커리큘럼이다 보니 토픽이 폭넓고 방대한 편이다.

현존하는 다양한 지구촌의 갈등들, 원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들의 근원을 파헤쳐서 지구촌의 모호한 세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와 해법을 구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접목시켜 그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세상이 무너지고, 삶도 무너지며 자본의 정점에 있는 한 사람으로 이익이 집중되는 모양이라 말한다.

그동안 단편적(맹목적)으로 ‘이주민’들이 던져준 ‘미개한 원주민’ 단어에 익숙하게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도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을 반성하게 된다.

우리도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유럽과 그에 의해 문명화된(?) 원주민의 신분이 아니었던가? 물론 지금도 그렇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프랑스와 미국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 행한 로직 그대로 일제가 강점기 동안 행했고, 해방 이후에 미군이 남한에 똑같이 행했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들이 미개하다고 믿었던 종족인 원주민들을 교화하여 문명화 시키고, 도로를 건설하여 자원을 수출하고 생활수준과 평균연령을 향상시키는 근대화를 했다고 단순하게 이주민(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들의 식민지 통치의 표준 공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환경파괴와 삶터를 읽고 자연스럽게 원주민들은 식민지 지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 책의 한 부분인 기아 문제에서는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절대 생산량은 넉넉하지만, 불필요한 혹은 사치스러운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했을 전통적인 삶은 고사하고 그곳을 수백 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공정한 배분은커녕 수탈함으로써 기인된 기아이기 때문에…

아무튼 벽돌책은 100~200p 정도를 넘어가면 시동과 예열을 마쳐서 저자와 박자를 같이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초반전 리딩 시점에 몰입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니나 다를까 살살 따라가다 보면 몰입하여 중반을 살짝 넘어가면 관성의 법칙으로 인한 동력이 생겨 쉽게 눈이 열리고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마지막 페이지(812p)에 이를 수 있다.

이제 벽돌책이 두렵지 않다. 정병준의 한국전쟁, 독도 1947 덕분에 면역이 생겨서~ ^^*

아무튼 이렇게 가벼운 도서가 아닌 사명감으로 만든 논문 같은 책은(논문이건 번역서건~) 의무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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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부터 미국은 해마다 의미 있는 날을 경축하는 휴일을 지정 대게가 종교적 성격으로 출발했으나 세속적인 경축일도 있었음. 사람들 대다수 특히 상인들은 휴일과 축제가 오히려 이하는데 방해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휴일 일수를 줄이려 애썼다. 그러나 19세기 말 상인들은 휴일이 상업적으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덕분에 밸런타인데이와 크리스마스, 어머니날 등이 대량소비를 견인하는 날이 되었다.

수십 년간 자행된 아동노동을 제한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결실은 마침내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아동노동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승인, 이로써 어린이들이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전환. 이런 사회운동을 이끈 개혁가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린이들은 과거 노동자였을 때보다 지금 소비자로서 국가 경제에 훨씬 더 도움이 되고 있다.

공장 환경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시간 개념을 요구했고 따라서 노동자들은 그것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또 하나의 문화적 산물이다. 우리의 시간은 대체로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인 시계의 지배를 받는다. 마다가스카르의 경우 시간은 밥을 짓는 것으로 측정(약 1시간 반 걸린다), 17세기 칠레에서는 달걀을 요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베마리아 기도를 크게 암송하는 시간과 같고, 버마에서는 승려들이 기상하는 시간은 그들의 손에서 정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았을 때였고, 해안 지역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사회적 기준은 밀물과 썰물.

사람들이 많이 읽는 문화나 역사 책을 보면 마르코 폴로나 바스쿠 다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같은 초기 ‘탐험가’들의 모험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탐험가라기보다는 배를 타고 다니는 상인에 더 가까웠다. 그들이 탐험에 나선 목적은 대개가 경제적 이유

아프리카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땅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예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 땅을 더 많이 일굴 수 있었기 때문.

유럽인이 신세계를 차지한 것은 그들의 직접적인 정복 행위보다 그들이 함께 운반해온 병원균에 의한 원주민의 유린 행위가 더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인구감소는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경제를 확장하면서 나타난 유일한 결과가 아니었다. 원주민의 인구 감소는 노예무역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유럽인은 점점 줄어드는 원주민 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해 플랜테이션 농장과 공산으로 수많은 아프리카인을 수송해왔다.

오늘날 우리는 프랑스인 하면 포도주 마시는 것을 연상하지만 19세기의 첫 반세기까지만 해도 프랑스 농촌에서 포도주는 흔한 술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철도가 놓이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도로와 철도는 농민들을 전국의 시장으로 이끌었다. 이제 농민들은 과거에는 팔지 않았던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농작물은 재배를 중단했다.

기아를 자격의 박탈로 보는 시각은 자본주의 문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편견, 이를테면 빠른 성장과 생산에 대한 지나친 집착 분배 문제의 무시, 정부의 식량 배분 개입에 대한 적개심 같은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는다. 따라서 우리는 기아나 기근의 문제를 생산의 실패보다 분배의 실패로 보게 된다.

기근 때문에 기아가 발생하는 경우는 감소, 가난 때문에 생기는 특정지역의 고질적 기아는 오히려 늘어남

소고기의 장점은 야외에서 석쇠에 구워 먹기가 좋다는 것. 사람들이 교외로 이사하면서 그 인기는 더 높아짐, 돼지고기 패티는 잘 부스러져 석쇠 사이로 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소고기 패티는 잘 붙어 있어서 굽기가 좋았다. 거기다 미 농무부는 돼지고기의 경우 선모충병 검사를 하지 않았는데 검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 덕분에 완전히 익혀 먹으라고 권장했고 이 경우 너무 질겨짐. 덕분에 소고기를 선택. 1946년 미국 농무부는 햄버거를 정의하는 법령을 만듦. 지방이 30%를 넘으면 안 되고 양을 부풀리는 물이나 탄산수, 밀가루 같은 증량제를 넣으면 안 된다고…. 덕분에 소가 먹는 옥수수 산업도 같이 융성함.

인간이 앓는 호흡기질환 가운데 대부분이 가축을 사육한 뒤부터 발생했다는 증거가 있다. 홍역, 천연두, 유행성 독감, 디프테리아처럼 과거 한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앓았고 지금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온갖 질병이 본디 가축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곤충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순간, 새로운 서식지와 숙주를 찾아 나선 곤충과 병원체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주변의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환경을 창출하느냐는 인간이 질병에 노출되는 문제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폭력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낙인찍는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 건물이 공격당한 이래로 미국 정부와 언론은 어떤 형태의 폭력 저항이든 무조건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 폭력행위들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차이를 명료하지 않게 만들고 그들 문제의 근원이 경제적이며 전 세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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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니 ‘잃어버린 원주민들의 땅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너무 멀리 왔나? 아니면 지금도 늦지 않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늘 맴돈다.

지구가 생긴지 50억 년 가량, 인류가 사람답게 산지가 벌써 수천 년, 문자가 발명되어 우리에게 글로 정확한 의사가 전해오는 기간만 이미 수천 년이 아닌가.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들의 시간에 맞게 살아왔고, 그들만의 공동체로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길을 찾아 현명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라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탄생한 시간이라는 만들어진 둥근 바퀴에 맞춰 살아온 시점부터 우리는 하루를, 한 해를 만나고 보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닌 정해진 시간 속에 맞춰지는 노예가 되고 말았던 게 아닌가 싶다.

당근 그 필요성은 산업혁명과 임금노동과 표준화 등등의 사연으로 인해서 강제됐음은 물론이고….

이젠 시간에 이끌리지 않고, 자연의 시간에 나를 맞추어 살 수는 없을까…

그리 살고 싶은데…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해가 지면 일을 멈추고 집으로,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비가 오면 쉬고 맑으면 씨를 뿌리고, 추우면 아랫목에서 보온하고 더우면 앞개울로 식히러 나가고…

항상 넉넉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 어딘가에 쫓기듯, 항상 다 채우지 못하면 무슨 큰일이 날듯한 불안감에 초조해하지 않으며, 많이 부족하더라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며 조금은 느리게 항상 비어 있지만 그 빈 만큼의 넉넉함으로 행복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시공간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듯하고 내가 만들고 내가 지켜내서 후대에 전해줘야 할듯하니

사명감으로 창조하는 길 밖에…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 리처드 로빈스 지음 / 김병순 번역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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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인이 아닌 인류학자 리처드 로빈스는 자본주의 문화가 확산되어감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은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한 자본의 무한팽창 속성으로 인한 근본적 폐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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