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깊이가 곧 사상의 깊이

글쓴이 바람돌이-알라딘독자 | 작성일 2005.1.27 | 목록
신영복 지음
발행일 2004년 12월 13일 | 면수 516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8,000원

어떻게 리뷰를 쓰야 할지 참 난감하다. 어떻게 쓰면 신영복씨의 사람됨의 깊이와 그 사상의 깊이를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아니 그 단편이라도 표현할 수 있을지….

나는 원래 달변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떠벌떠벌 떠벌리는 말을 듣고 있으면 그 순간은 빠져들기도 하지만 또 재밌기도 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하다. 달변가의 대부분에게서는 그 사람이 살아왔을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들을 자랑하고픈 지적 허영심만이 느껴진다면 좀 심한가?(TV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리고 술자리에 가도 자주 있다) 나는 나의 이런 성향을 그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 다르니까…. 그런데 신영복씨의 이 책 노자편을 보면서 이런 글을 발견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듯하다.

여기서 언뜻 이해가 안가는 말이 가장 잘하는 말이 마치 더듬는듯 하다는 구절이다. 이를 신영복선생님은 언어란 언제나 불충분한 소통 수단이기 때문에 화자의 연상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날 경우가 많고 말을 더듬거나 느리게 할 경우 이러한 화자와 청자의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는 의미로 해석한고 있다. 즉 듣는이의 연상세계를 확장해 주는 것이 진정한 달변이라는 것이다. 내가 말 잘하고 말 빠른 사람을 대할 때 불편했던 이유가 거기에 내가 없어서였다는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와 닿았다.

위의 인용글의 관점에서 볼 때 신영복선생님은 대단한 진정한 달변가이다. 결코 급하지 않게 하나 하나 고전들을 짚어나가는 그의 글들속에는 그의 인생의 깊이와 사람됨의 깊이, 그리고 결코 청중을 무시하지 않는 같이 안고 생각해나가자의 그의 고민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주제들 역시 가볍지 않아 우리 시대가 떠안아야 할 화두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동양고전이라면 캐캐묵은 도덕교과서 정도로 생각하거나(그러면서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옛 성현들의 명언 금언 정도로 생각하는게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나 역시 이 범주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익히 제목만 알고 있는(그래서 절대 안읽는 진짜 고전) 동양의 고전들-시경, 논어 맹자등등-을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책들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결의 관점에서 읽어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날 어떻게 되살려내고 현재와 미래의 시대 담론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나간다. 물론 핵심은 여러 책소개에서 말하고 있듯이 관계론이다. 자본주의가 서구의 근대철학인 존재론에 기반하여 나와 남의 분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오늘날의 세계를 비판한다. 그리고 동양의 고전들속에서 존재론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의 기초로서 관계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책의 전체 구조이다. 어떻게 동양의 고전들 속에서 이러한 담론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건 단순히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과 생각을 반추하게 한다는 것에 이 책의 더욱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주변과 생활에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또는 어떤 관점에서 나의 삶 주변을 바라봐야 할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이것이 다른 이론서들과는 다른 이 책의 최대의 강점이다. 책의 말미에서 그는 ‘사상이란 실천이다’라고 선언한다. 그 실천의 방도를 고민할 수 있게 해주는 책, 큰 사회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자잘한 일상에서도 역시 그러한 책.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바칠 수 있는 최대의 헌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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